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화 절망의 선택지 (2)
카라스코의 신형이 일순 연기처럼 꺼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과 마법을 둘 다 다룰 줄 아는 자에겐 무척 익숙한 광경이다.
블링크를 이용한 거리 좁히기, 그리고 상대에게 방비할 틈을 주지 않는 속공.
루크도 자주 썼던 방법인지라 대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블링크를 사용하면 도착할 장소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약간 일렁이는데, 그걸 보고 대응하면 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눈으로 보고 대응했겠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루크가 들고 있는 검은 바다의 신기, 카라스코가 들고 있는 검은 천공의 신기이다.
검의 강도가 비슷한 상황 속에서 한쪽은 마나가 깃들어 있지 않고, 한쪽은 마기가 깃들어 있다면 어느 쪽이 밀릴까? 결과는 지나가는 아이도 알 만큼 자명한 바이다.
루크는 지면을 박차며 측면으로 몸을 날렸다. 동시에 빙백검이 루크가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콰콰콰콰콰!
수백 가닥에 달하는 마기의 실오라기가 지면을 사정없이 휘갈겼다. 부서진 자갈과 모래가 사방팔방으로 튀는 가운데, 지면에는 흡사 거대 괴수의 손톱자국을 연상케 하는 난도질 자국이 남아 있었다.
카라스코는 충돌 대신 회피를 택한 루크를 비웃었다.
“왜 그러지? 날 죽이러 온 거 아녔나? 얼마나 잘 도망치는지 자랑하러 온 게 아닐 텐데?”
아까 전에 도발했던 것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그 때문인지 루크를 도발할 기회가 생기자마자 이때 다 싶어 도발을 날리고 있었다.
옆으로 몸을 날린 루크가 지면을 한 바퀴 구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 흐르듯 기본 자세를 취한 후에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너무 콧대를 세우지 않는 걸 추천하지. 그래 놓고 깨지면 평소보다 배는 부끄럽잖아?”
이번에는 루크가 검을 휘둘렀다. 요정의 무덤에서 증명되었듯 마나 동결 지대에서도 해왕검의 검격은 이상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검격의 크기와 위력은 해왕검을 휘두른 힘에 비례한다.
무척 가볍게 휘두른 것 같은데도 성인 장정 십수 명 정도는 가볍게 담아낼 듯한 대형 검격이 파생되었다.
후우우웅!
수면에 달라붙을 듯 저공비행을 하는 새처럼, 검격 또한 지면에 달라붙을 듯 낮게 날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흙먼지는 연막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라 검격의 궤적을 완전히 감추었고, 카라스코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카라스코는 빙백검을 허리 옆으로 당기며 같잖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해 놓고 고작 한다는 게 모래 장난이라니 같잖아 죽겠군.”
카라스코가 빙백검을 한 번 휘두르자 수백 가닥의 마기 블레이드가 흙먼지 속을 마구 헤집었다.
먼지구름 안에서 검격과 마기 블레이드가 가닥가닥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투펑! 투퍼벙! 퍼펑!
거인들이 대형 봉고를 하나씩 껴안고 쉴 새 없이 두드리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박치들의 불협화음을 떠올리게 하는 소음 속에서 루크의 맹공이 이어졌다.
루크는 사람의 움직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멀리서 본다면 사람이 아니라 맹수가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빨랐다.
낮은 자세에서 실현된 질주와 함께 해왕검에서 연신 검격이 뿜어져 나왔다.
후웅! 후우웅! 후우우웅!
검격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카라스코에게 쇄도했고, 공격의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천공 콜로세움 안이 흙먼지로 가득 찼다.
마나의 유무라는 격차가 있는 이상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한다.
흙먼지를 연막 삼아 쉴 새 없이 몰아붙이다 보면 카라스코도 얼마간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카라스코는 화끈한 대응을 펼쳤다.
“크라잉 스톰.”
키에에에에엑!
작디작은 주문 영창과 함께 천공 콜로세움이 안에 폭풍이 몰아쳤다. 바람 몰아치는 소리가 마치 마녀의 비명 소리처럼 섬뜩하면서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귀를 괴롭히는 고성과 함께 폭풍이 흙먼지를 헤집어 흩트려 놓았고, 폭풍 속에 섞인 칼바람이 루크를 난도질했다.
티잉! 팅! 티잉!
칼바람이 루크가 입고 있는 백색의 갑옷에 부딪힐 때마다 막대로 트라이앵글을 때리는 듯한 청명한 타격음이 크라잉 스톰의 소음에 화음을 더해 주었다.
이윽고 크라잉 스톰이 멎으면서 카라스코가 루크의 갑옷을 응시했다.
“엘리나 그년만 아니었으면 내 것이 되었을 갑옷이었건만.”
루크가 선보인 맹수와 같은 움직임은 전부 백금 갑옷의 효과 덕분이었다.
백금 갑옷을 입으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움직임을 가질 수 있다.
이 또한 마나와는 무관한 신기 자체의 능력이기에 빙백검의 효과로부터 자유롭게 발동할 수 있었다.
엘리나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백금 갑옷의 틈새 사이로 드러난 루크의 근육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네놈에게 그 이름을 거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물론 있고말고. 기억을 잃은 천치에게 그토록 바라던 새 세상의 주인이 될 기회를 주었더니 제 발로 기회를 걷어찼지.”
“텅 빈 두개골을 지닌 네놈보다는 훨씬 현명한 것 같다만?”
“크하하하! 길거리 만담으로나 어울리는 농담이로군. 비싼 그릇을 개 밥그릇으로 사용한 것과 다를 바 없거늘. 현명? 그게 현명하다고? 개소리를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재주가 있구나.”
함부로 비웃지 마라.
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곤 하나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꿈을 양식 삼아, 희생을 의복 삼아, 연심을 고향 삼아 버텨온 그녀를 욕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겉모습은 마물의 모습이었으나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답게 죽은 그녀다. 잘못이 있다면 약했다는 것밖에 없다.
힘을 가진 후에도 그녀는 약자로서 죽을 것을 택했다. 가짜 살집으로 두꺼운 낯짝을 재현한 리치 따위가 모욕할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루크는 발목에 힘을 주어 지면을 힘차게 박찼다. 앞으로 기울인 상체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백이 풍겼다.
“그 모양 그 꼴이 되고도 현명하다고 자처하는 걸 보고 있자니 역겹군.”
급격히 거리를 좁히는 루크를 상대로 카라스코는 거침없이 마법을 시전했다.
“커즌 레이지.”
커즌 레이지가 발동하면서 루크의 몸 주변에 검은 구체 10개가 생성되었다.
잠시 후 구체 검은색의 쇠사슬이 뻗어 나왔고, 10개에 달하는 쇠사슬이 사방팔방에서 루크를 옮아 매려 했다.
커즌 레이지로 소환된 쇠사슬에는 각기 다른 저주가 걸려 있다. 하나라도 몸에 얽히면 쇠사슬이 품고 있는 저주가 옮는다.
엉킨 실을 풀 때 억지로 힘을 주어 풀려고 하면 더욱 강하게 얽히는 것처럼 커즌 레이지의 쇠사슬도 억지로 튕겨 내려고 하면 쇠사슬끼리 얼기설기 얽혀서 더욱 큰 구속력을 지닌다.
그러니 완벽하게 피하려면 섬세한 대응이 필요하다.
루크는 촘촘하게 자신을 에워싸는 쇠사슬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곤 해왕검을 짧게 짧게 여러 번 휘둘러 요소요소에 타격을 가했다.
챙! 채앵! 채앵!
검날과 쇠사슬 사이에서 경쾌한 마찰음이 일며 얽혀 있는 쇠사슬이 크게 요동쳤다. 교묘하게 힘을 가하자 쇠사슬끼리 서로 부딪치며 얽힌 부분이 풀렸다.
덕분에 쇠사슬이 벌어지면서 공간이 뚫렸고, 루크는 열린 공간에 몸을 날려 간단히 쇠사슬 사이에서 몸을 빼내었다.
그러나 첩첩산중이라고, 쇠사슬 바깥에선 마기 블레이드가 루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안쓰럽구나.”
마기 블레이드가 루크의 백금 갑옷에 부딪히며 콩 튀기는 듯한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투콰콰콰!
“큭!”
루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백금 갑옷의 틈새가 드러나지 않도록 각을 좁혔다. 갑옷은 말할 것도 없고 갑옷에 세트로 딸린 투구와 건틀릿에도 마기 블레이드가 수차례 부딪치며 충격을 자아냈다.
충격의 여파로 인해 루크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요란하게 밀려난 것에 비해 루크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멀쩡히 서 있었다.
여전히 두 다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서 있는 루크의 모습에 카라스코가 의문을 금치 못했다.
“이상하군. 지금 건 분명히 치명상으로 이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공격이었건만.”
아까 크라잉 스톰에 피해를 입지 않은 것까진 그래도 이해가 간다.
백금 갑옷에는 ‘속성 공격 면역’이란 효과가 부여되어 있으니까.
바람 속성을 띠고 있는 크라잉 스톰에 피해를 입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마기 블레이드 공격은 명백한 ‘무속성’ 공격이다.
카라스코의 마나유저로서의 경지는 마나마스터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카라스코가 말하는 마나 블레이드의 위력을 감안하면 백금 갑옷을 찢어발기고 루크의 뼈와 살을 쪼개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진 것이다.
루크는 균형을 바로잡으며 재차 카라스코에게 달려들었다.
“안쓰러운 건 네 머리겠지.”
방금 전과 동일한 상황이었다.
루크가 거리를 좁히려 하고, 여전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대놓고 강행돌파 의지를 표하고 있었다.
카라스코도 똑같이 마기 블레이드를 휘둘러 루크를 공격했다.
투콰콰콰콰!
마기를 아낌없이 투자한 마기 블레이드가 백금 갑옷의 표면을 두들기며 검흔을 만들어 냈다.
이후에도 수차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상황이 반복되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카라스코의 의문도 점점 증폭되어 갔다.
‘이놈은 무의미한 돌진을 반복할 작자가 아냐. 무슨 꿍꿍이지? 분명 뭔가 노리는 게 있어. 그게 뭔지가 관건인데…….’
다시 한번 루크가 돌격을 강행하려던 찰나, 그간 누적된 데미지가 한꺼번에 몰려왔는지 백금 갑옷에 남아 있던 검흔 크게 벌어지며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쩌저적!
갑옷 내부를 본 순간, 카라스코는 루크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백금 갑옷 내부에 다른 갑옷을 안감마냥 덧대어 입어 둔 것이 아닌가!
안쪽 갑옷은 돌을 깎아 만든 석갑이었다.
신기에 속해 있는 백금 갑옷도 갈가리 찢겨 나갔는데, 일개 돌 쪼가리가 멀쩡해?
근데 석갑의 재질이 왠지 모르게 눈에 익다.
카라스코는 석갑의 소재로 쓰인 돌의 정체를 깨닫곤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어스의 껍질!”
어스의 껍질을 떼어다가 깎아 내어 백금 갑옷 안쪽에 덧대 두었을 줄이야!
이번 전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 카라스코였다.
동요는 곧 반응 속도의 저하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빈틈으로 이어졌다.
넝마가 되었어도 신기는 신기. 백금 갑옷의 신체 능력 상승 효과는 여전히 유효했다.
루크의 신형이 쏜살과도 같이 신속하게 움직이며 단숨에 카라스코의 지척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누적된 데미지가 한꺼번에 방출되면 어떻게 될까?”
루크는 카라스코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와락 붙잡으며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건 네 아둔한 몸뚱이로 직접 확인하도록.”
루크에게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 카라스코는 심히 당황했는지 위장 마법마저도 해제되어 버렸다.
위장 마법을 통해 생성되었던 가짜 살집이 소멸하며 카라스코 본연의 리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났다.
“미친놈! 동반 자살을 할 셈이더냐!”
어스의 껍질에 누적된 데미지를 방출하면 루크도 무사하지 않을 터.
심상치 않은 충격파가 발생할 예정인 가운데, 루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안 죽어. 기다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스의 껍질에 누적되어 있던 데미지가 한꺼번에 방출되었다.
노도와 같은 충격이 루크와 카라스코를 강타했다.
충격의 여파는 두 사람을 덮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천공 콜로세움 내부를 크게 뒤흔들었다.
쿠구구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