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세르폰은 내가 점심 식사를 끝내고 다시 수련동에 도착할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짐작도 안 간다.
덕분에 참다못한 마리 유모가 분통을 터트렸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리텐슈노프의 이름에 먹칠을 해도 정도가 있는 거지. 어떻게 도련님을 보필하기로 한 사람이 제멋대로 자리를 비울 수가 있는 거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번 일은 제가 어떻게든지 꼭 시종장님께 보고할 거예요. 랭커스터 성까지 받은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하다니, 배은망덕도 유분수라고요!”
마치 자신이 당한 일인 것처럼, 마리는 나를 위해 화를 내주었다. 그녀의 신분이 내 유모인 만큼, 내가 괄시당한 건 충분히 화를 낼 일이었다.
‘이게, 내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지.’
그런 점에서 세르폰은 아직 내 사람이 아니었다.
‘잘 처신해야 해.’
보통 배정된 전속 수호 기사는 그 리텐슈노프의 최측근이 되었다. 대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당장 내 아버지의 전속 수호 기사만 해도 그렇다. 발레르의 우유부단하고 온화한, 리텐슈노프에 걸맞지 않은 성격에 질려서 떠나가지 않았나?
전속 수호 기사는, 결국 리텐슈노프의 아이들을 성년이 될 때까지 호위하도록 배정하는 제도. 그렇기에 리텐슈노프가 성년이 된 순간 호위할 의무는 사라진다.
‘그때까지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 기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라고 봐야지.’
결국, 타인이 붙여준 사람의 한계다. 진정한 충성은 남이 강제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히드라 슬레이어가 나에게 충성을 바칠지 말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처벌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겠지.
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흥분한 채 씩씩거리는 마리를 달래준 뒤, 수련동으로 들어갔다.
세르폰이 자리에 없는 만큼, 남은 시간도 체력 단련과 마나 적응에 쓸 생각이었다.
허나, 인생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야!”
눈에 띄는 교관에게 납 주머니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려는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란체스 형.”
물론 딱히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다.
언제나 볼 때마다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어지는 면상이다. 전생에 내가 이놈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겨우 한 대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근데 얘가 갑자기 왜 찾아왔지?
“혼자서 뭐 하냐? 수호 기사는 얻다 팔아먹고?”
쯧.
한심하기는. 아무래도 또 쓸데없는 시비를 걸러 온 거 같다. 열 살밖에 안 된 주제에 벌써부터 사춘기가 온 건지 틱틱거리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그건 형이 알 거 없고. 그래서 왜 불렀는데?”
안 그래도 세르폰의 처분 때문에 정신 사나운데 시비까지 걸리니, 입에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하! 너, 하늘 같은 형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아침부터 그러더니, 예절은 엿 바꿔 먹었니?”
“그런가 보지.”
“뭐, 뭐라고?”
내가 대충 대꾸하자 녀석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씩씩거리는 놈을 무시한 채, 난 뻘쭘하게 서 있는 교관에게 납 주머니를 가져오라고 다시 명령했다.
“납 주머니, 잔뜩 가져오세요.”
나와 란체스가 말싸움하는 모습에 괜히 불똥이 튈까, 창백해진 채 바들바들 떨던 교관은 내 명령에 화색을 띠며 얼른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당장 가지러…….”
“야, 너.”
“네, 네?”
그 순간, 란체스가 교관을 불렀다. 당황한 교관이 허겁지겁 돌아보자, 란체스가 으르렁거렸다.
“개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라.”
이건 또 뭐 하는 짓거리지?
난 어처구니가 없어 란체스를 돌아보았다.
“……형,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저 새끼 말 듣지 마. 나중에 호된 꼴 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가만히 있어!”
“흡!”
란체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재빨리 란체스의 뒤에 서 있는 수호 기사를 쳐다보았다. 허나 녀석은 눈이 멀기라도 한 모양인지, 열중쉬어 자세로 허공을 바라볼 뿐. 아무리 봐도 이 사태를 중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빌어먹을 놈!’
아무리 수호 기사가 란체스, 저 새끼의 따까리라고 해도 이건 경우가 아니다. 애꿎은 교관한테까지 지랄 난장을 피우는데, 그걸 무시해?
결국, 나도 유치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관님, 저 인간이 하는 말은 듣지 말고 얼른 다녀오세요.”
“야! 움직이지 말라고!”
“다녀오시라니까요?”
“움직이기만 해봐, 아주 작살을 내버릴 거야!”
교관은 나와 란체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누구 명령을 들어도 후에 보복이 찾아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목이라도 졸린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한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젠장. 왠지 전생의 날 보는 거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짜증나 죽겠네. 지랄 좀 그만하지?”
그제야 란체스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녀석이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뭐, 지랄? 그래, 이 새끼. 잘 걸렸다. 이번 기회에 형을 개뼈다귀 취급하는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하,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나? 란체스, 이놈은 나한테 싸움을 걸러 온 거였군.
아침부터 신경도 거슬리겠다, 오늘 처음 수련동에 들어온 이상 실력도 자신보다 아래가 분명하겠다.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덤빌 수 있는 것이리라.
좋다. 내가 자기보다 약할 거라는 착각도 깨줄 겸, 나도 세르폰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겠다.
“그런 말 하면 안 쪽팔리냐? 형, 랑느한테도 그 소리 하면서 시비 걸 수 있어?”
“뭐, 뭐 이 새끼야?”
놈의 얼굴이 이제는 잘 익은 토마토가 되었다. 얼마나 화가 치솟았는지, 반박도 똑바로 못 하는 란체스를 보며 난 코웃음을 쳤다.
“쪽팔린 줄 알아. 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란체스의 발 밑에 집어 던졌다. 란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내가 먼저 결투를 신청할 줄은 몰랐나 보다.
“……너!”
“뭐, 싸우자고 덤빈 거 아냐? 갑자기 무서워지기라도 했어?”
“이 씨발 새끼가!”
내 폭언이 방아쇠를 당긴 듯, 란체스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꽉 움켜쥔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위협적으로 쏘아졌다. 생각보다 녀석의 움직임이 빨랐다.
‘멍청한 새끼, 이런 개싸움에 마나까지 써?’
황급히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했다. 곧바로 반대쪽 손이 내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무리 얼간이라 해도 녀석 또한 리텐슈노프, 열 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실력이다.
물론.
‘그래봤자 결국 애새끼지.’
가볍게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놈의 두 번째 공격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란체스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처음 주먹을 피할 때 이미 몸에 마나를 풀어놓았기에 내 발차기에는 가공할 수준의 힘이 실려 있었다.
“악!”
오, 비명이 경쾌하다. 금이라도 갔으려나?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다리를 얻어맞은 탓에 중심이 흔들리는 란체스. 역시 통증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곧바로 달려들어 옷깃을 붙잡았다.
“흐랴압!”
그대로 몸을 틀어 녀석을 바닥에 메쳤다. 쿵 소리와 함께 녀석이 컥, 하고 숨을 토해냈다. 등짝부터 제대로 떨어진 탓에 아마 숨쉬기 힘들 거다. 곧장, 마운트 자세로 놈의 몸 위에 올라탔다. 녀석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눈치챈 모양.
‘그럼 맞아야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란체스의 얼굴에 내 주먹이 일곱 번이나 내리꽂혔다. 이 정도나 얼굴을 맞으면, 더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없다.
퍽! 퍽! 퍽!
“커, 커헉……!”
“도, 도련님!”
내가 쓰러진 란체스에게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르자, 그제야 녀석의 수호 기사가 허겁지겁 내 몸을 붙들었다. 녀석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떼어놓으려는 모양인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난 곧장 고개를 틀어 수호 기사 놈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합니까?”
“드, 드레커 도련님. 이미 승패는 결정 났습니다. 이 이상은 그저 분풀이에 불과하십니다!”
“그 승패를 왜 당신이 결정하지? 당신 이름 뒤에 리텐슈노프라도 붙어? 미친 건가? 그리고.”
난 힐끔 란체스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피떡이 되어 겨우 숨만 내쉬며 신음하고 있지만, 란체스는 아직 멀쩡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란체스 형님께선 아직 정신이 멀쩡하신데, 수호 기사 따위가 어디서 지셨다고 판단을 내려?”
“그, 그건…….”
“당장 물러나지?”
“……!”
내가 죽일 듯이 노려보자, 수호 기사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힘으로 더는 내가 날뛰는 걸 말릴 방법이 없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다.
그러게, 아까 잘 처신했으면 이딴 꼴 안 났잖아?
‘한심하긴.’
난 혀를 차며 다시금 란체스를 돌아보았다.
“형님?”
내 시선에 녀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공포에 질린 채 벌벌 떠는 모습이 참 만족스럽다. 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란체스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항복 안 하면 계속 때립니다?”
“하, 하으아…… 컥!”
란체스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난 다시금 주먹을 내리꽂았다.
“커…… 헉.”
녀석은 한 마디도 못 꺼낸 채 신음을 토했다. 그제서야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눈치챈 모양이다.
란체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에이, 항복하시라니깐.”
항복은 무슨, 입도 못 열게 해 주마.
퍼버벅!
* * * * *
결국, 란체스는 기절할 때까지 얻어맞았다. 패배를 시인하기 위해 입을 열 때마다 내가 주먹을 날렸으니, 제 딴에 별 수가 있나? 계속 맞아야지.
완전히 피범벅이 될 때까지 쳐맞고 치료실로 옮겨졌으니, 오랜 시간 치료에 전념해야 할 거다.
한동안 녀석이 시비를 걸 일은 없겠지.
‘앞으로 감히 나한테 시비를 걸 엄두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오늘 호되게 당했으니, 다음부터는 나랑 눈만 마주쳐도 오줌을 지릴지도 모른다. 물론 녀석이 요실금에 걸리는 건 결국 자업자득이지만.
“결국, 수련은 못 했네.”
마나 적응 훈련을 하려던 계획은 결국 포기했다.
수련동에서 거하게 난리를 친 바람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마나를 쓴다는 걸 남들이 눈치채지 못한다고 해도, 그런 관심 속에서 담담하게 훈련을 할 자신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유아동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문제는 내가 란체스를 개처럼 두들겨 팼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유아동에 퍼졌다는 거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소문이 퍼진 거람. 이 속도라면 아마도 오늘 저녁쯤이면 가주의 귀에도 이 사건이 들어갈 것 같았다.
세르폰이 보고했을 걸 생각하면, 마그너스 리텐슈노프는 분명히 날 부르겠지.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드레커 도련님.”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보니, 검붉은 제복을 차려입은 두 명의 중년 기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주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모셔드리겠습니다.”
분명 나긋나긋한 어조임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치 사람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두 기사의 오른쪽 가슴팍에 달린 순은 독수리 휘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순간적으로 호흡이 거칠어졌으니까. 분명 이들이 나에게 해코지를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난 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다.
리텐슈노프 가에서 가문의 규율을 어긴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창단한 은독수리 기사단.
하나, 진실은 다르다.
리텐슈노프의 천하를 위해 음지에서 암약하는 자들.
암살이 주 임무이고, 고문에는 도가 튼 인간 도살자.
리텐슈노프의 사냥개들.
‘징벌기사단.’
전생에 내 목을 자른 놈들이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