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198화 아직 하나 남았잖아요? (2)
루크가 없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영원과 같이 느껴지거늘, 그걸 기회랍시고 공갈 소재로 삼아?
레이아에 대한 모욕, 건드려선 안 될 금기를 건드린 것, 빌로스 왕국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가 삼위일체를 이루며 레이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거절하면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다 이 말씀이신가요?”
목소리에 강한 분노의 감정을 담았지만 길버트 왕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많이 양보해 드렸잖습니까? 빌로스 왕국에선 구 신성제국 영토의 분할을 약속했고, 우린 그 약속을 믿고서 수많은 장병을 전장에 파견했습니다. 그런데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시지요.”
“그 문제는 전하께서 복귀하시고 난 후에 해결하기로 했을 텐데요?”
“이런 말씀드리긴 뭐합니다만 천공 콜로세움 안에서 1년이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는군요.”
“당장 그 발언 취소하세요. 전하께선 아직 살아계셔요.”
“그리 믿고 싶으신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슬슬 현실을 마주할 시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린 매우 신사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길버트 왕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륙 북동부 변방 국가의 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 신성제국의 영토뿐만 아니라 빌로스 왕국의 패권까지 노리고 있다.
듣다 못한 빌로스 왕국의 귀족들이 길버트 왕자의 무례를 지적했다.
“길버트 왕자님,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해 두겠습니다. 레이아 양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닙니다.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려 드는 게, 정말로 신사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강제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변방 연합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는 것이지요. 우리 크레인 왕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 제안 또한 그 연장선에 놓인 것이고요. 왜 몰라 주시는지 모르겠군요.”
“돌아가서 이리 전하십시오. 빌로스 왕국은 전하의 약혼자를 정략결혼의 소재로 쓸 생각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기서 정말로 루크 국왕 전하께서 살아 계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
일순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장내가 조용해졌다.
‘진심으로’라고 묻는다면 감히 손을 들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유일하게 손을 든 사람이라곤 레이아가 전부였다.
길버트 왕자는 예상대로라는 양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러던 차에 추가로 한 명 더 손을 든 자가 있었다.
뒤늦게 손을 든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랄드였다.
제랄드의 존재를 자각한 빌로스 귀족들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랄드하면 자타공인 빌로스 최고의 충심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빌로스 귀족들이 루크의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기만 해도 펄펄 날뛰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길버트 왕자가 뚫린 입이랍시고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줄곧 잠자코 있던 제랄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길버트 왕자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제랄드의 표정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으며 제랄드의 말투는 불쌍한 사람을 대하듯 경시하는 느낌이 강했다.
평소의 제랄드라면 결코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기에 빌로스의 귀족들 모두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에 제랄드의 평소 모습을 모르는 길버트 왕자는 단순히 시비 거는 거겠거니 정도로 받아들였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도록 하죠.”
“돌아가서 변방 연합을 해체하라고 전달하십시오.”
“기어코 전쟁을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길 재앙을 자초하지 말라고 하시는군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제랄드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의 어순이 엉망진창이었다. ‘말씀하시길’이라고 칭했는데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
전쟁이 아니라 진입이다.
이 말을 누가 했다는 건가?
이 자리에 그런 말을 한 자는 한 명도 없거늘.
귀족들의 표정에는 자꾸만 의문이 깊어져 가는데, 오로지 길버트 왕자만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기세등등하게 굴었다.
“쯧쯧, 아직도 루크 국왕 전하의 후광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레이아 양,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국가 간의 관계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레이아 양께 굉장히 잘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 나아가 대륙의 평안을 위해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길 바라지요.”
제 딴엔 멋들어지게 말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얼굴 가득 우쭐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길버트 왕자의 표정을 굳게 만들 말이 날아들었다.
“주인이 안 보인다고 옆집 살림살이를 탐하지 마라.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소중한 격언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제랄드의 뒤에 서 있던 풀 플레이트 아머에 마스크 헬름 복장의 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분명 국정회의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랄드가 스텔라의 후임이라며 소개했던 기사였다.
투구를 쓰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긴 했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제랄드가 간곡하게 ‘흉이 있어 그러니 제 얼굴을 봐서라도 넘어가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에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길버트 왕자가 급작스럽게 방문한 터라 일개 기사에게 신경을 쏟을 틈도 없었고 말이다.
모두의 의식 속에서 배제되어 있던 일개 기사, 그가 투구를 벗자 모두가 그리워했던 사내의 얼굴이 드러냈다.
금발에 살짝 그을린 피부, 관록과 친근함이 공존하고 있는 준수한 외모, 그리고 특유의 신랄함이 깃들어 있는 입꼬리까지.
장내에 있던 모든 이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저, 저, 저, 전하!”
대부분이 이젠 거의 포기한 마당이다. 정말로 살아 있었을 줄이야. 루크의 귀환이 놀라우면서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 놀란 점은 제랄드가 깜짝 연출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루크야 원래 사람 놀리는 재주가 비상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깜짝 연출과는 가장 연이 없을 것 같은 제랄드가 루크의 복귀 사실을 숨기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몇몇 이는 하도 놀란 탓에 일어나려다가 의자 다리에 발이 꼬여 넘어지기도 했고, 심장이 약한 사람은 왼쪽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는 등.
복귀하자마자 몇 사람 잡을 뻔한 루크였다.
대회의장 전체가 어항이라도 된 양 사람들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가운데, 루크는 기사들의 대열 사이로 빠져나오며 길버트 왕자에게 접근했다.
“복귀하다가 사절단이 이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됐지. 어떤 헛소리를 할까 기대했는데 상상 이상의 수작질을 보여 주는군.”
길버트 왕자를 비롯한 크레인 왕국의 사절단은 마찬가지로 어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자신들이 재앙을 자초했다는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사도 이런 대참사가 없다. 1년 동안 감감무소식이던 사람이 살아 있었고, 마치 파병 나갔다가 돌아온 것마냥 깜짝 복귀 신고를 계획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요컨대 루크 국왕의 앞에서 빌로스 왕국을 무시한 데다가 그의 약혼자를 꼬드긴 꼴이잖은가!
길버트 왕자는 고양이 앞의 쥐라도 된 것처럼 벌벌 떨었다.
“오, 오해입니다! 저, 저희는 결코 흑심을 가지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다른 변방 국가들을 달래기 위해서… 그래!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크레인 왕국은 전쟁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을 강행한 것입니다!”
하다못해 크레인 왕국만이라도 수렁 속에서 빼내고자 궁색한 변명을 짜내는 길버트 왕자였다.
그러나 변명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하는 법이다.
그 상대가 루크라면?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히기 마련이다.
“어디 보자. 아까 뭐라고 했더라? 안쓰럽니 마니, 잘해 줄 자신이 있니 마니 하지 않았나?”
루크가 다가선 만큼 길버트 왕자가 뒷걸음질 쳤다. 뒷걸음질 치는 과정에서 발이 꼬였는지 길버트 왕자가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른 이의 눈에 비칠 꼴사나움보다 루크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앞서는지, 말을 더듬으며 당장 떠오르는 단어를 모두 동원해 상황 수습에 나섰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저희 크레인 왕국은 대륙이 또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는 걸 바라지 않아서 가장 평화적인 방법을 택한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크레인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변방 국가들은 전쟁을 원하고 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크레인 왕국을 뺀 나머지 왕국들을 멸망시켜 버려야겠군. 돌아가서 호쿠 왕께 전하도록. 전쟁을 꾀하고 있는 불순한 자들을 섬멸할 테니 군대를 준비하라고.”
“네? 저희도 준비하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걸 묻는군. 이럴 때 협조하기 위해서 맺은 동맹일 텐데?”
길버트 왕자의 낯빛이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졌다.
크레인 왕국이 직접 연합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한 바이다.
연합을 주도했던 왕국이, 혼자 연합에서 빠져나와 다른 연합국들을 친다면 어떻게 될까?
배신자 소리와 함께 분노한 변방 국가들의 총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사실을 인정하면 루크의 손에 멸망당하고, 이대로 계속 거짓말을 하자니 성난 변방 국가들의 보복이 기다리고 있다.
그야말로 외통수에 몰린 꼴이다.
“거, 걱정 마십시오. 전하께서 복귀하셨으니 변방 국가들도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생각을 바꿀 테니 용서하라? 내 나라를 넘보던 놈들인데?”
“그, 그럼 어찌해야…….”
“가서 사죄하고 그에 준하는 성의를 보이는 왕국만 용서하겠다고 전하도록. 가장 소홀한 성의를 보이는 왕국은 사죄할 마음이 없는 걸로 알겠어.”
조공 경쟁을 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멸망당하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 꼴찌는 면해야 한다. 서로 조공을 더 하려고 난리를 칠 테니 이보다 더 굴욕이면서도, 빌로스 왕국 좋은 일 시켜 주는 꼴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크레인 왕국 저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변명을 늘어놓다가 그 변명이 제 목을 조른 셈이거늘.
길버트 왕자는 살아남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도망치듯 부랴부랴 사절단과 함께 물러났다.
소동을 일단락시킨 후엔 몸을 돌려 레이아를 바라보았다. 레이아는 루크를 가만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루크는 레이아에게 다가가며 능청스러운 어투를 구사했다.
“그게 말이야, 복귀하고 있는데 크레인 왕국의 사절단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라고. 이건 이용할 수 있겠다 싶어서 판을 짰지.”
“…….”
“오랫동안 일선에서 벗어나 있었으니, 복귀 기념으로 조금은 일을 해 두는 게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
“혹시 화났어?”
“…어요?”
“응?”
“헤테룬에는 언제 왔어요?”
“사흘 전에 왔지.”
화악!
레이아가 따귀라도 한 대 쳐올릴 듯 손을 위로 들었다. 그러나 손이 휘둘러지는 일은 없었다. 대신 손을 올린 채로 레이아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루크를 기다리는 내내 하루가 1년 같았다. 그 1년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레이아는 감정에 북받친 나머지 코맹맹이 목소리로 쌓여 왔던 모든 감정을 토해 냈다.
“제가…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매일매일… 얼마나… 제가 얼마나…….”
루크는 울먹이는 레이아를 포근히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작디작은 체구가 품 안에 쏙 들어오며 가슴팍을 적셨다.
흐느끼는 소리와 가느다란 떨림이 여실히 전해져 오며 가슴 한편을 간질였다.
언젠가 좋아하는 향이라고 말했던 사과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매일매일 루크의 복귀를 기원하며 언제든지 끌어안겨도 좋도록 단장해 두었던 것이다.
아침마다 ‘오늘은 오겠지, 오늘은 오겠지.’ 하며 기대감에 부푼 채로 단장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루크는 레이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나직이 말했다.
“고생했어. 애써 줘서 고마워.”
“훌쩍, 살아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멀리 갈 땐 반드시 따라갈 거예요.”
“이젠 그럴 일도 없어. 이룰 건 다 이뤘으니까.”
“아직 하나 남았잖아요?”
레이아가 소매로 눈가를 슥슥 훑고선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손가락에 끼운 반지가 위로 드러나도록 손을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흠집투성이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루크의 역할을 대신하며 고생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였다.
식을 올리자는 어필에 루크 또한 손을 들어 올려 깍지를 끼듯 레이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더불어 루크의 손에도 흠집투성이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흠집투성이의 두 반지가 맞물렸고,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것처럼 창문을 통해 햇볕이 부드럽게 내리쬐었다.
햇볕이 반지에 닿으면서 금빛 광택이 반짝였다.
두 줄기의 광택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들의 해후를 대변하듯 하나로 겹치며 싱그럽게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