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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37화 (37/139)

37화

툭.

두툼한 가방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가방을 힐끔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그것이 날아온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염소수염을 턱에 기르고 있는 잘생긴 얼굴의 사내가 서 있었다.

시커먼 징벌기사단의 정복을 입은 채, 팔짱을 낀 멜 랭커스터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멜 랭커스터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한다. 엿 같은 꼬맹아.”

그러자 멜이 곧바로 불만스럽다는 듯, 툭 내뱉었다.

‘허.’

순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을 찡그릴 뻔했다.

‘진짜 막 나가는구만.’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미친개로 소문난 인간이라지만, 리텐슈노프의 혈통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다니.

역시 성격 더럽고 괴팍하기로 유명한 인간다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멜이 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젠장. 꼬맹아, 네가 마그너스 님께 나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며? 대체 무슨 꿍꿍이야? 네가 내 이름은 어디서 들었고?”

나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멜의 언행에 분노한 걸까, 내 뒤에 서 있던 세르폰이 성큼 나섰다.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도련님 앞입니다!”

얼굴을 굳힌 세르폰이 소리쳤다.

그 순간.

콰앙!

엄청난 풍압이 얼굴을 뒤덮었다.

방금까지 옆에 서 있던 세르폰이 순식간에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아이고.’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성격 더러운 인간이라고 미리 말을 해줬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세르폰이 괜히 나섰다가 얻어맞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꼬맹아, 네 멍멍이 교육 안 시켰니?”

한편, 멜은 싸늘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사람이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뒈져.”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병신은 그걸 몰라서 나한테 쳐맞은 거고.”

멜이 주먹을 뚜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까딱였다.

“화를 푸시죠. 제가 따로 주의를 주겠습니다.”

“상황 파악 못 하는 놈을 밑에 두고 있어도 되겠어, 도련님? 이참에 새로 구하는 게 어때? 내가 찾아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나는 지그시 멜을 바라보며 조용히 경고했다.

그러자 멜이 팔짱을 풀었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기세가 몰아쳤다.

“꼬맹아, 혈통 믿고 나대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멜의 눈동자에서 붉은 귀화가 일었다.

“네가 마그너스 님의 손자여도 마찬가지야. 나는 그딴 건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거든.”

엄청난 기세가 몸을 압박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태연한 척 대꾸했다.

“그만큼의 재능이 있다면 그래도 됩니다.”

“재능?”

그 말에 세르폰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순식간에 그가 내뿜던 기세가 사라졌다.

“그래. 그렇게 뻗댈 만큼의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한번 확인해보면 되겠지. 그래서, 내 이름은 대체 어디서 들은 거냐? 중급반 수련생이 알 이름은 아닌데?”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멜의 미간이 좁혀졌다.

“멜 님의 명성이 널리 퍼져 있던데요?”

“하, 명성은 무슨, 악명이겠지. 내 칭찬 하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멜이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자기 찬양하는 소리는 듣기 좋아한다더니, 역시나 그렇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멜이 입을 열었다.

“그래, 꼬맹아. 그럼 내 성격에 대해서도 들었겠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광견병 걸린 미친개라는 소문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

어느 정도 존중하는 수련동 선후배 관계도 다 개무시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믿고 날뛰는 자다.

소문이 좋을 수가 있나.

하지만 굳이 그런 소리는 할 필요 없다.

멜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일단…… 마그너스 님께서 널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으니, 네 스승 역할을 해주기는 해주마. 하지만…….”

멜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내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마그너스 님의 명령이 있든 말든 소꿉장난은 때려치울 거다. 알겠어?”

조금이라도 기대에 못 미치면 스승 역할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겠다는 소리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하던 바다.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자를 스승으로 모시려면, 최소 기준치를 통과하는 성의는 보여야 하는 법이니까.

“알겠다? 너 분명 알겠다고 했다? 나중에 마그너스 님께 찡찡거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

멜이 수염 끝을 매만지며 눈을 부라렸다.

“그럴 일 없습니다.”

애초에 멜의 기준치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 몸뚱이가 가진 바 재능이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미련 없이 다른 스승을 찾는 게 옳다.

어차피 멜이 가르칠 수 있는 건 천재 뿐이니까.

“거, 배짱은 좋군.”

그러한 대답이 의외였던 것일까, 멜의 눈이 빛났다.

곧 멜이 씨익 웃었다.

“좋아, 그럼 간단한 것부터 시작하자고.”

그 말에 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바로 말입니까?”

그러자 멜이 눈을 부라렸다.

“그럼 뭐, 너 맘마 먹는 시간이라도 기다려 주리?”

“아, 아닙니다.”

나는 황급히 멜의 앞으로 달려가 섰다.

그러자 멜은 아까 바닥에 던져둔 가방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열어봐.”

재빨리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가방 안에 든 건, 어디선가 많이 보던 물건이었다.

“납 주머니?”

그것은 바로 납 주머니였다.

납 주머니는 몸에 부착하는 작은 주머니인데, 그 안에 납덩이를 집어넣어 무게를 늘리는 데 사용한다.

이전에 하급반에 있을 때, 내가 마나 적응 연습을 할 때 애용하던 훈련 용품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입어.”

멜이 턱짓으로 납 주머니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는 명령에 내가 눈을 깜빡이자, 멜이 다그쳤다.

“얼른 입어! 해 떨어지겠다.”

“알겠습니다. 한데, 납덩이는 어딨습니까?”

내가 묻자 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납? 미쳤냐? 고작 납 차고 달리려고?”

“네?”

일단 구보를 시키겠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납 주머니에 납덩이를 안 넣으면 뭘 넣어?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멜이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 주머니에 넣을 건 이거다.”

멜은 내 앞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작은 조약돌 같은 물건.

하지만.

콰아앙!

그것은 땅에 부딪치는 순간 어마어마한 굉음을 냈다.

물건의 무게 때문에 땅이 움푹 패였다.

겉보기보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물건이었다.

“중력석이라는 것이다. 안에 마나를 집어넣으면 무식할 정도로 무게를 왕창 늘릴 수 있지.”

“……!!”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곧장 가방 안에 든 주머니의 개수를 확인했다.

“…….”

무려 20개가 넘는 주머니.

대체 얼마나 무게를 늘려서 구보를 시키려는 걸까.

내 얼굴이 실시간으로 창백해지는 걸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지켜보던 멜이 호통을 쳤다.

“얼른 안 입어?”

“알…… 겠습니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주머니를 몸에 찼다.

그러자 멜은 품 속에서 중력석을 꺼내 내 앞에 휙휙 던졌다.

쾅! 콰앙!

총합 20개의 중력석.

“주머니에 넣고, 그리고 뛰어.”

멜이 실실 웃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크윽.”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중력석을 하나 들어 올렸다.

엄청난 무게.

대략 납덩이보다 3배는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이런 걸 스무 개나 차고 달리라고?’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들 정도의 무게였다.

하지만 수행해야 한다.

‘이건 테스트니까.’

이런 별것 아닌 시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제자가 되겠다는 각오 자체를 하면 안 됐다.

그러니.

“흡!”

나는 모든 중력석을 들어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엄청난 무게가 몸을 짓누른다.

하지만 난 그 무게를 견뎌냈다.

“후우!”

그리고는 구보를 시작했다.

느려터진 속도였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고작 이런 시험 때문에 멜에게 교육 받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나는 이를 악물고 연무장을 달렸다.

* * * * *

‘쓸만하군, 근성은 말이야.’

멜 랭커스터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건, 드레커가 막 스무 바퀴째 연무장을 돌았을 때였다.

“허억, 허억!”

드레커는 전신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달리고 있었다.

팔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몸은 비틀비틀 휘청인다.

스무 개의 중력석을 몸에 매달은 채, 연무장을 수십 바퀴나 달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쯤이면 어지간한 성인도 지쳐 쓰러질 텐데…….’

쓰러지지 않더라도 포기했을 무렵이다.

하지만 드레커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고작, 아홉 살 짜리가 말이다.

“흠.”

드레커를 지켜보던 멜은 품속에서 궐련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손가락에 오러를 피워 올려 궐련 끝에 불을 붙인 멜이 가볍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멜이 생각했다.

‘발레르의 아들이라고 했었나? 확실히 아버지를 닮았군.’

발레르 리텐슈노프.

가진 바 재능은 이제 확인해봐야겠지만, 드레커의 충만한 의지는 아버지인 발레르와 흡사했다.

‘그 녀석의 어린 시절이랑 비슷해.’

이제는 가문에서 사라진 발레르를 추억하던 멜은, 어느새 터벅터벅 달리고 있는 드레커에게 버럭 소리쳤다.

“야! 발이 느리다? 그렇게 기어갈 거냐?”

“아닙니다!”

“당장 거북이가 지금부터 기어가도 너보단 빨리 연무장을 돌겠다! 얼른 속도 더 안 내?”

“크으으윽!”

멜의 호통에 드레커는 이를 악물며 발걸음에 힘을 줬다.

곧, 드레커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어쭈?’

멜이 눈을 치켜떴다.

‘여기서 더 속도를 낼 수 있다고?’

놀라운 일.

하지만 멜은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야! 너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으면서 안 한 거였냐? 죽을래?”

그 대신 괴팍한 소리를 지껄였을 뿐.

멜의 고함소리에 드레커가 번뜩 고개를 들며 악을 썼다.

“아닙니다!”

“그럼 빨리 뛰어!”

“예!”

드레커가 다시금 허리를 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멜의 눈이 이체를 띄었다.

‘육체적 재능도 나름 괜찮은 것 같네.’

평범한 성인 남성 수준은 되어야지만 견딜 수 있는 고행이다.

아니, 그들도 지쳐서 반쯤 죽어나가야 할 수준.

그런데 대체 저 어린 몸으로 어떻게 아직도 달리고 있는 건지 기묘할 정도다.

‘재밌네.’

멜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아직 제대로 된 재능을 파악한 건 아니다.

지금까지 평가한 건 고작 근성과 지구력뿐.

아직도 남아 있는 평가 항목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꽤 재밌겠어.’

왠지, 멜은 드레커가 그 모든 평가를 다 통과하고도 살아남을 것 같은 직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가르칠 만한 놈을 찾은 것 같군.

물론 평가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럼…….’

과연 녀석이 몇 바퀴나 뛸 수 있는지 한번 볼까?

멜의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멜의 시험이 끝난 건, 드레커가 연무장을 서른세바퀴째 달리다가 탈진해 쓰러지고 나서였다.

* * * * *

“도련……!”

으음.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유아동의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물수건을 쥐어짜고 있던 마리의 얼굴이 보였다.

“도련님! 깨어나셨군요!”

마리는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하곤,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그녀가 내 이마에 손을 뻗었다.

“드디어 열이 다 내리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열……?”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런 내 모습에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도련님, 아무것도 기억 안 나세요? 연무장에서 달리다가 탈진해서 쓰러지셨잖아요!”

아, 그랬지.

멜의 훈련을 빙자한 정신 나간 괴롭힘을 따르다가 기절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를 여기로 옮긴 건…….

“세르폰은?”

나는 마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르폰은 멜에게 당해서 쓰러졌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옮길 수 없을 텐데?

대체 누가 나를 유아동으로 데려온 거지?

“세르폰 님은 의무실에 있다고 하던데요?”

“의무실? 아니, 그보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그, 염소수염을 하신 기사님이요. 그분이 도련님도 이곳으로 데려오셨어요.”

“멜 경이?”

그가 날 그냥 연무장에 버리고 가지 않았다고?

씨익.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렇다면…….’

그 순간.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며 멜이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깼냐? 깼으면 나와.”

멜은 귀찮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네 스승 역할은 모르겠고, 대충 봐주는 것 정도는 해주지.”

순식간에 안도감이 찾아왔다.

나는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성공이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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