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리텐슈노프 중앙 서고.
리텐슈노프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중앙 서고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를 자랑했다. 어지간한 중소 가문의 성곽과 비교할 수 있는 압도적인 거대함.
전 세계를 통틀어 이곳보다 더 큰 서고는 마도명가 아이스본의 천공 도서관뿐일 정도이다.
천공 도서관이라는 명칭이 사실상 떠다니는 부유섬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고라는 틀에서 이곳보다 더 거대한 곳은 세상에 없을 거다.
제국의 개선문을 연상하게 하는 무지막지한 서고 입구를 지나쳐, 나는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
“충!”
입구에서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각 잡힌 경례를 올렸다. 가볍게 웃어주며 지나쳤다.
기사들은 모두 어깨에 투박한 매 휘장을 달고 있었다. 가문의 경비를 담당하는 쇠매 기사단의 표식이다.
경비 임무를 맡는 만큼 기사단에 소속된 인원수가 많은 게 특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다른 기사단에 비해 평균적인 실력이 떨어졌다.
경비라고 생각하면 꽤 밥값을 하지만, 가문에서 중요히 여기는 임무에 파견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자들.
‘……애초에 쇠매 기사단에 차출되는 자원이 자원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출신 때문이었다.
리텐슈노프 가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빈민 고아들 중, 어느 정도 재능의 씨앗이 보이는 애들을 걸러내 수련동에서 훈련시킨 게 저들이다.
혈통이 불분명한 고아 출신인 만큼, 어지간히 재능이 뛰어난 게 아니면 대부분의 빈민 고아는 쇠매 기사가 되었다.
전생의 나도 쇠매 기사단 출신이었다.
물론 아득바득 노력한 끝에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설 수 있었지만 말이다.
“쉬엄쉬엄 하세요.”
난 그들에게 가볍게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내 격려를 받은 쇠매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리텐슈노프의 혈통이 자신들에게 관심을 줄 거라고는 생각조차도 해본 적 없다는 얼굴이다.
하긴, 리텐슈노프 가문에서 저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쇠매 기사단은 분명 리텐슈노프의 천하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부속 중 하나이다. 하지만 리텐슈노프의 혈통은 저들을 그저 당연한 것 취급하지 않던가?
저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뿐이다.
“수고하세요.”
“추, 충성!”
“계속 가만히 서있는 건 힘들진 않으세요?”
“아, 아닙니다!”
나는 서고를 지나다니며 마주치는 모든 쇠매 기사단원에게 거리낌 없이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은 내 행동에 당황하거나 놀랐지만, 불편해하지는 않았다.
내가 멀어지자 그들끼리 속삭이는 게 느껴졌다.
“저분이 누구셨지?”
“발레르 님의 아드님이시잖아, 기억 좀 해.”
“아, 드레커 도련님?”
“정말 마음씨가 고우신 분이 틀림없어. 우리 같은 것들에게도 저렇게 친절하시다니…….”
“체스 도련님들과는 완전 차원이 다르시네. 내 동기 중 하나는 란체스 도련님한테 밉보였다가 정강이가 부러졌더라고. 뭐 때문에 맞았더라? 못생겨서였나?”
“그분이 드레커 도련님한테 시비를 거셨다가 얻어맞고 코뼈가 주저앉은 거 알아? 완전 쎔…….”
“쉿! 입조심해! 또 징계 받고 싶어?”
자신들의 목소리가 내게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진짜 별별 이야기를 다 나누고 있었다.
물론 내 귀에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전부 들렸다.
전부 용의 심장 덕분이었다.
인간의 몸에 용의 심장이 생긴 탓에 오감이 용과 비슷한 정도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내 몸의 감각은 현재 인간의 범위는 거의 초월한 상태였다.
[쯧쯧, 용의 청력으로 하는 게 고작 엿듣기냐? 그것도 사내 새끼들 뒷말을 들어? 한심한 놈! 하다 못해 남의 이야기를 엿들을 생각이라면, 아리따운 꽃님들의 수다를 엿들으란 말이다, 이 멍텅구리야!]
‘……일단, 아리따운 꽃님이 뭔지는 안 물어볼 겁니다.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하지도 마시고요.’
하여튼,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당히 평판 관리를 해줘야지.’
내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를 통해, 가문의 기사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였다. 좋은 미담이 퍼질수록 그들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호의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세력을 모을 때 피똥을 안 싸지. 쥐뿔도 없이 뭘 하려고 하면 진짜 암담하다고.’
내 아버지가 후계자 경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잠적한 탓에, 나는 가진 세력이 한 줌도 없었다.
실질적 경쟁자인 내 삼촌들까지 가지 않더라도, 다른 사촌 형제들은 적든 많든 다들 자기 사람이랄 게 존재한다. 그들에게 충성을 바친 기사가 있단 말이다.
한데, 내가 가진 거라곤 세르폰과 마리 유모, 이렇게 딱 둘 뿐이다. 이건 뭐…….
그렇다고 지금부터 기사를 포섭하자니, 쥐뿔도 없는 내게 붙을 기사가 과연 존재할지는 둘째치고 당장 그런 행동을 했다간 사람들의 관심을 너무 끌게 된다.
‘결국 부스러기라도 긁어모아야지.’
그러니 쇠매 기사단이었다. 딱히 내가 접근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기사단이고, 이들을 긁어모은다고 딱히 큰 세력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접근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좀 친절하게 대한 것 뿐이지.
그리고 리텐슈노프의 혈통 중 누구도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다.
* * * * *
중앙 서고의 지하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를 지키는 기사가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출입증이 있으십니까?”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세르폰의 출입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분명 수호 기사 명의로 발급된 출입증일텐데, 입구를 지키던 기사는 출입증을 확인하자마자 아무 말 없이 수장고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걸 보고 있으니 문득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하는 규칙이야, 이게? 아덴은 뭐가 자랑이라고 이걸 나한테 말해준 거지?’
눈 감고 아웅하는 게 딱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아마도 금지된 규칙을 깨고서라도 힘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겠다, 뭐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외부인인 내 시선에서 보기엔 이것만큼 바보 같은 규칙이 없었다.
‘……알 게 뭐람. 나중에 가주 되면 내가 바꾸지 뭐.’
콧방귀를 뀌며 수장고로 입구에 발을 들였다. 입구에서부터 퀴퀴한 책 내음이 확 코끝을 스쳤다.
서고에서도 종이 냄새가 꽤 많이 났었지만, 이곳은 지금까지와 비교하면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문 너머는 어두컴컴했다.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수장고 안에는 서적의 안전을 위해 등불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걸 가지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내게 마법 등불을 건네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히 세 시간 동안 빛을 발하는 물건이니, 불이 꺼지기 전에 나오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시간을 착각하셔서 갇히셨다면, 등불 아래에 버튼을 누르십시오. 바로 수색대가 내려갈 것입니다.”
“세 시간이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책의 위치는 알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난 수장고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
목적지는 지하 3층의 H-13구역. 전생에도 몇 번 들어와 본 적 있었기에,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터벅 터벅.
수장고는 고요했다. 마치 이곳에선 누구나 엄숙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게 죄다 약탈로 빼앗은 물건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3층에 도착하자마자 난 곧바로 등불을 들었다.
리텐슈노프 중앙 서고의 수장고는 책장으로 가득 찬 곳이다. 등불의 빛을 따라 단단한 석재로 만들어진 책장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사람 키보다 세 배는 높은 책장이 줄줄이 서 있는 광경은 장엄함까지 느껴졌다.
저 거대한 책장에 빼곡히 책이 가득 채워져 있다. 물론 대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책들이 아니다. 허황된 내용이거나, 당장은 쓸모 없거나,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서적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그 안에도 보물이 숨어 있었다.
‘드래고니아 구축법의 힌트가 담긴 책처럼 말이지.’
딱히 그 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생에 아덴은 드래고니아 구축법을 손에 넣자마자 곧장 수장고의 서적을 조사할 것을 천명했다. 어딘가에 또 보물이 될 책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한때 그 조사를 책임진 것이 나였고, 나중에 내가 아덴에게 숙청당해 죽을 때까지도 조사는 계속되었다.
‘어지간히 책이 많았어야지.’
그리고 내가 책임자였던 시절, 나는 이곳에 숨겨진 몇 권의 보물을 더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숨겨진 위치 또한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말이다.
‘여길 다 뒤엎어 조사하지 않는 이상 그 보물들이 빛을 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빨리 내가 챙기는 게 낫겠지.’
내가 드레커 리텐슈노프의 몸에 빙의한 나비효과로 인해 그 보물이 아덴이라거나, 하여튼 다른 리텐슈노프의 손에 들어가면 골치 아파진다.
‘일단 그 책부터 찾자.’
물론 지금 중요한 건 드래고니아 구축법이다.
난 곧바로 H열로 이동했다.
거대한 석재 책장의 측면에는 전부 다 번호가 새겨져 있었기에 H-10열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장에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아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등불을 비추며 책장을 뒤졌다.
“분명 여기 어디쯤에……. 아, 찾았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아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책.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 것이 인상적인 책이지만, 가죽이 너무나도 낡은 바람에 오히려 별 볼일 없어 보였다. 멀쩡하던 시절에는 꽤 고풍스러웠겠지.
“후우!”
책에 입김을 불자 뿌옇게 먼지가 흩날렸다. 절로 잔기침이 튀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거 완전 걸레짝이네…….”
생각보다 책의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손으로 먼지를 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당장이고 제본이 뜯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먼지가 전부 사라지자, 난 제목을 확인했다.
「이 세계에 유일한 리텐슈노프 가문의 적법한 가주이시며, 존귀하고 위대하신 데브론 리텐슈노프 님의 다섯 번째 대마경 토벌에 관하여.」
“옛날 책들 제목 한 번 참…….”
그래도 일단 내가 찾는 책은 맞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을 펼쳤다. 찢어야 하는 페이지는 총 7개.
13, 47, 119, 187 234, 315, 316.
솔직한 심정으로는 책을 통째로 불태우고 싶었지만, 수장고에서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화제를 예방하기 위해 불을 지를 만한 도구는 일체 반입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설사 불을 피울 수 있다고 해도, 종이 쪼가리가 가득한 지하에서 불을 피우는 건 미친 짓이지.’
아마 불에 타 죽어도 자살로 취급할 걸?
그러니 찢어서 먹어치우는 수밖에 없다. 난 한 페이지를 찢어서 입에 쑤셔넣었다.
[이, 이 미친 놈이 이제는 책을 쳐먹어? 아이고 세상에! 왜 이런 놈이 하필 용의 심장을 만든 거람!]
데우스의 절규를 무시하며 나머지 페이지도 먹어치웠다. 하나, 둘, 셋, 넷…….
“후우!”
일곱 개의 페이지를 전부 먹어치운 뒤, 책을 원래 꽂혀 있던 자리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 다음 그 주변에 있는 책의 먼지를 전부 다 털어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먼지가 없는 걸 보고 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나자, 난 그제서야 숨을 내쉬었다.
‘이제 안심이다.’
이것으로 드래고니아 구축법의 비밀은 영원히 내 뱃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잘 됐네, 잘 됐어.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마법 등불을 확인했다.
‘어디보자…… 대략 2시간 정도 남았나?’
이 정도면 적당히 다른 책도 몇 개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이다. 기왕 들어온 거, 알차게 챙겨서 나가야지.
그 순간.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등불을 비추자, 팔짱을 낀 채 탐탁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사내는 내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비운의 황태자이자, 한때 소검제라고 불렸던 남자.
“……에르반 형님?”
에르반 리텐슈노프.
이 인간이 지금 왜 여기에 있지?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