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화 절망의 선택지 (3)
충격파가 발생하며 루크와 카라스코 양측을 모두 덮쳤다.
뼈만 남은 카라스코의 몸이 충격파를 버텨 낼 리 만무했다.
카라스코의 몸을 이루고 있는 뼈가 망치로 후려친 양 산산조각 나며 가루가 되었다. 다만 두개골만큼은 두꺼운 균열이 몇 군데 가는 것에 그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두개골만 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크는 살고 카라스코는 죽을 정도로만 충격파가 발산되도록 조절했기에 상대적으로 단단한 두개골만 간신히 남게 된 것이었다.
초근접 거리에서 충격파에 노출된 만큼 루크 또한 몸이 성치는 않았다.
“쿨럭!”
루크는 입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이렇게 피를 흘려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원체 오랜만에 부상을 입은지라 분명 피해를 입은 것임에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픈데도 신선함을 느끼고 있자니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는지 새삼 실감되었다.
간신배들에게 등 뒤를 찔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꽤 오랜 기간 분에 넘치는 삶을 누려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분에 넘치는 건 아니지. 역대급 재능을 지닌 육체를 가지고도 근 10년 동안 자신을 버리다시피 미치도록 달려왔다.
재능과 시간을 갈아 넣어 오른 자리인 만큼 분에 넘친다는 표현은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에 불과하다.
더불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쌓아 둔 것이 많은 만큼 분명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태평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루크는 가져온 발광 이끼의 추출물을 포션 삼아 마셨다. 그러곤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 숨을 고르며 내상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점점 통증이 가라앉은 가운데 바닥에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는 카라스코의 두개골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정돈 들어 주지.”
카라스코의 마지막 자존심마저도 뭉개 버리며 바닥에 떨어진 빙백검을 쥐는 루크였다.
이로써 빙백검의 소유권이 루크에게로 넘어왔다.
이젠 루크만 마나를 쓸 수 있고 카라스코는 마기가 동결되었다. 언데드의 특성을 살려 육체를 재구성하는데에도 마기가 필요한데, 마기가 동결되었으니 육체 재생은 불가능해진 셈이었다.
거기다 항상 카라스코의 보험으로 남아 있던 하늘 고양이의 보주조차 엘리나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으니 사실상 재기의 가능성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카라스코의 목적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도 카라스코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조소를 흘렸다.
“크흐흐흐. 우습구나, 우스워.”
“웃는 꼴이 가당치도 않군. 슬슬 현실 부정을 하고 싶나 보지?”
“그게 아니다, 애석한 녀석아. 분명 처음에 말했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네놈의 절망하는 표정만큼은 구경해 주겠다고.”
“그리고 실패했지.”
“과연 그럴까? 네놈이 여기서 성하게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들어올 때는 자유였으나 나갈 때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발언이었다.
기억하기로 천공 콜로세움에 들어올 때 검은색 차단막이 퇴로를 막았었다.
단순히 퇴로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카라스코가 패배한 후에도 루크를 완전히 고립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준비해 둔 함정이었던 것이다.
확인차 들어왔던 통로로 되돌아가 차단막을 살펴보았다. 카라스코의 마기가 완전히 동결되었음에도 차단막은 여전히 유효했다.
카라스코를 죽이면 해제되지 않을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아직 놈에게 좀 더 단서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놈을 죽이는 건 정보를 뽑아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루크는 천공 콜로세움 안으로 들어가서 능청스럽게 카라스코의 속을 떠보았다.
“뚫려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이번 건 너무 뻔한 떠보기였는지 카라스코도 쉬이 넘어오지 않았다.
“큭큭큭, 어디 보자. 아까보다 코가 길어진 것 같은걸? 거짓말을 하면 쓰나. 천장과 바닥에 차단막이 여전히 건재하거늘.”
놈의 말마따나 돔 형태의 천장에도 차단막이, 그리고 전투의 여파로 훤히 드러난 결투장 밑바닥에도 차단막이 둘러져 있었다.
상공으로 빠져나가거나 굴을 파서 빠져나가는 것까지 완벽히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아직 한 가지 확인하지 않은 게 있다.
투영검으로 강제로 뚫고 지나가는 방법이 남아 있다.
루크가 투영검을 소환하자 카라스코가 실성한 자처럼 좋아라했다.
“크하하하! 힘으로 뚫겠다? 그거 좋지. 저 차단막은 안에서만 뚫을 수 있도록 만들어 뒀으니까.”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뒀다는 걸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는군.”
이어서 카라스코의 입에서 차단막의 진짜 용도가 밝혀졌다.
“네놈을 절망시키기는 것 하나만을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지. 차단막은 천공섬의 중추와 이어져 있고, 네놈이 억지로 뚫고 나가면 천공섬의 코어가 폭주하지.”
“코어의 폭주라… 천공섬이 폭발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어쩔 테냐? 네놈이라면 폭발 전에 사정거리 바깥으로 벗어날 수야 있겠지. 대신 헤테룬은 무사하지 못할 거다.”
천공섬의 제어장치를 유지하고 있던 코어는 애저녁에 카라스코에게 장악당했다. 그 과정에서 손을 좀 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번번이 루크에게 물을 먹었던 카라스코이니 자신이 패배할 경우를 대비하여 최후의 장치를 해 둔 것이다.
천공섬의 코어가 폭주하면 헤테룬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헤테룬 절반 정도는 가볍게 소멸할 터.
그 과정에서 헤테룬 시민 수십만 명의 목숨이 증발할 것이 분명했다.
즉, 카라스코는 루크에게 선택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혼자 살기 위해 수십만 명을 희생할 것이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위해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혼자 죽을 것이냐.
전자를 택한다면 루크 스스로 카라스코의 사상을 검증하는 꼴이 된다. ‘인간은 이기적이며 역겹다.’는 게 카라스코의 사상이자 신념이지 않은가.
저 혼자 살기 위해 수십만 명을 희생한 시점에서 결국 카라스코가 옳았다는 게 증명되고 만다.
마지막에 웃는 건 카라스코가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후자를 택할 수도 없다. 이제 막 ‘이때까지 많이 고생했으니 이제 좀 즐기며 살자.’라고 생각하던 참이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던가. 대륙 통일, 그리고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대륙에서 황제의 관을 쓰기 위해 갖은 고생도 마다 않았다.
이제 좀 즐겨보려는데 나 혼자 희생한다? 내가 만든 세상에 내가 없어서야 본말전도잖은가! 그것 또한 용납할 수 없다.
하면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그럼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면 되겠군.”
선택지가 두 개뿐이라 고민이 된다면 세 번째 선택지를 만들면 될 일이다.
절망하는 표정을 기대했던 카라스코는 뜻밖의 발언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네놈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여기서 죽던가, 남들을 희생시키던가 둘 중 하나란 말이다!”
둘 사이에 흐르던 기류는 반전된 지 오래였다.
당황하는 카라스코와 달리 루크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발을 높이 들었다. 카라스코의 두개골 위에 루크의 발이 올라감과 동시에 나직한 한마디가 내려앉았다.
“그거야 네 생각이지.”
루크의 발에 힘이 들어가며 안 그래도 균열이 가 있던 카라스코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와드득!
두개골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면서 카라스코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다.
오래전에 죽은 자가 산 자의 세상에 관여하는 게 아니다.
오래전에 떠나야 했을 자를 보내고 나니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가 제대로 맞물리는 기분이 들었다.
루크는 가루가 되어 소멸하는 카라스코를 뒤로 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안에서만 뚫을 수 있게 되어 있다면, 바깥에서 멋대로 뚫은 탓에 코어가 폭주하는 일은 없겠군.”
그 말인즉슨 결계 안과 밖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구조로 이루어진 결계라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해제하기 어렵다.
그리고 루크의 의사와 무관하게 코어가 폭주하는 일이 없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빌로스인들, 특히 레이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루크를 구조하려 할 것이다.
바깥에서 멋대로 구조 작업을 진행하다가 차단막이 붕괴되어 코어가 폭주하면 구조대는 물론이고 타이밍을 읽지 못한 루크까지 폭발에 휘말려 죽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루크에 한정된 심술이 최악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 준 격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시간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다.
루크는 블링크 마법을 시전하여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식량이 관건이긴 한데…….”
아직 결계를 해제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을 가지기엔 이르다.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아직 가늠조차 안 간다.
어쨌든 아무것도 안 먹고살 순 없으니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릴 것이다.
관중석에 뚫려 있는 통로로 들어가 콜로세움 안쪽을 살펴보았다.
안타깝게도 건축물 안쪽에는 이미 썩어 백골만 남은 용인의 시체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활로는 의외로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지하에 냉동 마법이 걸린 창고가 있었던 것이다.
창고 안에는 육류를 비롯한 각종 음식물이 구비되어 있었다.
루크는 꽁꽁 얼어 있는 육류의 상태를 살폈다.
“품질이 썩 좋진 않군. 고귀한 종족이라고 자부하던 용인이 이딴 고기를 먹었을 린 없고… 경기용 맹수들에게 먹이던 건가.”
지상의 생물체를 잡아다가 싸움을 붙이기 전 일정 기간 사육을 거쳤나 보다.
창고 안에는 육류뿐만 아니라 과일과 채소도 있었다. 수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는 식품이니 따로 식수를 구하지 않아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근데 한 가지 특이한 건 말린 담뱃잎도 구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맹수가 담배를 피웠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투 승자에게 간간이 지급하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잡아 온 생물체 중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공 콜로세움의 진상을 알고 나니 전멸한 용인에 대한 연민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저장되어 있는 물품의 양을 세어 본 결과 넉넉잡아 1년은 버틸 수 있는 양이란 결론이 나왔다.
“1년이라. 처음부터 좀 빡센 식단으로 가면 최대 3, 4년은 버티겠군.”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결계를 뚫을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식량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루크는 몸에 두른 로브를 젖혀 안주머니에서 책자 세 권을 꺼냈다.
『자가 언데드화-마계 생성편-』
『마계 역사와 사상-마계 7기둥의 세상-』
『마기 변환의 서.』
크레인 왕국의 1급 서고에서 가져온 흑마법 서적이었다.
아무래도 빌로스 국왕이 흑마법 서적을 지니고 다닌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 혹시 몰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서적 안에는 흑마법의 기초부터 상위 경지까지 오르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갈래가 다르다곤 하나 같은 분야에 속하는 일반마법을 이미 6서클 경지까지 끌어 올린 몸이다.
흑마법을 익히면 흑마법을 기반으로 만든 결계를 해제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흑마법을 익힐 생각이었으니 수련 시간이 앞당겨진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폐관수련이라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루크는 사과 하나를 손에 들고, 창고 바깥으로 나오며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나마 꼬꼬마들이라도 회수해 놔서 다행이군. 폐관수련 동안 지루하진 않겠어.”
갇힌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사과를 와작 한 입 베어 무는 루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