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음…….”
물론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마그너스에겐, 내가 콜마운트 영지를 고른 것은 실망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콜마운트를 고른 건, 어찌 보면 내 운이 나쁘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차후 유적의 존재를 마그너스에게 공개하면, 이 평가는 역전될 수 있다.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누구도 존재를 모르던 유적을, 운 좋게 발견한 셈이니까.
내게 어마어마한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 비밀은 숨길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경계를 살 테니까.’
내 경쟁자들.
내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마그너스의 네 아들들에게 관심을 끌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부터 경계심을 사면 안되지.’
아직 내가 가진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당장 다섯 형제 중 가장 세력이 약한 갈라할도 나 정도는 손톱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힘을 키워야 하는 시기였다.
내가 마음속에 품은 야망을 드러내고, 리텐슈노프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 참전을 선언해도 그들이 날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내가 20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날 주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콜마운트 영지는 그를 위한 포석 중 하나였다.
영지를 하사받는 것은 가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허나, 콜마운트 영지 정도면 그저 할아버지가 귀여움을 독차지한 어린 손자에게 선물로 주기에는 딱 적당할 수준의 보상이다.
내 큰아버지들의 경계를 사기에는 아직 약하다.
“그래, 알겠다.”
곧 마그너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영지…… 콜마운트 영지를 드레커에게 하사할 테니, 그렇게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주군.”
마그너스의 명령에 아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자르가 서류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난 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성공이다!’
이것으로 나는 4성 기사를 순식간에 고위 기사로 서임받게 만들어 준 보물이 숨겨진 유적을, 손에 넣었다. 이것으로 오늘 밤은 전생의 악몽 대신 꿀잠을 잘 수 있겠지.
“자, 이제부터 너는 한 영지의 주인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물을 받으면 고개를 숙이는 게, 조금이라도 여덟 살에 걸맞은 행동이 아닐까?
“하지만 너무 안심하지는 말아라.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내가 그 영지를 다시 빼앗아 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난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럼 어떻게 행동해야지 계속 제가 영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나요?”
“네가 영지의 주인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겠지.”
영지의 주인에 걸맞은 사람이라?
아리송한 이야기다.
뭐랄까,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해야 하나? 머릿속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이것도 내가 전생에 주인이 아닌 개로밖에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드레커야, 아까 할아버지랑 나누었던 개 이야기 기억하느냐?”
“네, 기억해요. 개가 배를 곯게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배가 부를 만큼 밥을 먹여도 안 된다.”
“옳지, 잘 기억하고 있구나.”
마그너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지도 개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단다.”
개?
영지민도 배를 곯게 하면 안된다는 소리인가?
“개에게 목줄을 묶어둔 걸 본 적 있느냐?”
“네.”
“영지도 그것처럼 줄로 묶어야 한단다. 그러면 줄만 쥐고 있어도 영지가 네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줄을 너무 꽉 잡아도, 너무 헐겁게 잡아도 안 된다. 숨이 막혀 죽거나, 네 손에서 도망쳐 버릴 테니까 말이다.”
여덟 살 아이가 듣기엔 참으로 알쏭달쏭한 이야기였다. 하나, 서른여덟 살의 기억을 가진 내겐 무릎을 탁 칠 만한 지혜였다.
영지의 소출 증대나, 세금 수입, 행정 업무 등등. 주인 된 자가 유념해야 하는 건 그런 자잘한 게 아니다.
그건 모두 영지 관리인이 해야 할 일들 아닌가?
주인은 영지 관리인의 목덜미를 꽉 붙들어 쥔 채, 그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만 감시하면 된다. 마그너스는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기억해 둘게요, 할아버지.”
“그래, 굳이 당장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네가 이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에 떠올릴 수 있을 거다.”
“네, 할아버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전부 다 이해했다고 해도, 지금은 모르는 척 해야 한다. 그래도 나이를 좀 먹으면 지금과 같은 답답한 일이 없어진다는 게 작은 위안이다.
내가 긴 이야기에도 지루해 하지 않고 열심히 듣는 게 기특했는지, 마그너스는 내 등을 토닥였다.
“아, 그리고 유아동 관리인에게 말해둘 터이니, 적당한 영약이 필요하면 요청하거라. 혹시 또 혈맥법을 시도할 셈이라면, 영약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
“좋다. 그럼 이제 가 보거라.”
“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원탁에서 일어나 마그너스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무려 선물로 영지를 던져 주신 할아버지이시다, 겨우 이 정도 수고를 못해 드릴까?
* * * * *
드레커가 그대로 중앙 홀을 빠져나간 뒤에도, 마그너스는 한참 동안 원탁에 앉아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그너스가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아자르가 아까 명령 받은 일처리를 끝마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왔나?”
“네, 주군.”
“처리는?”
“전부 끝났습니다. 혹시나 몰라 드레커 도련님이 부리기에 적당한 충성심 깊은 관리인도 하나 찾아 두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고…….”
마그너스는 하나 남은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앉아, 오랜만에 식사나 같이 하자고.”
마그너스가 원탁 위의 종을 울렸다.
곧 대여섯 명의 주방장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와, 다 먹은 접시들을 치우고 새 요리를 올려두었다.
아자르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하지만 그는 식기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하하, 주군과 겸상하기에는 아직 담이 약합니다.”
“그렇게 설렁설렁 넘어가기엔, 요즘 자네가 바빠서 밥도 잘 못 먹는다고 소문이 자자해.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자네인데, 제대로 못 먹어 비실비실하면 내가 밖에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나?”
“……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주군.”
아자르는 그제서야 조심스레 식기를 손에 쥐었다.
“자네는 너무 격식을 차려. 자네와 얼굴을 본 세월이 얼마인데, 예법 따지기엔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마그너스가 장난스레 타박했다.
허나 아자르는 여전히 마음속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팽팽하게 당겨 둔 상태였다. 리텐슈노프 가문의 가주를 눈앞에 두고 긴장을 풀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말이다.
“음, 그래도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을까요?”
“그 전에 내 장례 먼저 치르겠네, 이 사람아.”
“하하.”
그 후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갔다.
곧, 두 사람은 동시에 식기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서로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무렵, 마그너스의 시선이 중앙 홀의 입구를 향했다.
“아자르야.”
“네, 주군.”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는 질문.
하지만 아자르는 곧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
“드레커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자르는 잠시 동안 속으로 평가를 내렸다.
가진 재능은 뛰어나다. 여덟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총명하고, 힘에 대한 욕심도 강하다.
이대로만 자라면 리텐슈노프를 받드는 기둥 중 하나가 되기에는 충분한 아이다.
‘허나…….’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아자르는,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보류하겠습니다.”
“보류?”
“아무리 단단하다고 소문난 철이라도, 검으로 만들 때는 망치질 한 번에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주군.”
“발레르? 하긴, 그 녀석도 재능은 쓸만했었지…….”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마그너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쓸었다.
발레르 리텐슈노프. 자신의 막내 아들.
가지고 태어난 재능만으로 따지면, 자신의 여섯 아들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던가?
허나 그 재능을 이제 막 꽃피우던 시기에 발레르는 모든 걸 내던지고 은거해 버렸다. 그 사유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의 드레커 또한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좋습니다. 하지만 발레르 님도 저 나이 즈음에 다음 후계자 감이라고 추켜세워지지 않았습니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는 아자르는 냉정하게 신중론을 펼쳤다. 아자르의 대답은 가주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만큼 아자르가 마그너스의 신뢰를 받고 있기에 올릴 수 있는 충언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지켜보시지요. 스무 살쯤 나이를 먹으면, 그 철이 검이 되었는지 아닌지, 얼마나 좋은 검이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무 살이라…….”
마그너스는 침음성을 삼켰다.
드레커가 스무 살이 되는 건 앞으로 12년 후다.
과연 자신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까? 저 강철이, 날카로운 검으로 다시 태어나는 걸 볼 수 있을까?
마그너스의 내심을 눈치챈 아자르가 가볍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께서 계속 건강을 챙기시면 충분히 확인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그너스는 그제서야 굳어 있던 얼굴을 피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지금 나보고 연초 끊으라고 구박하는 건가?”
아자르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감히, 어찌 그러겠습니까. 주군.”
“그게 구박하는 거지, 그럼 뭔가? 그러는 자네나 술 끊어! 자네가 아무리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한들, 어차피 몸 망가지는 건 매한가지 아냐?”
“……명심하겠습니다.”
마그너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아자르에게서 시선을 때고, 다시금 중앙 홀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손자들 중 가장 어린 막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계도 깊고, 가진 재능도 출중하다. 지금까지 드레커가 보여준 결과물로만 평가해도 손자들 중 수위를 다툰다.
하지만, 그 애비는 검으로서 실패했다.
그 피를 물려받은 아이 또한 검이 될 수 없는 잡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직 한계가 찾아오지 않았을 뿐, 담금질 몇 번에 부스러질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지켜볼 가치가 있었다.
* * * * *
마그너스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3일이 지났다. 내 여덟 번째 생일로부터는, 정확하게 한 달 째.
나는 다시금 마나 하트 구축에 도전했다.
사실, 이미 내 심장에는 한 개의 마나 하트가 구축되어 있었다. 데우스와 연결된 용의 심장 말이다.
“마나 하트를 하나 더 만들 수 있다고요?”
[그래. 전에도 말했지만 용의 심장은 마나 하트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니 지금 너는 심장을 강화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셈이거든? 그럼 당연히 만들 수 있지.]
하지만 용의 심장이 가진 특성 덕분에, 나는 두 번째 마나 하트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첫 번째라니까!]
‘아, 네네. 그렇지요.’
[이놈의 자식, 어른 말씀을 개똥으로 듣는 게냐? 하여튼, 요즘 애들은 왜 전부 다 이 모양 이 꼴인지!]
마나 하트를 구축할 준비는 이미 끝마쳤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세르폰에게 구축을 시도할 거라고 설명해 두었으며, 마그너스가 한 오해 덕분에 유아동에서 영약도 몇 개 얻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현재 내 몸에는 보유량으로만 따지면 2성 기사에 필적하는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물론 아직 정석적인 마나 하트를 구축하지는 않았기에, 운용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도련님, 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 구축법은…….”
수련동의 내 개인 훈련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채 앉아 있는 나에게 세르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 앞에는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슬리드 구축법.
리텐슈노프 직계 혈통에게만 허락된 13개의 구축법 중 하나지만, 현재 마나 하트를 만든 내 사촌 형제들 중에서 이걸 선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테지.’
슬리드 구축법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나 운용 효율은 준수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뛰어나진 않다. 마나의 성질을 바꿔주지만, 획기적인 건 아니다. 그렇다고 증폭 효과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평균.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어중간하다. 아덴의 구축법조차 슬리드 구축법과 비교하면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을 정도다.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애매한 걸 고른 이유?
[무조건 슬리드다!]
당연히 데우스 때문이었다.
[슬리드 구축법! 용의 심장을 지닌 리텐슈노프는 누구나 다 슬리드 구축법으로 마나 하트를 만들었다. 그게 가장 호환성이 좋아! 그러니까 슬리드야!]
용의 심장을 가장 잘 아는 건 데우스인 만큼, 난 새 구축법을 고르는 걸 전적으로 데우스의 판단에 맡겼다. 그리고 데우스는 13개 구축법을 보기도 전에 슬리드 구축법, 슬리드 구축법, 하고 노래를 불러서 내 스트레스 수치를 높였고, 말이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탐탁찮은 얼굴을 한 세르폰에게 말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제 호위, 잘 부탁드립니다.”
“……도련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내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깨달은 세르폰이 곧장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서야 나는 천천히 마나를 끌어올렸다.
‘두 번째 마나 하트라…….’
[첫 번째라니까!]
데우스의 투덜거림을 무시하며, 난 속으로 웃었다.
아덴이 최초의 재구축 성공으로 명성을 떨쳤었지?
전생을 통틀어서, 이건 내가 최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