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굴단 검식.
리텐슈노프 가문에서 수련생에게 일괄적으로 가르치는 기본 검식이다.
기본이라고 불리는 만큼 검식에는 딱히 특징이랄 게 없다. 검이 가진 소망도 좀 단단해지는 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수련생은 다른 검식을 손에 넣는 순간, 다시는 굴단 검식을 쳐다보지 않았다.
리텐슈노프 가문의 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수련동에서 쫓겨난 낙오자들이 가문 밖에서 쓰는 검식이라는 인식도 그런 행동에 한몫했다.
실제로 탈락한 수련생들이 그나마 배운 굴단 검식을 가지고 용병 업계에서 먹고사는 일이 비일비재 했기에 그 편견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시죠, 도련님.”
굴단 검식은 그렇게 폄하받을 검식이 아니다.
마나 컨트롤을 제외하면 평균 미만의 재능, 이런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상급반이 될 때까지 어떤 검식도 얻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진 건 오직 굴단 검식 뿐이었다. 오직 그것만을 익혔고,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 굴단 검식의 묘리에 파고들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결론을 내렸다.
‘……굴단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검식이라고 말야.’
사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검식을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소드마스터 뿐인데, 그런 강자가 만든 검식이 멍텅구리일 리가 있는가?
“선공을 양보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제가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부족한 쪽이 선공을 양보받는 게 맞습니다, 도련님.”
당연하지만, 히드라 슬레이어라는 위명으로 명성을 떨친 세르폰 또한 나보다 굴단 검식을 잘 알고 있을 리 없다.
당장 저 나이에 5성 기사라는 건 어마어마한 재능을 타고난 채, 엘리트 코스만을 밟았다는 소리다. 굴단 검식에 대해 생각해보기는커녕, 굴단 검식을 과연 2년 이상 써보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그럼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이 대련은 내가 이긴 거나 다름 없다.
두 개의 마나 하트 덕분에 세르폰에게 마나량으로 밀리지 않는다. 실전을 치른 경험은 내가 압도적으로 더 많고, 마나 컨트롤은 당장 소드마스터로 각성하지 않는 이상 내가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검식에 대한 이해도까지 차이가 난다?
‘그럼, 뭐…….’
내가 지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바닥을 박차며 나는 세르폰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는 여전히 기본 자세를 취한 채 내 공격을 기다렸다.
‘기본 자세, 방어에는 좋다.’
굴단 검식의 기본 자세.
높은 곳에 중심을 둔 채, 검 끝은 하단을 향한다. 대부분의 위치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해내기 좋다.
검이 어떤 특징을 가진 무기인지 가장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기본 자세이기에, 아마도 리텐슈노프 가문이 이런 자세를 가진 굴단을 기본 검식으로 삼았겠지.
‘하지만.’
완벽한 방어 따위가 어디 있겠는가?
몸을 숙이며 검을 허리 뒤로 숨긴다. 그리고 거리가 닿자마자 그대로 크게 올려 벤다.
순간 세르폰이 눈을 찡그렸다. 내가 검의 궤도를 숨긴 탓에 검격을 흘려내기 까다로워 진 탓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아마도 뒤로 빠지겠지.’
그리고 내 예상대로 세르폰은 급하게 땅을 박차서 뒤로 몸을 빼면서 검격을 피해내었다.
전부, 내가 노린 바대로.
“흡!”
그대로 2격을 휘두른다.
생각보다 빠른 내 검격에 세르폰이 껄끄럽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이번 것까지 상대하지 않고 피하면, 몸의 자세가 무너지는 걸 염두했으리라.
하지만.
카칵!
“어어?”
두 검이 부딪친 순간, 세르폰의 검이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당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가 세르폰의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세르폰의 검이 밀려난 이유?
‘내 검이 더 단단하니까, 당연한 일이지.’
검식의 숙련도 차이다.
굴단은 그저 검을 단단하게 만드는 검식.
당연한 이야기지만 검식을 더 완벽하게 펼친 사람의 검의 강도가 높아진다. 그리고 강도 차이가 나는 검이 부딪치면 마땅히 덜 단단한 검이 튕겨나가게 된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세르폰이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검격을 가한다.
카앙! 캉!
세르폰은 급하게 검을 들어 검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로는 검을 흘려내기 힘든 게 당연지사. 그리고 검격을 받아낼 때마다, 반발력에 밀려 세르폰의 자세는 더욱더 흐트러졌다.
당황한 세르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굴단 검식으로 내게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아마도 자신이 왜 패배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리라.
어쩌겠나?
‘얼른 그 책을 불태워야 하는데, 실력을 숨기고 자시고 할 시간이 어딨어?’
그러게, 누가 그런 내기를 하래?
카앙!
나는 세르폰의 검 손잡이 근처를 후려쳤다. 무너진 중심에 더불어 굴단 검식의 반발력 탓에 세르폰은 마침내 검을 놓치고 말았다.
“…….”
“이겼네요.”
“도련님, 대체 어떻게……. 이게 무슨.”
어안이 벙벙한 채로 떨어진 자신의 검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세르폰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글쎄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한 건, 약속은 지키셔야 한다는 겁니다.”
약속이라는 말에 세르폰이 움찔 몸을 떨었다. 곧 세르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야, 세르폰은 당연히 자기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으니 동의한 공수표였을텐데…….
세상에 맙소사. 내가 이겨버렸네?
‘……그러게 누가 그런 약속을 하래?’
역시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한다.
울상이 된 세르폰에게, 난 해맑게 물었다.
“그럼, 세르폰 경.”
“……네?”
“중앙 서고 수장고는 언제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암.
* * * * *
세상의 풍경이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었다.
정원의 나무들은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었고, 겨울 나기를 준비하는 소동물이 간간이 보였다.
유아동의 모습도 그 계절의 변화를 따라 바뀌었다.
채광창을 가리던 커튼은 두툼한 양모 재질로 바뀌었고, 각 방에는 잠들어 있던 벽난로가 타올랐다. 내게도 포근한 옷과 함께 털 달린 실내화가 주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밥상 머리에서 날 노려보는 체스 형제라던가, 여전히 싸가지 없이 틱틱대는 랑느라던가. 나를 향한 마리 유모의 애정 또한 그대로였다.
여전히 데우스는 꼰대 변태 노친네 같았고 말이다.
[이 쥐똥 만한 꼬맹이, 말 버릇 하고는! 내가 적당한 몸만 있었으면 네 녀석 머리통에 예의범절의 꿀밤을 100대는 먹여줬을 거다!]
……하여튼 내 일상 또한 바뀌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곧장 수련동의 훈련실로 가 납 주머니를 차고 구보를 한 뒤, 검을 휘두르다가 점심을 먹으러 온다. 그 이후에는 다시 훈련실에서 세르폰과 대련을 몇 번 하다가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잠든다.
딱히 달라질 게 없는 평이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쳇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련님. 중앙 서고 수장고의 출입 허가를 받아왔습니다.”
세르폰이 드디어 수장고 출입 허가를 받아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허가를 받아오신 겁니까?”
“중앙 서고의 수장고는 저 같은 수호 기사에게는 제한 구역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한 세르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냐니, 뭘 말하는 겁니까?”
세르폰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혹시라도 수장고에 몰래 들어간 일이 가주님이나 다른 분들의 귀에 들어가면…… 저도 그렇겠지만 도련님도 무사하시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곧장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한데…….”
응?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 소리야?’
설마 그 규칙을 내가 진짜로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난 어이가 없어서 세르폰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내 세르폰이 이쪽의 속사정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름의 실력이 있음에도 내 전속 수호 기사로 배정된 걸 보면, 세르폰은 그다지 리텐슈노프의 혈족과 거리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모양이니까 말이다.
이런 비밀은 리텐슈노프의 혈족의 지근거리에 딱 붙어서 이것 저것 다 본 경험이 없으면 모를 수도 있지.
“그거 거짓말이에요.”
“……네?”
세르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16살 이전에 못 들어간다던가 하는 규칙은 다 거짓말이란 말입니다. 아니지…… 원칙적으로는 거짓말은 아니구나?”
“무슨 이야기인지 잘…….”
“정확히 말하면 지키는 놈이 병신인 규칙입니다. 암묵적으로 다 들어갔어요. 딱히 수장고뿐만이 아니라, 이곳 저곳 다 말입니다.”
하긴, 사실 이런 비밀은 모르는 게 정상이다. 규칙 자체는 존재하고, 실제로 대놓고 제한 구역에 들어가려고 하면 제재를 당하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겠지.
“지금 세르폰이 한 것처럼, 꼼수를 써서 들어가도 가주님이나 다른 숙부님들 귀에 다 들어갑니다.”
그들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다. 가문에 있는 눈은 한 두 개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간다고 해서, 혼내지는 않습니다. 강해지기 위해 꼼수를 쓴 거 아닙니까? 리텐슈노프 가문에서 힘을 추구하는 게 죄 취급 받는 걸 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
세르폰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왠지 출입 권한 가져오는 게 늦어진다 했더니, 설마 최대한 안 들키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늦은 건 아니겠지?
“그런 겁니다. 설마 수장고 출입 권한 받아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신 게, 그거 고민하다가 늦으신 건 아니시죠? 그런 거라고 믿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됐습니다. 출발하기나 하시죠.”
나는 세르폰을 따라 유아동을 빠져나왔다.
전생에야 리텐슈노프 가문의 곳곳을 이리저리 다녔지만, 이번 생에서 수련동과 유아동이 아닌 다른 곳을 가는 건 마그너스의 저택을 제외하면 처음이다.
리텐슈노프 가문은 전생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롭게 외관을 보수한 곳이나, 지금은 없는 건물이 들어설 터만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과거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저기는 란체스 놈한테 뺨 쳐맞은 곳, 저기는 그라힐한테 아덴의 전언을 전달했다가 반쯤 죽을 뻔한 곳. 어, 나 목 잘린 곳이 중앙 광장이 아니었나?’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런 악연의 흔적들을 지나쳐서, 마침내 나와 세르폰은 리텐슈노프 중앙 서고에 도착했다.
거대한 직사각형의 7층 건물. 웅장하다고 평하기에는 투박한 외관이 심심했고, 그렇다고 별 볼일 없다기에는 그 무지막지한 크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크기로도 모자라서, 무려 지하 5층까지 존재한다니. 참 무지막지한 곳이란 말이지.’
이곳은 지금까지 리텐슈노프 가가 수집한 모든 서적이 보관되는 곳이다. 전략, 정략, 지리, 따위부터 검식과 마나 하트 구축법, 심지어 마법 관련 서적까지.
그 대부분이 다른 가문에서 약탈하거나 빼앗은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리텐슈노프 가문의 패도적인 성향을 상징하는 건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뭐, 그건 그거고.
“출입증 있죠?”
“아, 네.”
세르폰에게 받은 출입증을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나는 중앙 서고로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