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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21화 (21/139)

21화

그 사이 내 일상은 딱히 변화한 것이 없었다. 언제나 수련동으로 출근했고, 검식과 마나를 훈련했다.

각오한 바와는 다르게, 본가의 형제나 큰아버지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에르반이 수장고에서 본 것을 딱히 본가에 보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당연하지만 그 이후 수장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분명 다른 책들도 회수하긴 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분명, 에르반이 붙인 감시의 눈길이 아직은 남아있을 테니까 말이다.

혹시라도 책을 회수하다가 빼앗기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자유롭게 수장고를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 정식으로 회수하는 게 훨씬 안전하리라.

란체스는 드디어 치료실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붙어있기엔 여러모로 눈치가 보였겠지.’

하긴, 겨우 그 정도 부상을 입은 걸 가지고 몇 달 동안이나 치료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소문에 따르면, 녀석의 엄살 때문에 복귀가 늦어진 아이스본의 치료사가 참다 못해 마그너스에게 직접 보고하겠다고 란체스에게 엄포를 놓았다던가?

덕분에 골골거리던 녀석은 하루 아침만에 완벽하게 나았다. 그 소식을 들은 유아동 소속 하인들은, 모두들 그 치료사의 위대함을 칭송했고 말이다.

‘뭐, 다들 어지간히 체스 형제에게 시달렸어야지.’

하루가 멀다하고 하인을 폭행하는 탓에, 하인들은 누구도 체스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돌아온 뒤로는 깽판을 덜 친다니, 내 인성 교정이 꽤 효과가 있는 듯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세상의 풍경은 바뀌었다.

이파리를 떨어트린 나무들은 앙상하게 헐벗었고, 가끔 눈발이 흩날리는 날에만 흰 옷을 입었다.

더 이상 정원을 드나드는 동물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가을 내내 파놓은 굴 속에 숨어, 추위를 피해 겨울잠을 자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리텐슈노프 가문은 더 팽팽하게 돌아갔다.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무력이 필요해 가문의 문을 두드리는 자는 넘쳐났지만, 이런 혹독한 겨울에도 힘을 제공하는 곳은 다섯 대가문을 제외하면 사실상 없었다.

다른 때라면 중소가문이 맡을 일까지 처리해야하니, 리텐슈노프의 기사에게 겨울은 과로의 계절이었다.

물론 수련동의 수련생들은 그런 업무에서 제외된다.

‘정식으로 임무를 받는 건 열여섯 살 이상부터니까.’

수련생修練生.

아직 제대로 가다듬어지지 않아,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런 녀석들에게 무슨 임무를 맡기겠는가?

하물며 실전 경험도 치러본 적 없는 애들인데?

아무리 리텐슈노프 가문이 명가라고 해도, 그런 짓을 했다가는 명성이 당장에 똥통에 처박힐 거다.

그렇기에, 리텐슈노프 가문에선 수련생들이 실전 경험을 치러보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실전을 겪어본 자와 겪지 않은 자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지.’

중요한 순간에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건,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부족해 벌어지는 일이니까 말이다.

수련동에서 치러지는 실전들이 죄다 겨울에 몰려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차피 겪어야 하는 실전, 최대한 혹독하고 극한의 환경에서 치르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 되니까.

그리고 그것이…….

“에취!”

오늘처럼 얼어죽을 것 같은 날씨에 내가 하급반 종합 평가를 치르기 위해 마차에 타 있는 이유였다.

“콜록 콜록!”

“으 춥다, 추워.”

수련생을 가득 태운 마차의 짐칸은 소란스러웠다.

사방에서 기침 소리와 부스럭대며 옷깃을 여미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대부분의 수련생이 추위에 몸을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수련생에게 주어진 건 오직 한 장의 모포 뿐.

사납게 몰아치는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나 또한 수련동에서 지급한 건 모포 한 장 뿐이었지만, 다른 수련생과 비교하면 입은 옷부터가 달랐다.

추위를 막을 두툼한 코트, 그 위에 덮은 여우 가죽 모피. 얼굴에는 유모가 짜 준 목도리를 두르고 손에는 보온장갑을 꼈다. 당연히 재질은 죄다 최고급이다.

그 상태에서 낡은 모포 한 장을 손에 쥐고 마차 짐칸에 앉아 있으니, 그 꼴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괘, 괘,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춥, 춥지는 않으십니까?”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게 걸렸는지, 앞 자리에 앉아 있던 수련생 하나가 이를 딱딱거리며 물었다.

눈썹은 얼어붙어 새하얗고 얼굴이 창백한 게, 솔직히 나보다 자기 몸부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몰골이었다.

얼굴에 낀 눈발 때문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녀석은 대략 나보다 한 살에서 두 살 정도 많아보였다.

입고 있는 건 리텐슈노프 가문에서 지급하는 보급품. 딱히 뭘 더 껴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틀림 없다.

이 녀석, 빈민 고아 출신이다.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녀석 말고도 보급품 의류를 입은 녀석이 두 명 더 보였다. 그 녀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어느 정도 방한복을 껴입고 있었다.

“……난 괜찮은데, 그쪽은 많이 춥나?”

다시 고개를 돌려 그 수련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움찔 놀라더니, 재빨리 등을 꼿꼿이 펴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하나도 춥지 않습니다!”

“……웃기고 있네. 이빨 딱딱거리는 소리가 뻔히 들리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해.”

난 입고 있는 옷들을 훌렁 훌렁 벗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변에 있는 수련생들이 벙찐 표정이 되었다.

“도, 도련님?”

“받아.”

여우 털가죽으로 된 모피를 내밀자,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 괜찮습니다! 하나도 안 츕습니다!”

“자꾸 개소리를 할 거면 일단 콧물부터 닦고 하시고, 얼른 받기나 해라. 손 아프니까.”

억지로 모피를 녀석에게 떠밀었다. 내친김에 코트와 장갑도 벗어서 다른 두 빈민 출신에게 건네주었다. 털 목도리는 마리 유모가 직접 짜서 내게 선물해 준 것이었기에 넘겨주지는 않았다.

“도련님……!”

황망한 얼굴로 넘겨받은 털가죽과 날 번갈아 쳐다보던 녀석이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가, 감사, 감사합니다! 흑!”

울기라도 하는 건가? 코끝이 빨갛다. 다른 녀석들도 훌쩍거리는 게, 가만 두면 펑펑 울 것 같았다.

……사실 줘도 상관 없어서 준 거다.

‘이번 종합 평가 때, 유난히 날씨가 추웠지.’

이번 하급반 종합 평가를 치르는 겨울은 진짜 역대급으로 추웠다. 무려 50년 만이라던가?

종합 평가 중에 몇 명인가 동사 사고로 죽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도 이때 엄청나게 추위로 고생했었다.

그때의 기억 덕분에 난 사전에 보온 준비를 철저히 했다. 내의를 두 겹 껴입는 건 물론이고, 단기적으로 추위 내성을 올려주는 영약도 몇 개 복용했다. 따로 좋은 모포도 몇 장 챙겨왔다.

그러니 겉옷 몇 개 빌려준다고 추워지진 않는다.

‘애초에 이러려고 가져온 옷이니까.’

오히려 나는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내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마차 안에 있는 모든 수련생들의 머릿속에는 나라는 인간이 제대로 각인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 * * * *

승차감이 최악이었던 마차 여행은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내달린 끝에 마차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드높고 험준한 산 중턱이었다.

아르페리움 산.

고대어로 흰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제국 북부 지방의 명산이었다.

흰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르페리움 산은 사시사철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여 있는 설산이었다.

‘……더럽게 춥네.’

그만큼 어마어마한 혹한으로도 유명했고 말이다.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온 사방이 하얀 빛으로 가득했다. 마치 내가 새하얀 도화지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하지만 그 착각은 고작 1초 만에 사라졌다.

“추, 추, 추, 추워!”

“으윽, 귀가 뜯어질 것 같아!”

“훌쩍!”

빌어먹을, 젠장, 추워도 적당히 추워야지!

아무래도 새 인생을 살다보니 전생에 했던 모든 생고생이 어느 정도 미화가 된 모양이다. 어떻게 아르페리움 산으로 간다는 걸 뻔히 아는데, 입던 옷을 남한테 벗어주겠다는 계획을 짠 거지?

“어우, 씨.”

그나마 나는 종합 평가를 이곳에서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리 준비라도 해 왔으니 좀 추운 거에서 끝났지, 냉기에 직격당한 일부 수련생들은 벌써부터 저체온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모양 이 꼴이니까 얼어죽는 애들이 나오지.’

그래서 전생에 종합 평가를 다녀온 수련생들 사이에서는 이런 소문도 돌았다.

가문의 기사들이 자기들은 과도하게 쌓이는 업무 때문에 개빡세게 구르는데 감히(?) 수련생놈들이 편하게 시험보는 건 아니꼬우니, 앙심을 품고 엿먹으라는 심보로 이런 곳으로 잡았다고 말이다.

물론 그 소문은 당연히 얼토당토 없는 이야기였다.

종합 평가는 언제나 아르페리움 산에서 치러졌고, 이 추위에 고생하는 건 평범한 수련생뿐만이 아니라 리텐슈노프의 혈통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더럽게 춥네. 진짜로.”

무의식적으로 양팔을 쓰다듬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수련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 옷을 껴입은 세 명의 소년 소녀들이 보였다.

이전에 마차에서 내가 옷을 빌려준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안색은 몰라볼 정도로 괜찮아져 있었다. 내 옷을 걸치고 있는 걸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 그들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드레커 도련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곧바로 내게 넙죽 절을 했다. 바닥에 한가득 눈이 쌓여 있던 탓에, 녀석들의 행동이 마치 눈 속에 스스로 파묻히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절 같은 건 안 해도 되는데…….”

절로 떨떠름해졌다.

솔직히 이 세 사람이 날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결과가 나오도록 내가 일부러 유도하기도 했고.

“아, 아닙니다! 오히려 고작 감사 인사밖에 못 드리는 것이 너무나도 죄송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희는 아마도 그날 밤 마차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얼어 죽었을 겁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걸 예상한 것과 실제로 눈앞에서 마주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당황스러웠고, 어째서인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걸 초월할 만큼 기뻤다.

사람을 얻는다는 게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일이었나?

“다들 얼굴 좀 들지? 자꾸 애들이 쳐다보잖아.”

물론, 기쁜 건 기쁜 거고, 이건 이거다.

난 일단 여전히 엎드려 있는 그들을 전부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하는 녀석들의 옷과 얼굴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그래, 일단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다행이네.”

“훌쩍!”

“근데 내가 옷 안 줬어도 너희가 마차에서 얼어 죽지는 않았을 거야. 종합 평가 감독하는 기사들이 얼치기 머저리들도 아닌데, 설마 수련생을 죽게 두겠냐.”

실제로 수련생 이송 중에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생에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마 진짜로 위험할 정도가 되었다면 분명 조치를 취했겠지.

“그, 그렇지만…….”

“진짜로 그렇게 고마우면 통성명이나 좀 하자. 너희는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너희가 누군지, 나이가 몇인지도 모르면…… 뭔가 이상하잖아, 안 그래?”

“죄, 죄송합니다, 도련님. 너무 감사한 나머지…….”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을 소개했다. 한 명씩 손을 들며 눈을 꼭 감은 채 소리치는 것이, 뭔가 귀여웠다.

“저는 안톤이라고 합니다! 열 살입니다!”

“루시엘입니다! 저도 열 살입니다!”

“갈롯입니다, 저도 나이는 같습니다!”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

과거, 아이스본의 한 마법사가 했던 말이 있다.

인생은 운이 70%고, 노력은 고작 30%라고 말이다.

그 말을 진심으로 믿은 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내 인생은 운이 90%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미래의 황금 사자라…….’

차후 소드마스터로 성장하게 되는 수련생들이, 세 명이나 넝쿨째 내 손으로 굴러들어올 줄이야.

……이러면, 계획을 좀 바꿀 필요가 있겠는데.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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