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집무실에 다녀온 뒤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 일상은, 그 이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오전 7시에 유아동에서 하루를 시작해,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수련동으로 향한다.
납 주머니를 가득 달고 연무장을 서른 바퀴 뛰어서 몸을 데운 뒤, 따로 마련된 개인 훈련실로 이동한다.
‘개인 훈련실이라니.’
이 훈련실에 들어올 때마다, 매번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15살 이전까지는 아무리 리텐슈노프의 아이라고 해도 개인 훈련실을 가질 수 없다는 게 가문의 규칙인데, 그걸 내가 최초로 깨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최초는 아니다.
‘마그너스도 아직 유아동에 있을 무렵에 개인 훈련실을 받았다고 했었지.’
이 훈련실로 날 안내한 교관이 알려준 사실이었다. 검제 마그너스 또한, 어린 시절 가문의 규칙을 재능과 실력만으로 전부 깨트리고 다녔다고 말이다.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자부심을 가진 채 일장 연설을 하는 교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달라진 건, 하나 더 있었다.
“도련님, 여기 수건이에요. 땀이라도 닦으세요.”
“고마워, 마리 유모.”
훈련실에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수건을 건네주는 마리 유모의 모습이 그것이었다.
마그너스는, 무려 내 보좌를 위해 마리 유모까지 수련동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 주었다!
‘아무래도, 그날 꽤 점수를 딴 모양인데…….’
개인 훈련실과는 다르게 이 특혜를 얻은 건 리텐슈노프 가에서 내가 최초였다. 덕분에 식탁에서 날 노려보는 반체스의 시선이 더더욱 고까워졌다.
란체스는 뭘 하고 있냐고?
걔는 아직도 치료실에 처박혀 있다.
내 주먹에 코뼈가 완전히 박살이 난 탓에, 치료가 끝나도 들창코가 될 거라는 소문은 덤이다.
하긴, 들창코가 문제인가?
내가 마그너스와 나눈 대화 내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에, 꾀병을 부리던 란체스는 무려 검제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쓰레기통에 처박은 놈이 되었다.
‘자업자득이지 뭐.’
수건으로 몸에 흥건한 땀을 닦아낸 뒤, 나는 훈련실 벽에 놓인 수련검을 집어들고 자세를 잡았다.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처럼 수련검을 집어든 세르폰의 얼굴이 보였다. 지난 일주일 간 꽤 많이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세르폰의 얼굴 곳곳에는 생채기와 멍자국이 남아 있었다.
거의 다 징벌기사들에게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왜 전부가 아닌가?
그야, 한쪽 눈에 남은 멍 자국은 내가 낸 거니까.
그날,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유아동에 도착하자마자 난 세르폰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한 뒤, 얼굴에 주먹을 한 방 날려주었다.
내가 설마 때릴 거라고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는지, 얻어맞고 얼빠진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세르폰에게 난 확실히 선을 그었다.
‘세르폰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번 일은 손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짓이라는 건 아시죠?’
‘도, 도련님…….’
‘그러나 한 번은 참겠습니다.’
‘…….’
‘잘 기억하세요. 전 용서한 게 아닙니다. 참은 겁니다. 다음에 만약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신다면, 그때 잘리는 건 손목이 아니라 목일 겁니다.’
이번 일을 용서한 게 아닌, 그저 집행을 유예한 것 뿐이라고 말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손이 날아갔으리란 건 세르폰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난 세르폰의 충심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지만, 겨우 그걸로 사람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
‘최소한 다른 리텐슈노프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야지.’
믿고 따를 사람이라는 증거. 그 정도라면, 세르폰도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까?
최소한 썩은 동아줄이라는 생각은 안 하겠지.
“드레커 도련님. 그럼 시작하시죠.”
세르폰의 목소리에, 난 상념에서 벗어났다. 앞을 바라보자 세르폰이 슬쩍 마리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마리는 묘한 표정으로 세르폰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곤 한 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세르폰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촌극은 모두 여전히 마리가 세르폰을 불만스러워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마리 입장에서는 의무를 저버린 세르폰이 여전히 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시 내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세르폰도 내 사람이 된 거야.’
‘으음, 도련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할 말이 없지만…….’
‘이전의 행적 때문에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난 유모가 세르폰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어쨌든 저 사람도 도련님께서 선택하신 기사님이니까요.’
그나마 내가 사전에 따로 말을 해둔 덕분에, 마리 유모가 직접적으로 불편한 티를 내는 일은 없었다.
허나,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있잖은가? 덕분에 세르폰은 그 이후 계속 마리 유모를 어려워했다.
물론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오랫동안 얼굴 보면 미운 정이라도 들 거 아냐? 그러면 감정 상한 거도 무뎌지겠지 뭐.’
결국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니까.
그런 시답잖은 사건보다 당장 내게 시급한 건, 블러드하운드 27식을 익히는 것이었다.
블러드하운드 27식이 없어도 충분히 란체스 따위는 쉽게 쓰러트릴 수 있지만, 마그너스가 란체스와의 재결투를 명한 건 한 달 동안 내가 이룬 성취를 보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문제는, 이놈의 검술인데…….’
검로와 보법, 자세까지. 책에 나와있는 내용을 분명히 전부 다 외웠다. 하나, 내 기억 속 징벌 기사들이 펼치는 블러드하운드 27식과 내가 펼친 검술은 분명히 달랐다.
‘힘이나 마나의 차이는 아닌 거 같은데.’
미묘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달랐다. 검식을 펼칠 때마다, 그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전생이었다면 느끼지 못했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재능은 전생의 재능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격차 덕분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 하고 있다는 사실을, 블러드하운드 27식은 이렇게 펼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체격의 차이 때문은 아냐. 신체 조건이 차이나도 같은 검술인 만큼 비슷한 모습이 나와야 하니까. 젠장, 조금만 더 해보면 알 것 같기도 한데…….’
쩝.
하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일단 책에 나온 대로 따라하며, 대련에서 부딪쳐 깨달음을 얻는 수밖에.
난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블러드하운드 27식의 준비 자세는 좌하단에 검을 뒤집어 두는 자세로 시작한다. 언뜻 보면 몸 윗쪽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것처럼 보이지만, 쾌검을 추구하는 블러드하운드 27식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다.
27개의 검식 전부가 살인검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다른 검술에서 흔히 하나쯤은 있는 묵직한 기세가 없다. 대신 검격 하나, 하나가 날카롭다.
‘빠르게, 그리고 가볍게.’
검술서의 첫 장에 쓰인 머리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반대편에 선 세르폰에게 전신의 감각을 집중했다.
블러드하운드 27식의 묘리를 깨우치기 위해 필요한 건 실전.
검술서에서도 실전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살인검을 제대로 익히려면 실전을 치르는 게 중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로 사람을 베고 다닐 수는 없으니, 실전에 한없이 가까운 대련에 만족해야 했지만.
“하앗!”
나는 땅을 박차며 세르폰의 왼쪽 어깨를 향해 검을 찔렀다. 물론 가볍게 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세르폰 내 공격을 걷어냈다.
완벽한 방어였다.
하나 검을 쳐낸 세르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도련님, 오늘도 왼쪽입니까?”
“그야, 약점이 뻔히 보이는데 놓칠 수는 없죠.”
세르폰은 나와 대련을 할 때 언제나 오른손만을 썼다. 체격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난 당연히 그의 몸 왼쪽, 검의 사각을 노렸다.
세르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이 대련에서만 생기는 약점이라지만…….’
어떤 검사도 제 약점이 노려지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지난 2주 내내 약점인 왼쪽만을 노렸으니, 세르폰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고 뭐 방법이 있나?
‘5성 기사랑 제대로 된 실전을 치르려면 이 수밖에 없잖아?’
아무리 내가 실전 같은 대련을 요구해도 소용 없다.
어차피 손속에 사정을 둘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일부러 자극했다.
“……!”
이런다고 세르폰이 본 실력을 드러낼 리는 없지만, 지금처럼 최소한 기세 정도는 끌어올릴 수 있도록!
순식간에 훈련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세르폰이 자세를 바꾸자 온몸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졌다.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달려든 세르폰이 검을 내려그었다.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검격!
“크윽!”
난 가까스로 검을 눕혀 벼락을 흘려냈다.
곧바로 2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흘릴 수 없는 각도.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 보인 장면에 난 눈을 의심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친 칼 끝에 서린 붉은 오러.
로타 블리츠 10식.
후일, 세르폰이 용의 목을 벨 때 사용한 검술.
속칭 붉은 벼락이라고 불리는 비전 검술이었다.
‘장난 아닌데, 이거.’
난 떨리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분명 완벽하게 검격을 흘려냈음에도 손바닥이 아려왔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것은, 로타 블리츠 검술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로타 블리츠는 마나를 담는 순간 검에 붉은 오러가 서리며, 검격 한 번 한 번에 벼락의 힘이 담긴다.
물론 세르폰이 진심을 드러낸 건 아니다. 아직, 고작 검 끝에만 붉은 오러가 서린 걸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나에게는 위협적이다.
“……!”
문득,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전신의 솜털이 오소소 돋고, 사지의 근육이 전부 팽팽하게 당겨졌다.
두려움 때문에?
‘아니, 아니야.’
그런 시답잖은 감정이 아니다.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상대와, 진정으로 검을 겨루어 볼 수 있다는, 더욱 더 높은 경지를 마주하고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이건 호승심이다.
“푸흐흐!”
절로 실소가 터져나왔다.
‘호승심이라니…….’
이전 삶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잊은 마음이 아닌가?
그 시절의 나는, 충성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을 생각했다. 힘을 기르는 건 그를 위한 부차적인 작업에 불과했다. 당연하지만 그 과정에서 즐거움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래, 그래야지.”
그렇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난 다시금 검을 바로잡았다.
동시에 세르폰이 다시금 움직였다. 붉은 검이 휘둘러졌다. 가까스로 몸을 젖혀 피하며, 왼쪽 허리를 향해 검끝을 찔러넣었다. 아쉽게도 빗나갔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오직 세르폰의 몸과 그가 휘두르는 검만을 눈에 담았다. 다른 사물은 잊는다.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나 둘 씩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리 유모도, 훈련실의 잡다한 기물도, 외벽도, 흙바닥도.
그 순간에는.
오직 검.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