# 194
194화 절망의 선택지 (1)
대다수의 노련한 숙련자들은 신성제국의 마물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차출되어 이번 천공섬 전투에 참가한 자들은 신출내기가 많았다.
첫 출전이 빌로스 왕국의 운명을 다투는 일전인지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긴장하는 것 이상으로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신출내기의 대다수가 어릴 때부터 루크의 명성을 듣고, 언젠간 루크와 함께 전장에 서는 것을 꿈꿔왔던 자들이다.
인간계 정점이라 불리는 사람과 함께 전장에 설 수 있다. 그런 오랜 꿈이 이루어졌는데 고작 긴장 때문에 일을 망친다? 기사로서, 마법사로서 그보다 더 꼴사나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고로 꼴사납게 발목을 잡을 바엔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겠노라고 각오하고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보다 국왕의 목숨을 몇 배는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다.
실정이 이럴진대 그들의 눈에 천공섬 3대 거조에게 둘러싸인 루크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상에서 언데드 용인들을 상대하고 있던 자들은…….
“크윽, 더러운 놈들! 전하만 저렇게 집중적으로 공격하다니!”
“한눈팔지 마! 지상에 있는 용인들을 묶어 놓지 않으면 이놈들까지 전하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를 게 뻔해! 그리되길 바라는 거야?”
“분발해라! 우리가 한 발자국씩 더 뛸수록 전하의 부담이 줄어든다!”
그리고 공중에서 언데드 천공조들을 상대하고 있던 자들은…….
“그리핀 라이더는 진영을 유지하고, 삼색제비 부대는 최대한 전하를 지원해라! 전하께서 전력을 온전하게 보존한 채로 카라스코에게 닿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우리 역할이잖느냐!”
마지막으로 구 겐크 왕국 출신의 마나마스터이자 지상에서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바스커 백작은…….
“아이고, 신출내기들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만. 나도 한때는 저랬었지. 그립구만, 그리워.”
바커스 백작의 모습은 결의에 가득 차 있는 휘하의 기사나 마법사들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숙련자의 여유일까? 루크가 3대 거조들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려 있는데도 마실이라도 나온 양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신출내기 기사, 마법사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전전긍긍하며 바스커 백작에게 대책 강구를 요청했다.
“전하께서 이토록 위태로우신데 어찌 그리 느긋하십니까! 한시라도 빨리 전하를 지원할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허허허, 자네들은 전하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구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느긋하게 말씀하실 때가 아닌…….”
그러던 차에 상공에서 뇌운조의 비명이 널리 울려 퍼졌다.
“삐애애애애액!”
놀란 기사와 마법사들이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상공에선 뇌운조가 추락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뇌운조가 추락함과 동시에 창천앵무도 세로로 쪼개지며 추락했다.
1마리도 아니고 2마리나?
방금까지 전전긍긍하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뻥찐 표정을 지었다.
3마리가 모두 모이면 일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3대 거조를 이리 쉽게 처리해? 그것도 혼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루크가 단독으로 일국을 멸망시킬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 정도는 자주 접해 봤다.
근데 소문이라는 게 워낙에 과장이 많지 않은가. 강하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방편의 일종이라고만 생각했다.
바스커 백작은 놀라고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에게 거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전하 걱정이라네.”
뇌운조와 창천앵무가 추락한 마당에 피닉스라고 무사하랴.
3대 거조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피닉스가 필사적으로 루크를 공격했으나 3마리서 협공할 때도 당하지 않던 사람이 피닉스의 단조로운 공격 패턴에 당할 리 만무했다.
화려함도 상대적이라고, 종횡무진 상공을 누비는 루크 앞에서 피닉스의 화염 유성우는 비루한 불똥 세례로 전락하고 말았다.
승부는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어졌다.
투영검이 화염 유성우를 훑으며 가볍게 상쇄에 성공했고, 중후한 기세를 간직한 채로 쇄도하여 피닉스의 목을 내리쳤다.
이 한순간만큼은 투영검이 닭 잡는 칼로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호쾌하기 그지없는 칼질이었다.
“키에에에엑!”
뇌운조보다 반음 낮은 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며 피닉스의 몸체가 빛에 휩싸였다. 빛무리에 휩싸여 있던 피닉스의 실루엣은 삽시간에 수박만 한 사이즈로 줄어들며 알의 형태를 이루었다.
피닉스의 알은 아래로 추락하여 바스커 백작의 근처에 떨어졌다.
쿠웅!
피닉스에 걸려 있던 마물화 술식이 해제되었는지, 해제되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그 부분은 피닉스가 새롭게 부화해야지만 확연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바스커 백작이 피닉스의 알을 어찌 처분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상공에서 루크의 지시가 떨어졌다.
“보관해 둬!”
떨어진 명령에서 루크가 피닉스를 호되게 부려 먹을 작정이라는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바스커 백작은 두 팔을 위로 들어 큼직한 동그라미 제스처를 취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훗, 파이랑 고대 정령왕만 해도 차고 넘치시거늘 피닉스까지 손에 넣으실 생각이신가 보구먼. 무섭구만, 무서워.”
무섭다고 말하는 것치곤 바스커 백작의 말투는 익살스럽기 그지없었다.
주군이 더 강한 전력을 갖추겠다는데 싫어할 신하가 어디 있겠는가.
부활하여 생태계 파괴나 하게 놔둘 바엔 차라리 산하에 거두는 게 낫긴 하다.
피닉스의 알을 챙긴 바스커 백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있던 기사와 마법사들은 여전히 루크의 무력을 실제로 직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래서 호들갑 떨지 말라고 했던 것이건만.
상공 루트가 뚫렸으니 더더욱 지상에 있는 언데드 용인들을 붙잡아 둬야 한다.
바스커 백작은 기사와 마법사들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명령을 빙자한 강한 호통을 쳤다.
“이제 알겠느냐? 각자 맡은 일을 실수 없이 수행하는 게 전하를 돕는 일이다! 전하께서 카라스코와 단독으로 겨룰 수 있게 언데드 용인들을 철저히 묶는 게 우리 역할임을 잊지 마라!”
* * *
지상에선 지상군이 언데드 용인들을, 상공에선 비행부대가 언데드 삼색제비들을 묶어 두면서 더 이상 루크를 가로막는 적은 없었다.
루크는 마나를 갈무리하며 파이를 몰았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마 카라스코는 거기 있을 거야.”
천공섬에서 카라스코가 머무르고 있을 만한 장소라면 한군데밖에 없었다.
용인들의 성소라 불리는 천공 콜로세움.
용인들은 신 놀음을 흉내 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다. 그래서인지 지상을 구경하는 것뿐만 아니라 간간이 지상의 생물체를 잡아다가 천공 콜로세움에서 싸움을 붙이곤 한다.
인간도 동물을 잡아다가 동물과 동물끼리 싸움을 붙여 본 이력이 허다하지 않은가.
크게는 국립 투기장에서 사자나 호랑이, 곰 등을, 작게는 투견장에서 개와 개끼리 싸움을 붙이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도 하는 짓을 용인들이라고 하지 않을까.
천공섬의 콜로세움은 원형 경기장 형태를 띠고 있고, 돔 형태의 천장이 씌워져 있어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루크는 콜로세움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착지하며 파이의 등 위에서 내렸다.
“넌 돌아가서 조무래기 정리에 가담해.”
혼자 들어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선언에 파이가 길길이 날뛰었다.
“나도! 나도!”
같이 싸우고 싶어 하는 마음은 기특하나 이번에는 파이가 낄 틈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부드러운 손길로 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만 받아 둘게.”
여느 때와는 다른 상냥한 스킨십에 파이도 루크의 뜻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천공 콜로세움은 수만 명을 수용할 정도로 넓으나 루크와 카라스코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그마저도 좁게 느껴질 것이다.
기동력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장소이니 파이가 있어 봤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가능성이 높았다.
파이도 자신의 의욕이 루크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루크의 팔에 대고 부리를 비볐다.
“조심! 조심!”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거 봤어?”
반박이 불가능한 말이었던지라 파이도 날개를 팔락이는 것으로 무안함을 무마했다.
루크는 파이를 뒤로 하며 콜로세움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 안으로 몸을 들이자마자 뒤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웅!
뒤를 돌아보니 입구가 마기로 이루어진 검은색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나 블레이드가 둘린 검으로 톡톡 두드려 보았는데 막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아니, 검은색 막 자체가 어스의 껍질을 개조해서 만든 것인지 건드리는 족족 충격을 흡수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차단막은 도망가지 못하게 퇴로를 막음과 동시에 외부로부터 루크를 지원하기 위한 움직임을 막기 위한 용도로 준비한 듯하다.
함정을 준비할 거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짧은 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기다란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넓은 장소가 나타났다.
통로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관중석, 용인 중에서도 높은 자들만이 앉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귀빈용 객석에 검은 로브를 두른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루크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오만한 자세의 카라스코를 보고선 대번에 빈정거렸다.
“바람직한 자세로군. 가진 게 없으면 허세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카라스코가 손을 위로 들어 로브 후드를 뒤로 젖혔다.
로드 후드 아래로 가느다란 실눈 눈매를 지닌 젊은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래전, 카라스코의 원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이었다.
루크 특유의 사람 속을 긁는 화술에서 카라스코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꼴사납다는 건 인정하지. 천공섬까지 동원했는데도 실패할 줄이야.”
“부끄러운 줄 안다면 스스로 저승으로 가지그래?”
“네놈이 재촉하지 않아도 다음 달이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을 테지. 그 전에 네놈의 절망하는 표정만큼은 보고 가고 싶더군.”
“그거라면 별에 대고 비는 것이 최선일 것 같은데? 네 능력으론 무리잖아?”
도발은 몇 번을 하더라도 손해를 입지 않는다.
그야말로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천연 무기나 다름없다.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평정심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효율적인 무기가 없는 셈이다.
처음에는 평정심을 유지하던 카라스코였지만, 말을 섞을수록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내 계획을 무너뜨렸다고 능력까지 앞서는 걸로 착각하고 있나 보구나.”
카라스코는 로브 안쪽에 손을 넣어 허리춤에 달려 있는 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푸른 비늘로 이루어진 푸른 검을 늘어뜨리며 마나를 부여했다.
그 순간 카라스코가 쥐고 있는 검, 빙백검의 효과가 발동하며 콜로세움 안이 마나 동결 지대가 되었다.
이 공간 안에서 마나 혹은 마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빙백검을 쥔 카라스코뿐.
카라스코는 당연하다는 듯 빙백검에 마기 블레이드를 피워 올리며 적의를 드러냈다.
“네놈이 절망할 때까지 자근자근 썰어 줄 테니, 최대한 발버둥 쳐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