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다시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블러드하운드 54식, 그러니까 내가 새롭게 개조한 검식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검식을 개조할 수 있는 것과 개조한 검식을 잘 다루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블러드하운드 54식을 더 매끄럽고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해선 당연히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다행히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란체스와의 대련이 흐지부지 되었기 때문이다.
란체스는 아직도 치료실에서 와병 중이었다. 유아동에 도는 소문으로는 치료는 이미 예전에 끝났는데, 란체스가 여전히 몸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탓에 퇴원시키지 못하고 있다나?
분명 퇴원하고 나와 싸우는 게 두려운 것이 틀림없다. 대체 얼마나 겁을 집어먹으면, 마그너스의 호령도 무시하고 여전히 치료실 안에 쳐박혀 있는 걸까?
‘덕분에 시간 낭비는 안 하니까 좋긴 한데.’
어차피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한 싸움이니, 굳이 놈을 안 건드리고도 승패가 결정난다면 나쁠 건 없다.
‘이번에 또 란체스를 개박살 내면 여러모로 마그너스의 관심은 끌 수 있겠지만…….’
대신 이래저래 너무 주목을 받겠지.
내가 란체스의 코를 성형수술 해준 날, 갈라할 리텐슈노프가 선불 맞은 맷돼지처럼 날뛰었다던데. 굳이 일부러 쓸데없이 분노를 살 이유는 없다.
하여튼, 녀석의 멍청한 행동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이제부턴 진짜로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겠네.’
도움도 안 되는 시간 낭비 대련을 준비할 필요 없이 앞으로는 온전히 내 힘을 키우는 데만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니었다.
‘하급반 평가까지 앞으로…… 3개월 정도 남았나?’
수련동 하급반 종합 평가.
아홉 살 미만의 리텐슈노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앞으로 몇 달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텐슈노프의 수련동에서 구르는 수련생들은 정확히 세 단계로 나뉜다.
하급반. 중급반. 그리고 상급반.
그리고 리텐슈노프의 모든 수련생들은 세 개의 반을 전부 거쳐서 졸업하는 게 법도였다.
하급반에서 시작해, 상급반까지 승급하고, 마침내 수련동을 졸업한다. 승급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개개인의 재능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구도 빠짐없이 한 번쯤은 하급반에 속하게 된다는 거다.
비천한 거리의 고아 출신이든.
위대한 리텐슈노프의 혈통이든.
누구도 차별 없이 말이다.
그리고 리텐슈노프 가문의 혈통이라면 수련동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하급반을 졸업하는 게 평균이었다.
그렇게 재능이 없다고 소문난 란체스, 반체스 형제 또한 아슬아슬하게 1년을 채우고 중급반으로 올라갔지 않았던가?
그리고 하급반 종합 평가는 중급반으로 올라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시험 중 하나였다.
이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면 그 즉시 중급반으로 승급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승급에 실패할 리는 없겠지만…….’
지금 내가 가진 힘을 생각하면 나는 사실상 중급반 수련생과 다를 게 없다. 용의 심장. 블러드하운드 54식. 그리고 두 개의 마나 하트까지.
이런 패를 쥐고 있는 만큼 종합 평가 따위를 통과하는 건 식은 스프를 먹는 것보다 쉬웠다.
하물며 이번 종합 평가의 내용까지 알고 있지 않나?
종합 평가 1위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리라.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다.’
고작 그 정도 결과물을 내는 것으론 부족하다.
1위는 내 형제들이라면 개나 소나 다 내놓는 성적.
리텐슈노프의 가주 자리에 도전하는 후계자라면, 응당히 그에 걸맞는 압도적인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
이런 엄청난 힘을 손에 넣었으면.
최소한 마그너스가 만든 기록 정도는 깨 줘야겠지.
“일단은…….”
차근차근, 평가 시험 준비부터 해볼까.
* * * * *
파각!
둔탁한 쇳소리가 들리자 세르폰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바로 그의 시선이 손에 쥔 검을 향했다. 역시나, 그의 검은 파편이 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세르폰은 검손잡이를 놓으며 양 손을 들고 말했다.
“계속 밀리실 때마다 그 검식을 쓰시는 건 도련님의 실력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르폰의 충고를 드레커는 그다지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보일 뿐이었다.
“좋은 걸 가지고 있는데 안 쓰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검식에 익숙해지려면 자주 써봐야 하잖아요?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세르폰은 탐탁찮게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으로 11번째.’
67전 56승 11패.
세르폰과 드레커의 대련 전적이다.
당연하지만 56승은 세르폰의 것이었다.
아무리 드레커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전생의 실전경험이 그걸 뒷받쳐준다지만 5성 기사인 세르폰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
드레커가 블러드하운드 54식을 완성한 이후 치른 모든 대련에서 세르폰은 전부 패배했다. 11패는 모두 다 그 무렵에 나온 전적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매번 검이 깨지는 바람에 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만큼 블러드하운드 54식은 괴물 같은 검식이었다.
검격을 교환할 때마다, 마치 사냥개가 물어뜯는 것처럼 검을 깨트려 먹어치우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물론 대련이라는 걸 감안해야 하는 결과다. 만약 세르폰이 진심을 낸다면 지금의 드레커 정도는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나 또한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 사실을 생각하자 세르폰은 몸서리를 쳤다. 우스운 일이었다. 5성 기사가 여덟 살짜리와 싸웠을 때,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할 걸 예상하다니?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진짜, 빌어먹게도 소름끼치는 검이야.’
드레커가 쓰는 블러드하운드는 원본부터 그런 검식이었으니까.
마그너스에게 블러드하운드 27식을 받아온 드레커가 그 검식을 대련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을 때, 세르폰은 솔직히 꽤 당황했다.
이제 막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휘두르는 검격이라기엔 너무나도 악랄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휘두르는 검격 하나 하나에 악의가 넘쳤다. 마치 급소와 빈틈을 물어뜯기 위해 언제나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독사 같았다.
그때는 그래도 세르폰 또한 검을 휘둘러 드레커의 공격을 쳐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야 서로의 검이 부딪치기만 하면 곧장 산산조각이 나 깨져나가는데,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검만 그런가?
블러드하운드 54식은 갑옷이나 방패 따위도 와작와작 씹어먹을 수 있는 검식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검식 이름을 잘못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냥개’보다는 ‘아귀’ 따위의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검식이란 말이지.’
물론 속으로만 품은 생각이었다.
마그너스가 지었으리라 추측되는 검식 이름을 대놓고 욕할 정도로 세르폰은 간이 크지 않았다. 하물며 이전에 한 번 곤욕을 치렀던 적도 있었으니,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련님, 이번에는 굴단 검식으로 한 번 해보시죠.”
대신 세르폰은 다른 말을 꺼냈다.
“굴단이요? 그거 솔직히 그다지 좋은 검술은 아니잖습니까? 굳이 그걸로 대련을 해야 합니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검사도, 명검에 너무 의존하면 그 빛이 바래기 마련입니다. 도련님의 참된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여러 검술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뭐……. 일단 알겠습니다.”
그다지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드레커는 잠자코 세르폰의 제안에 따랐다. 굴단 13식의 기본 자세를 취하는 드레커를 보며 세르폰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가지고 있으신 재능의 크기가 다르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게 있는 법이다.
세르폰은 드레커가 검식의 기본 자세를 취하는 것만 보아도 그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자세가 완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정도는 다른 도련님들도 다 하는 것들이지.’
그것은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작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리텐슈노프 가문의 이름을 내밀기에 심히 부족하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최소한 열 개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두 세 개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것이 리텐슈노프의 혈통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 건 오직 드레커 뿐이었다.
고작 한 번 본 검술임에도 그걸 다 기억해서 완벽하게 펼치다 못해, 실전에서도 사용할 정도로 익혔다.
그저 마나 하트에 관해 조금 알려주었을 뿐인데, 혈맥법이라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술을 혼자서 개발해 내었다.
무언가, 격이 다른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저 기본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 세르폰은 그 속에서 노련함과 원숙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겨우 여덟 살의 나이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마그너스 가주님께서 수련동에 있으시던 시절이, 지금 드레커 도련님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세르폰은 감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드레커가 기본 자세를 풀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도련님.”
세르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드레커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굴단 검식으로는 세르폰 경을 이기기 힘들잖아요? 음, 정확히 말하면 힘들다기보다는…… 어렵죠?”
그 말에 세르폰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힘든 게 아니라, 어렵다고? 세르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도련님,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어렵다, 라니…….”
“아, 도발하는 건 아니니까 호승심은 좀 접어두시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어려운 일을 성공하면 마땅히 그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상, 말입니까?”
세르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텐슈노프의 혈통으로서,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영약이나 검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세르폰 자신만이 줄 수 있는 보상일 텐데……. 딱히 드레커가 바랄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세르폰의 고민은 곧 끝이 났다. 드레커가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제가 이기면…… 수장고의 출입할 수 있게 허가를 좀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수장고 말이십니까?”
“네. 아 물론, 가문의 보물이 들어 있는 곳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거긴 들어가지도 못하고요. 제가 들어가려는 수장고는 중앙 서고의 수장고입니다.”
세르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앙 서고의 수장고? 거길 왜?
“……도련님께서 그곳을 들어가시려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수장고에 출입할 수 있는 건 16살부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이름으로 출입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오, 그래요. 잘 이해하셨네요.”
정답이라는 듯 짝, 하고 박수를 치는 드레커.
그 모습에 세르폰은 침음성을 흘렸다.
만약 이름을 빌려주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드레커야, 혈통이 혈통이니만큼 꾸중을 듣는 것으로 넘어가겠지만 세르폰 자신은 징계를 면치 못할 거다.
아마 꽤 무거운 징계를 받으리라.
“알겠습니다. 도련님이 승리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상기했음에도 세르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드레커의 기사가 되기로 맹세하였기에, 이런 일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사실, 대련에서 이기면 문제가 없는 거 아닌가? 세르폰은, 자신이 기본 검식으로 겨루었을 때 패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드레커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좋아. 이걸로 한시름 덜었군.’
지금은 어느 누구도 모르지만, 중앙 서고의 수장고에는 드래고니아 구축법의 존재를 암시하는 서적이 숨겨져 있다.
‘기회만 생기면 바로 없애버릴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할 기회가 생겼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세르폰을 쓰러트려야 한다. 그것도 블러드하운드 검식을 사용하지 않은 채, 기본 검식인 굴단 만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5성 수호 기사?’
지금 가진 힘이라면.
전력을 다하면 못 이길 것도 없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