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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20화 (20/139)

20화

당황스럽다.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에 등짝이 축축해지는 기분이다.

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지하 수장고에서,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에르반 리텐슈노프를 마주칠 줄이야!

……설마 내가 페이지를 뜯어먹는 걸 본 건 아니겠지?

“안녕하세요. 형님.”

일단 밝은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 없다고 했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데 거기다가 면박을 주겠어?

하물며 에르반은 전생에도 겉으로는 누구에게나 예의를 차리는 리텐슈노프 중 하나였다.

“드레커…… 였지?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냐?”

시작이 좋았다.

나는 재빨리 등 뒤의 책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책을 찾으러 왔습니다, 형님!”

“……책? 이 지하에 무슨 책을 찾으러 왔다는 거야? 그보다 네가 여기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냐? 열여섯 살 전에는 수장고 출입이 금지잖아?”

“어, 그건…….”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닐 거다. 아마 그 규칙이 유명무실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이겠지.

“그, 란체스 형이 알려줬어요. 그냥 수호 기사한테 출입증 받아서 들어오면 된다고……. 자기도 그렇게 들어왔다고 했는데, 혹시 안되는 거였습니까?”

일단 만만한 란체스를 팔았다.

딱히 거리낄 것도 없다.

내가 그 녀석 코뼈를 예쁘게 성형해 주면서 분명 인성도 고쳐줬으니까, 그 값을 지금 받는 거다.

거지 같은 인간성을 무료로 고쳐줬는데, 이 정도 거짓말은 마땅히 내가 받아 가도 되는 대가가 아닐까?

“……란체스가? 이런, 그 녀석도 나 몰래 벌써 들어왔던 건가? 걔는 이걸 또 어디서 들었지?”

갈라할 숙부께서 귀띔해 준 건가? 에르반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곧 나를 곤란하다는 듯 쳐다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좋아.’

내 거짓말을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내가 이 곳에 들어온 걸 지적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에르반 또한 리텐슈노프의 혈통.

그것도 전생에는 아덴 놈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리텐슈노프였다.

방심하기엔 내가 본 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일단 내가 페이지를 뜯어서 먹는 광경을 직접 본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니지. 혹시 전부 다 봤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녀석은 겉으로는 소검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고하고 담대하게 굴었지만, 리텐슈노프답게 좆같은 구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지금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해놓은 조치 덕분에 에르반은 내가 무슨 책을 확인했는지 알기 어려울 거다.

‘설사 그 책을 찾는다고 해도…….’

어차피 페이지를 먹어 치운 이상, 그 책에 원래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 그가 알 방법은 없다.

‘약간 의심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분명 확신은 가지지 못하겠지.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군요. 란체스 형이 저한테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조금 다퉜다고 이렇게 골려줄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형님.”

나는 시치미를 뚝 때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으응? 아니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닌데……. 그래서, 네가 찾던 책은 찾았냐?”

“아뇨. 수장고가 너무 넓은 데다가 어두컴컴해서 도저히 못 찾겠어요. 거기다가…… 책도 너무 많고요.”

“하긴, 여기가 좀 그렇지? 나는 아직도 왜 여기에 등불 설치를 안 하는지 모르겠더라. 화재가 걱정이라면 마법 등불이라도 설치하면 될 텐데. 요즘 아이스본에서 밝기는 낮아도 오래 가는 등불을 개발했다던데, 그런 것 좀 들여오면 안 되나?”

에르반은 작게 투덜거리다가, 곧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뭐, 실망하지 말아라. 네가 딱히 가문의 규칙을 어긴 건 아니니까. 어차피 그런 나이 제한은 다들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규칙이거든. 나중에 시간이 나면 또 들어오면 되지. 아니면 열여섯 살에 당당히 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

“네, 형님.”

나는 어린애답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 예의 바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에르반은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기를 띄고 있었다.

“그럼 형님, 저는 이만 가볼게요. 등불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가거든요. 그리고 사실 시간이 더 남아있어도 여기서 무언가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너무 복잡하고……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고요.”

“그래. 여기가 어린애가 좋아할 곳은 아니긴 하지.”

에르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자, 받아라.”

작은 종이에 포장된 네모난 물건이었다. 달콤한 냄새를 맡아보니 초콜릿 따위가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래. 그럼 가보거라. 난 아직 찾을 게 남았거든.”

“네! 알겠습니다!”

다시금 배꼽 인사를 한 뒤, 나는 재빨리 H 열을 빠져나왔다.

* * * * *

드레커의 등불이 저 멀리 사라졌다.

에르반 리텐슈노프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까 전까지 보였던 사람 좋은 형의 눈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곳에 남은 건 독사의 시선뿐이다.

마침내 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드레커의 인기척도 사라지자, 에르반의 싸늘한 시선이 조금 전까지 드레커가 서 있던 책장으로 향했다.

에르반은 재빨리 책장에 등불을 비추었다.

“이런…….”

곧 에르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부분의 책이 깨끗했다. 오랜 시간을 서고에서 묵었다면 응당 쌓여야 하는 먼지가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무슨 책을 찾아보았는지 들키지 않기 위해 처리를 해둔 것이겠지.

“쥐방울만 한 꼬맹이 주제에…….”

꼼꼼하기도 하네.

에르반은 가볍게 혀를 찼다.

겨우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역시 리텐슈노프는 리텐슈노프란 말인가? 거짓말하는 솜씨부터 안색을 숨기는 것까지 완벽했다.

하물며 흔적을 감추는 철저함은 또 어떤가?

어디 한 구석 흠잡을 곳이 없었다.

“수장고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주제에…… 뻔뻔스레 자리를 피해?”

대체 무엇을 보고 갑작스럽게 몸을 뺐는지는 모르겠다. 혹시라도 에르반의 본질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도망친 거라면, 그것 자체가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한참 동안 책장을 살피던 에르반은 이내 가볍게 입술을 씹었다.

“빌어먹을.”

드레커가 철저하게 숨긴 탓에, 더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무언가 노리고 온 게 틀림없는데…….”

수장고에 발을 들인 뒤, 어느 한 곳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찾으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드레커는 자신의 흔적을 전부 숨겨버린 지 오래였다.

참…… 똑똑하게도 말이다.

“하여튼, 이놈의 핏줄이란…….”

이놈이고 저놈이고 만만한 녀석이 없었다.

에르반은 가볍게 투덜거리며 다시금 드레커가 사라진 방향으로 독사 같은 시선을 던졌다.

“드레커 리텐슈노프, 드레커라…….”

에르반의 눈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앞으로 관심을 둘 가치가 있어 보였다.

* * * * *

역시나.

내 예상대로, 에르반 녀석은 내가 충분히 멀리 떨어졌다고 판단하지마자 내가 서 있던 자리의 책장을 전부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초인적으로 강화된 시력과 청력 덕분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에르반이 무엇을 하는지 감시할 수 있었다.

‘음흉한 놈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절로 소름이 끼쳤다.

[캬! 집안 꼴 한번 자알 돌아간다, 야. 하긴, 리텐슈노프 놈들 집안이 언제 바람 잘 날 있었더냐? 이건 일상이니라. 네 녀석이 익숙해져야 한다.]

만약 책장의 먼지를 죄다 털어두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책을 확인했는지 전부 에르반에게 들켰으리라.

‘거참, 사람 좋은 척은 다 하더니…….’

전생에는 아덴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긴 탓에 성격이 뒤틀려서 좆같은 인간이 된 줄 알았는데, 그냥 원래부터 저런 놈이었군.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 리텐슈노프 가문의 가주 자리가 무슨 동네 골목대장 급도 아닌데. 저런 놈이 왕왕 태어나는 건 당연한 거다. 오히려 없으면 그게 신기한 것 아니겠느냐?]

“그건…… 그렇지요. 없으면 이상하죠.”

전생에 아덴이 어떻게든지 기회가 되면 놈을 치워버리려고 한 이유는 아마도 이런 것 때문이겠지.

하긴, 나라도 뒤에서 저런 짓을 하면 소름끼쳐서 가까이 하기 싫을 거다.

내가 경계해야 하는 사람은 내 큰아버지들만이 아니다. 아덴 리텐슈노프도 그렇고, 다른 3세대 리텐슈노프들 또한 결국은 이 가문의 핏줄이다.

‘경쟁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의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건 틀림 없어.’

그런 의미에선 어찌 보면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간 느슨해지던 긴장의 줄을 더욱 꽉 붙들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에르반은 가진 권능이 중간만 갔더라도 아덴을 찍어누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을 위인. 저 또한 내가 찍어눌러야 할 경쟁자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걸물 아니겠느냐? 저런 것도 재능이다, 재능. 무어……. 너도 가진 재능이지만 말이다.]

“……저는 저런 재능 없는데요?”

[사람이 되어서 자꾸 개소리를 입에 담는 건 나쁜 버릇이다. 그것도 어른 앞에서! 얼른 고치는 게 좋을 게야. 그러다가 진짜 개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

데우스의 쓸모없는 경고를 흘려넘기며, 나는 수장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생각보다 일찍 밖으로 나오자, 입구를 지키던 쇠매 기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냥 냄새가 좀 나서요.”

“확실히 수장고가 그렇기는 합니다. 중요한 책들이 가득 차있는 탓에 아무나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넓이도 워낙 넓으니까요. 청소를 하려고 해도 아무도 엄두를 못 내서 그냥 방치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냄새난다고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닙니다. 신경쓰지 마시죠. 아무리 제가 나이가 어려도, 그런 당연한 이치를 모를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송구해서 이걸 어찌…….”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열심히 죄를 고하는 쇠매 기사를 다독여준 뒤, 나는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고의 입구를 나설 무렵이 되자, 잠자코 있던 데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언제쯤 설명해 줄 것이더냐?]

‘무엇을 말입니까?’

[그야…… 아까 네가 먹어치운 책을 말하는 거다. 나는 네가 갑자기 종이를 뜯어서 입에 집어넣길래, 드디어 네 녀석이 돌아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고요?’

[무어, 그건 맞긴 하다만.]

‘그,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가문의 수호룡에게 막말을 하는 네 녀석 말씀이 더 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냐? 이 싸가지 없는 놈.]

‘……수호룡이 자꾸 암컷이 어쩌고 아가씨가 어쩌고 하는 것부터가 제게는 막말입니다, 막말!’

[뭐가 어쩌고 어째? 이 썅놈의 자식이!]

데우스는 내 말에 버럭 화를 내며 한참 동안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대충 이렇게 뭉갤 수밖에 없었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데우스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언젠가는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네 녀석이 아직 코찔찔이라서 그런 거다. 너도 나이가 들고 머리도 좀 벗겨지면 다 나처럼 되게 되있어.]

“에휴.”

* * * * *

그 후.

다시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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