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 누군지 알 거 같아.”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를 물었군.’
올 사람이야 뻔하다.
오늘 아침에 내가 미끼를 던진 녀석.
란체스 파벌 소속인 제이스가 분명하다.
“늦은 시간이니 물릴까요?”
“아냐, 유모.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세르폰과 마리에게 턱짓을 한 뒤, 겉옷을 집어들고 천천히 침실 밖으로 나섰다.
그런 내 뒤를 두 사람이 따라왔다.
침실 밖 복도를 지나, 메인 홀을 거쳐 유아동 입구로 나서자, 새카만 어둠이 나를 반겼다.
그 어둠 틈바구니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바로 제이스였다.
‘흠.’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은 제이스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다른 두 소년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제이스와 함께하기로 한 소년들인 모양이다.
‘생각보다 수완이 좋은 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스.”
“……안녕하십니까, 드레커 도련님.”
제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찾아온 것이지?”
내가 짐짓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제이스는 입술을 살짝 씹더니 천천히 중얼거렸다.
“오전 중에 건네주신 제안에 답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제안?”
“……오늘 아침, 저에게 도련님의 밑으로 들어오시라고 제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내 뒤에 선 세르폰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제이스와 그의 곁에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이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드, 드레커 도련님께서 아침에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편을 정하라고, 박쥐는 필요 없다고 말입니다!”
절박함 가득한 목소리.
이미 나를 섬기기 위해 유아동 앞까지 왔다.
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
그렇기에 여기서 버려진다면 뒤가 없다.
‘이건 진심이군.’
그렇게 판단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나직이 말했다.
“이봐.”
“……?”
“하나 확실히 해 두자고. 그건 내가 네 녀석한테 제안을 한 게 아니야. 네가 나에게 간청한 거고, 그걸 내가 수용한 거지.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넌 내 앞에 서있을 자격이 없어.”
“……!!”
제이스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하나, 곧 제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야해. 그 둘의 차이는 커.”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제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압니다. 하지만 감수하겠습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수하겠다?”
“……네.”
“뒤에 있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가?”
그 말에 제이스의 뒤에 서 있던 두 소년이 서로를 힐끔 돌아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상의 충성 맹세.
이로써 내 파벌을 세 명 확보한 셈이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
내 대답에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나는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이미 제이스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 설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말하지. 나는 박쥐 새끼를 키울 마음이 없다.”
“…….”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 맹세를 하면 뒤는 없다. 만약 너희가 내게서 뒤돌아선다면, 언젠가는 필히 목을 쳐내버릴 거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오늘 내게 찾아온 이상, 앞으로는 다른 중급반 수련생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게 될 거다. 또한, 너희들의 원래 주인이던 란체스는 어떻게든 너희를 죽이려 들겠지.”
그 말에 제이스의 눈이 흔들렸다.
일단 내 부하가 되기 위해 찾아오기는 했지만, 후에 이어질 란체스의 보복이 두려운 모양.
그렇다면 그 마음을 진정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란체스 녀석의 분노는 일차적으로 너희를 훔쳐간 나를 향할 테니까.”
남의 집에서 칼을 훔쳐갔으면, 집 주인이 화를 낼 대상은 훔쳐진 칼이 아니다.
칼 도둑놈이지.
고작 도구에 불과한 이 녀석들보다는, 나에게 향할 분노가 더 클 것이다.
물론 혹시라도 란체스가 병신마냥 ‘도구’에게 성질을 부릴 수도 있다.
녀석들이 그런 걱정을 떨칠 수 있도록 나는 말을 덧붙였다.
“혹, 란체스 놈이 미쳐서 너희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다면 주저 없이 내게 고해라. 당장 놈의 손목을 부러트려 줄 테니까.”
“……!! 알겠습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용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인기척.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창밖으로 나를 바라보는 란체스의 얼굴.
녀석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부들부들 떨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보자.’
어떻게 해야 저 녀석을 더 열받게 할 수 있을까?
결론은 곧 나왔다.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결론은 난 것 같군.”
동시에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놀란 세 사람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렇다면 충성 맹세를 받아볼까?”
그 말에 제이스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네?”
“맹세. 충성 서약 말이야.”
“아…….”
충성 서약.
주군에게 기사가 충성을 다짐할 때 시행하는 전통적인 서약을 뜻했다.
사실상 예식화된, 실질적인 의미는 없는 서약이지만 그것이 가진 뜻은 확실했다.
서약을 한 자는 그걸 받은 자의 사람이 된다는 뜻.
만일 서약을 깨고 배신한다면, 서약을 맺은 자는 엄청난 경멸을 받게 된다.
서약을 깬 자가 주인이든, 종이든 말이다.
설마 이런 걸 시킬 줄은 몰랐다는 듯, 제이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서약을 하면 돌이킬 수 없다.
딱히 어떤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서약이 품은 무게는 무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들은 결심을 내렸다.
어차피 이미 이곳까지 왔다.
이판사판인 셈.
하물며 서약은 하수인에게만 제약이 붙는 것도 아니다.
주인 또한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는 셈.
“서약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가볍게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곧 세 사람이 한 명씩 내 앞으로 기어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명까지 전부 충성 서약을 끝마치자, 나는 힐끔 란체스가 서 있던 창가를 바라보았다.
‘꽤 열받은 모양이군.’
란체스는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죽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는 표정.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충성 서약을 한 이상 세 사람은 드레커 도련님의 직속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드레커 도련님께 누를 끼치지 않게, 몸가짐에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도록.”
나 대신 세 사람에게 경고하는 세르폰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딱히 너희에게 바라는 건 없어. 어차피 오늘 이후로 소문은 다 퍼질 테니, 너희의 효용성은 그것으로 충분해.”
냉혹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세 사람은 모두 내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세 명의 능력은 고만고만한 수준.
실질적으로 내 파벌로서 힘이 되지는 못한다.
허나, 상관없다.
내가 이 녀석들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모두 이뤘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신호탄에 불과하니까.’
내가 중급반 파벌 경쟁에 참전하겠다는 신호탄 말이다.
* * * * *
서걱!
유려한 검격에 수련용 짚단이 반으로 쪼개졌다.
천천히 쓰러지는 짚단 뒤로 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오마르 리텐슈노프는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오늘도 쓸데없는 수련을 하는 중이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건지 난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오마르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자신의 사촌 여동생, 에이미 리텐슈노프의 얼굴이었다.
새초롬한 표정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에이미의 모습에 오마르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 시간에 네가 수련장에 올 리는 없고,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오마르의 따가운 목소리에 에이미가 혀를 쭉 빼어 내밀었다.
“오빠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나도 수련할 때는 수련한다고?”
“…….”
오마르는 가만히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에이미가 칫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흥, 재미없어.”
“재미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오빠는.”
에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람이 재미도 좀 찾고 살아야지. 언제나 수련에만 미쳐 살면 무슨 소용이야? 그것도 재미도 의미도 없는 검술 수련…….”
“시끄러워.”
에이미가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오마르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뭔데.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막내가 사고 쳤어.”
“뭐?”
오마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내?
막내가 사고를 칠 일이 있나?
그보다 어떤 막내를 말하는 거지?
“누구?”
“누구긴 누구야? 드레커 녀석 말하는 거지. 랑느, 고년은 아이스본에 가 있잖아.”
“드레커?”
오마르가 눈을 깜빡였다.
“녀석이 사고를 칠 일이 있나? 중급반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네가 뭔가 잘못 들은 거 아냐?”
오마르가 자신을 의심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에이미는 속 터진다는 듯 가슴을 툭툭 쳤다.
“어휴, 왜 안 믿어? 쳤다니까? 드레커 녀석이 란체스 녀석 파벌을 절반이나 뜯어갔다고.”
그러자 오마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건 막내가 벌써부터 가문의 파벌 싸움에 들어갔다는 소리 아닌가.
“그건…… 확실히 큰 사건이긴 하네.”
“그치?”
“어쩌다가 뜯긴 건데?”
“뭐 뻔하지. 란체스 그 녀석, 평소 버릇 못 고치고 여기 와서도 애들 두들겨 패고 다녔잖아? 자기 파벌 애들도 마찬가지고. 그것 때문에 불만을 품고 튀어나온 것 같던데?”
그 말에 오마르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두들겨 팼기에?”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벌써 충성 서약까지 했다는 걸 보면, 꽤 심각했던 모양이야.”
“허.”
오마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사촌 동생이지만, 진짜 가지가지 하네.”
에이미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이 사건에 오빠는 느끼는 게 뭐 없어?”
“뭘 느껴야 하는데?”
“어휴! 지금 막내 녀석이 이빨을 드러낸 거라고! 근데 아무런 것도 못 느끼는 거야?”
“느낄 것도 없다. 뭘 호들갑이야? 혹시 너도 네 애들 두들겨 패니?”
그 말에 에이미가 황당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뭐? 오빠는 날 뭘로 보는 거야?”
“그거 아니라면 됐지. 뭘 걱정해?”
“…….”
별것 아니라는 태도에 에이미는 입을 콱 다물었다.
‘오빠는 역시 물러.’
머저리 란체스의 파벌이 털리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파벌을 뜯어갔다는 사실이다.
‘그건 언제든지 우리한테도 이빨을 들이댈 수 있다는 소리지.’
에이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빨이 먹히느냐 안 먹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이빨을, 발톱을 자랑했다는 그 사실 자체다.
중급반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발톱을 드러내는 막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막내.
‘원래는 란체스 녀석이 손봐주는 걸 두고 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아무래도, 직접 밟아줘야 할 것 같았다.
에이미의 눈이 번뜩였다.
* * * * *
란체스의 파벌을 내 밑으로 뜯어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파벌을 빼앗긴 란체스가 길길이 날뛸 줄 알았지만, 딱히 별 반응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 사이 치렀던 몇 번의 대련 수업이 란체스의 분노를 조절시켜준 듯했다.
‘12전 12승 0패.’
압도적인 승률, 거기다 이 전적은 13살 수련생도 한 명 쓰러트리고 얻은 것이다.
‘이 정도면 란체스 녀석이 기가 죽을 만도 하지.’
녀석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당연한 일.
‘별일 없으면 좋은 거지.’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오히려 최근 들어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건 란체스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에이미의 파벌이었다.
‘최근 들어서 자꾸 날 감시한단 말이지.’
아무래도 예전에 했던 예상대로 에이미, 그 녀석도 내게 사고를 치려는 모양이다.
뭐,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짓밟아주면 되니까.’
날 노리고 있다는 걸 모른다면 또 모를까.
노린다는 사실도 언제 노릴지도 알고 있는 입장으로서, 내가 할 일은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디데이는 곧 찾아왔다.
“내일 치를 훈련은 몬스터 사냥 훈련이다! 리텐슈노프 본가 외부로 나가는 훈련이니,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바로 외부 훈련.
이 날이.
‘나한테 수작을 부릴 거라면 지금이 적기지.’
디데이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