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검식은 특정 의지를 현실에 구현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모든 검식은 어떠한 소망을 담고 있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소망을 담지 못한 검식은 완성되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번 완성된 검식은 영원불변한 것일까?
[검식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그렇겠죠.”
아니다.
애초에 소망을 구현하는 기술을 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소망이 바뀌면 검식 또한 바뀐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소망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원래 검식의 검로나 자세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폭풍을 일으키겠다는 소망을 담은 검식이 불꽃을 피우려는 검식과 똑같은 검로와 자세를 가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줄 알거라. 최소한 기본적으로 잡힌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게 없으니까. 알겠느냐?]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하려는 블러드하운드 27식의 변형은 그래도 쉬운 축에 속했다.
원래부터 품고 있던 ‘파괴’라는 소망을 검 안이 아닌, 검 밖으로 튀어나오게 유도하는 것이니, 기존 블러드하운드 27식의 본질에서 크게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무어, 그렇다고 쉬운 건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든 검식의 성격을 바꾸는 것 아니냐? 냉담한 아가씨의 마음을 돌리는 게 어렵듯이, 검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라. 아주, 아주! 세심한 조율이 필요한 거다.]
“……다 좋은데 제발 변태 노친네 같은 비유만 좀 자제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데우스 님?”
[이, 이이! 누가 변태 늙은이라는 거냐!]
그렇다고 식은 스프 먹는 것처럼 쉬운 건 또 아니다. 소드마스터에 필적하는 마나 컨트롤 능력과, 7성 급의 경지, 그리고 그 경지를 이루는 동안 익히고 상대해 본 수많은 검식들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지만, 나는 충분히 검식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는 30년 간 리텐슈노프의 충견 노릇을 하며 겪은 전생의 경험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단 검부터 들어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전생에 새로운 검식을 만들거나, 개조해 본 건 아닌지라. 기본적인 감을 잡을 때까지는 데우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들었습니다.”
난 새로운 수련검을 들고 블러드하운드 27식의 기본 자세를 잡았다. 데우스는 입맛을 다시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블러드하운드 27식을 펼쳐보거라. 단, 마나는 담지 말고. 지금은 그저 검식의 검로와 자세 하나 하나에 담긴 의미를 깨우치고 해석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검로와 자세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라고요?”
솔직히 듣기만 해서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검식의 본질이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마법의 주문이나 술식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따지고 보면 마법 또한 그냥 허공에 아무말이나 내뱉거나, 그림 몇 개를 그리는 게 전부다.
어떻게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특정 규칙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마법이라는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다.
[자세 하나, 하나. 검로 하나, 하나. 전부 다 똑바로 기억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에 전부 다 의미가 있으니까. 그걸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서 새로운 식을 추가해 검식을 바꾸는 것이다.]
데우스의 충고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검식을 이어나갔다.
평소엔 블러드하운드 27식의 모토에 맞춰 빠르고 가볍게 휘둘렀다면, 이번엔 느리고 묵직하게 검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검식을 떠올리는 걸 잊지 않았다.
전생에 직접 검을 맞대어 본 검식들, 내가 익혔던 검식들. 그것들을 하나 하나 따져보며 분석하자, 블러드하운드 27식의 동작이 가진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좋다. 그만! 어떠냐, 솔직히 말해보거라. 전혀 하나도 모르겠지? 지금은 안된다니까?]
“약간은요.”
[……뭐가 약간이라는 거냐?]
“약간은 알 것도 같아요.”
[…….]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데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검식의 동작과 자세를 떠올리며 다시금 검을 쥐었다.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었다.
‘그때처럼 완전히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면…….’
이전에 세르폰과의 대련에서 느꼈던 무아지경의 경지. 그 경지에 다시금 발을 들일 수만 있다면 충분히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나, 그런 건 내가 원한다고 해서 찾아오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기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당장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아.’
고개를 돌려 훈련장 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 훈련장에 남은 수련검은 총 40개 남짓.
‘저 검을 전부 다 깨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성큼, 외벽으로 발을 옮겼다. 내 생각을 읽은 데우스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외쳤다.
[뭐, 뭐냐. 지금 뭘 하려는 거냐? 미쳤느냐?]
“검을 계속 깨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오류를 찾아 수정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당장 몇 개의 검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는 건 둘째치고, 네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혈관을 강화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렇게 과도하게 마나를 운용하려는 것이냐!]
데우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난 가볍게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애초에 데우스는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그때 어느 정도의 경지를 이뤘고 내 특기가 무엇인지를 말한다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그건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할 수 있어.’
나는 이미 내 스스로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주제넘은 오만이 아니다.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스무 개, 대략 그 정도만 검을 날려먹으면 된다.’
데우스가 내 몸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생각보다 내 몸뚱이는 더욱더 뛰어났다. 내 몸이기에 더 잘 알 수 있다.
20개. 20번의 기회.
그거면 충분했다.
“후우.”
푹! 푹! 푹!
훈련장 벽에 걸린 수련검을 잔뜩 들고 와, 내 주변 땅에 푹푹 꽂아두었다. 언제든지 검이 부숴지면 바로 새 검을 뽑아들 수 있게 말이다.
“첫 검은…… 이거로 할까.”
스윽!
흙바닥에 박힌 수련검 하나를 뽑아들었다.
적당한 무게감이 손에 착 감긴다. 쥐는 순간 마치 내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검을 수련하는 나날이 하루 이틀 길어질수록 이러한 일체감은 더욱 커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재능이야.’
그런데 왜 이런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전생의 내 기억 속에는 없는 것일까?
분명 발레르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나는데, 그 자식인 드레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들은 기억이 없는 것도 같고.’
뭐, 일단은.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만.’
꽈악!
검을 쥔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곧장 검식을 펼쳤다.
날카롭고 가볍게, 숨겨진 비수를 내지르듯. 검격 한 번 한 번에 강렬한 살의를 담아서 휘두른다.
사람을 죽이겠다는 악의가 검격 한 번 한 번에 찐득하게 묻어나온다. 어째서 인간 도살자들이나 다름 없는 징벌기사들이 사용하는지 이해가 갈 정도다.
하지만 여기에 마나를 담는 순간, 블러드하운드 27식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멍텅구리 검식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25식. 26식. 27식.
원래라면 여기서 블러드하운드 27식은 끝이 난다.
하지만……!
“28식!”
기합과 함께.
새로운 검로, 이전에 없던 자세로 검격을 휘두른다.
동시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파각!
“큭!”
검이 터지는 즉시 검손잡이를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검을 뽑아들어 1식부터 27식까지 펼쳤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검로로 28식을 휘둘렀다. 다행히 옳은 식이었는지 검은 터지지 않았다. 그럼 계속 이어나간다. 29식. 30식. 그리고 다시 파각!
곧바로 새 검을 뽑아든다.
[……미친놈.]
그런 내 모습에 데우스가 혀를 내둘렀다.
그의 입장에서 내가 하는 짓은 기행이나 다름없겠지. 무식하게 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실상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 뿐이니 어쩔 수가 있나? 전생에도 무식하기 짝이 없는 노력 끝에 살아남은 나였다. 난 이 방식으로 30년을 버텼다.
이런 우직함이 나에게는 어떤 방식보다 익숙했다.
그렇게 나는 계속 검을 부숴나갔다.
세 자루……. 네 자루…….
파각! 파각!
터지며 튕겨나온 검 파편에 살갗이 베이고 찢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 따위를 느낄 시간도 없었다.
다음 검격을 어떻게 휘두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된다.’
그렇게 집중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거다.
점점 검식이 이어지는 게 보이니까. 불가능해보였던 목표가 점점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데, 사소한 일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나?
‘되고 있어.’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35식을 넘어, 40식, 45식, 50식.
그리고 54식 째.
[……!!]
구상한 검식을 전부 펼쳤음에도, 손에 쥔 검은 터지지 않았다. 곧바로 시선이 움직였다. 바닥에 꽂아둔 검은 오직 마지막 한 자루를 남기고 있었다. 재빨리 남아있는 수련검을 향해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두 검이 맞닿는 순간,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들려온 파각, 소리가 훈련동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하, 하하!”
이번에 부숴진 건 내 손에 들린 검이 아니었다.
바닥에 꽂아둔 마지막 수련검이 깨진 것이다.
“……성공했다.”
그것은 내가 블러드하운드 27식이 품은 소망을 뒤트는 데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허허, 미친놈. 그리도 좋으냐? 내가 수백 년 동안 리텐슈노프의 핏줄을 지켜보았지만, 네 녀석 같은 놈은 처음 보는구나. 웃기는 놈이야, 정말.]
데우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들을 던졌다.
[하지만, 다시는 이딴 짓을 할 생각은 마라. 네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의지가 굳건하다고 해도 넌 아직 다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고의 말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짓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치우쳤다면, 수백 개의 검을 깨트려야 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만, 당장 내일 아침만 되면 전신이 쑤시고 아플 거다. 아마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피부가 퍼런색으로 변할 지도 모르지.]
“……그건 저도 역시 좀 그러네요.”
내가 어색하게 웃자, 데우스가 빽 소리를 쳤다.
[그래서 내가 하지 말랬잖느냐?]
“윽, 귀청이야. 그래도 결국 성공했잖습니까? 가능할 거 같아서 한 겁니다. 내일 아플 건……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안 그렇습니까?”
[허, 요 쥐방울만한 꼬맹이. 쓸데없이 입은 잘 나불거리는구만. 혈관 다 터져서 그놈의 주둥이도 전부 뒤집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드는구나. 요놈.]
데우스의 타박이 들려왔지만 난 웃었다.
“하하.”
절로 웃음이 나왔다.
블러드하운드 27식에서 정확히 27식이 늘어난 54식.
‘적당히 붙일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내가 붙이는 것보다는, 마그너스에게 이름을 하사해달라 하는 편이 더 좋겠지. 블러드하운드 검식을 개조했다는 걸 알리면, 내 가치가 더욱 높아질 테니까.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