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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44화 (44/139)

44화

“예?”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나는 눈을 찌푸렸다.

멜이 씩 웃었다.

“어쭈? 말 안 들을 거냐? 스승 놀이 여기서 그만둬?”

“…….”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자코 윗옷을 벗었다.

그러자.

“아래도.”

멜이 손가락으로 내 바지를 가리켰다.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대체 뭘 시키시려는 겁니까?”

“잠자코 듣지?”

“…….”

나는 지그시 멜을 노려보다가, 이내 바지도 벗었다.

그제야 멜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전신이 한 덩이로 붙어 있는 옷이었다.

“이건?”

내 질문에 멜이 답했다.

“전신에 마나 스킨을 구현하는 아티팩트다. 하급 낭인들에게는 나름 쓸만한 아티팩트인 것 같더라고.”

“아뇨, 그러니까 이걸 왜?”

멜은 옷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자, 이놈은 원래 외부로 마나 스킨을 만들도록 되어 있어. 하지만 이 녀석은 특별히 반대로 되어 있지.”

“반대로라는 뜻은, 옷 안쪽에 마나 스킨을 만든다는 뜻입니까?”

“그래. 거기에 더불어 몇 가지 처리도 추가되어 있지. 예를 들면…….”

멜이 씩 미소를 지었다.

“마나 스킨을 뚫지 못하면 네 마나가 방출되지 않는 기능이라던가?”

“예?”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이걸 입고 수련하는 거다.”

“…….”

절로 한숨이 나왔다.

멜은 수염을 매만지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봐. 마나 스킨을 뚫지 못하면 마나의 방출이 막힌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

“……마나를 사용하는 기술을 쓰지 못하겠죠.”

“그래. 그걸 뚫으려면 둘 중 하나지. 무식하게 마나를 쑤셔 박아서 마나 스킨을 부수던가, 아니면 내가 만든 비전 내격을 익히던가. 근데, 너는 마나 스킨을 뚫을 정도의 마나를 방출할 수 없잖아? 그러면 당연히 내 기술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밖에.”

“……정말 무식한 수련법이네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멜이 웃었다.

“무식하지만, 효과적이지.”

확실히.

그 말대로 꽤 효과적인 수련법이긴 했다.

어떻게 되었든, 멜의 비전 내격을 익히지 못하면 계속 갑갑하게 마나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앞으로 이걸 입고 일상생활을 하면 되는 건가요? 제가 비전 내격을 익힐 때까지?”

“뭔 소리야?”

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웃기려고 한 소리냐? 무슨 놈의 수련이 그리 밍밍하겠어?”

“그…… 러면?”

멜이 손가락으로 나를 픽 가리켰다.

“그걸 입고.”

“입고……?”

“개고생을 해야지.”

멜이 입가에 악동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오늘 당장, 죽림으로 간다.”

“죽림?”

설마…….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멜이 픽 웃었다.

“그래. 대수림에 있는 ‘에타’ 말이다.”

* * * * *

대수림의 바로 옆에는 거대한 도시가 있다.

대수림을 찾아온 모험가와 용병들이 사냥한 몬스터를 처분하고, 번 돈으로 즐거움을 쫒는 곳.

[향략의 도시 오르피스.]

유흥과 열락의 끝인 오르피스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유곽.

그 최상층의 어떤 연회장 안.

-쨍!

화려한 장식과 조각된 금은으로 꾸며진 연회장에서는 파티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방금 전에 대수림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했는지, 완전무장한 참석자들은 모두 옆구리에 여자를 한 명씩은 낀 채 흥겹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파티의 주인공.

그라힐 리텐슈노프는 술잔 가득히 찬 독주를 찰랑이며 흥겹게 소리쳤다.

“삼 개월 만의 바깥세상이다! 모두 허리띠 풀고 오늘 죽을 각오로 즐겨라!”

“예!”

“자, 그럼! 내가 내리는 이 잔은 누가 마시겠는가!”

“제가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주군! 제가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둘 모두 받아라!”

-와하하!

그라힐은 가득 찬 독주를 두 사람에게 내려주고는, 자신의 곁에서 술을 따르는 여자를 흘낏 바라보았다.

“한 잔 받으시옵소서.”

여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올렸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야릇한 분내음과 교태 넘치는 몸짓에 그라힐의 눈이 번뜩였다.

곧 그라힐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름답군, 이름이?”

“셀리라고 하옵니다.”

“이리 가까이 와 봐라.”

여자가 수줍게 그라힐의 곁으로 다가왔다.

살이 다 비치는 얄팍한 슬립만을 걸친 모습.

“더 가까이, 내 품으로 오거라.”

그라힐의 눈이 정욕으로 번들거렸다.

그 순간.

“주군!”

방금 막 연회장에 들어온 기사 한 명이 그라힐을 불렀다.

“뭐야?”

이제 막 여자를 품에 껴안으려던 그라힐이 짜증스럽게 기사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데?”

기사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저, 그라힐 님께서 찾으시던 정보상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 앞에 와 있습니다.”

그라힐은 곁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여자를 힐끔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술잔에 남은 술을 쭉 들이켰다.

“쯧!”

그라힐이 크게 박수를 한 번 쳤다.

“잠시 파티는 멈춘다. 아가씨들은 다 나가봐.”

그라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썰물이 지듯 여자들이 조용히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그라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이내 기사에게 명령했다.

“정보상을 들여보내.”

“알겠습니다.”

잠시 후, 생쥐처럼 생긴 매부리코의 사내가 한 명 파티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파티장 안에 가득한 사내들의 모습에 움찔했지만, 곧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라힐의 앞으로 다가왔다.

사내를 마주한 그라힐이 술잔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 네가 그 유명한 ‘요정왕의 눈’인가?”

“그렇습니다, 그라힐 님. 요정왕 전하를 모시는 바리스라고 합니다.”

사내, 바리스가 얍삽한 미소를 지었다.

그라힐이 싸늘한 눈으로 바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네 이름 따위는 관심 없어. 중요한 건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가져왔느냐지.”

바리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당연히 가져왔습니다. 네.”

바리스는 조심스레 품속에서 수첩 한 개를 꺼냈다.

수첩을 휙휙 넘기던 바리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일단, 드레커 님의 곁에 붙은 자는 멜 랭커스터입니다.”

“멜 랭커스터? 그게 누구지?”

그라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모르십니까?”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한 반응.

“몰라, 그딴 놈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걸 알아오라고 네놈을 붙인 거 모르겠나?”

그 반응에 기분이 나빠진 그라힐이 으르렁거렸다.

“아,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지요.”

흠칫 놀란 바리스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멜 랭커스터는 징벌기사단의 선임 기수입니다. 꽤 유능하고 강한 자라고 알려져 있더군요.”

“노친네의 지저분한 사냥개 놈이 왜 드레커 녀석에게 붙어 있는데?”

그라힐이 눈을 찌푸렸다.

바리스는 수첩을 힐끔 살피며 말했다.

“멜 랭커스터에게 드레커 님이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걸 보아, 스승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그라힐이 눈을 치켜떴다.

“스승? 그 멜이라는 놈이 얼마나 뛰어나길래?”

“최소 소드마스터 급입니다. 그 이상이라는 정보도 있고요.”

피식.

그라힐이 코웃음을 쳤다.

“지랄. 소드마스터가 흔해 빠진 줄 알아? 노친네가 애새끼한테 소드마스터를 붙여줄 리가 없어. 그건 에르반 형님도 받지 못한 호사라고.”

그라힐이 고개를 저었다.

리텐슈노프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에르반 리텐슈노프조차도 가르침을 받은 스승은 고작 8성 기사였다.

그러니 드레커가 소드마스터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바리스가 말끝을 흐렸다.

분명 그런 정보가 들어온 걸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제 정보는 분명히 사실입니다. 멜 랭커스터는 진짜로 소드마스터가 분명합…….”

“이봐, 자네.”

그 순간 그라힐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곧, 그라힐의 눈동자가 섬뜩히 빛났다.

“지금 그딴 개소리를 내게 정보랍시고 가져온 건가?”

“예?”

“이딴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나보고 믿으라고?”

그라힐이 손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가 손에 쥔 검 끝이 바리스의 목젖을 가리켰다.

바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분명 사실입니다!”

그라힐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곧, 그는 바리스를 데려온 기사를 노려보았다.

“야! 진짜로 이놈이 그년이 아끼는 정보상이 맞아? 어디서 이상한 놈 주워온 건 아니지?”

“요정왕께서 보낸 자가 맞습니다, 그라힐 님.”

“그래?”

그라힐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럼 요정왕, 그년이 지금 나를 엿 먹이는 건가? 이 그라힐 리텐슈노프를?”

일순, 그라힐의 몸에서 마나가 폭발했다.

-와장창!

마나의 파동에 밀려 연회장에 널브러진 술병과 술잔이 바닥으로 쏟아져 산산조각이 났다.

“히, 히익!”

깜짝 놀란 바리스가 몸을 움츠렸다.

그라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네놈의 목을 걸고, 아니지. 네 일가친척의 목을 걸고 장담할 수 있나? 그 구질구질한 사냥개 새끼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스릉!

동시에 그라힐의 검날이 바리스의 목젖에 닿았다.

가볍게 베인 목젖에서 핏물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목을 쳐 버릴 것 같은 기세.

“네, 네! 그렇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러니 제발……!”

하지만 그런 기세에도 바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친 듯이 덜덜 떠는 바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라힐이 휙하고 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목숨을 걸 수 있다, 이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그라힐 님!”

“좋아. 믿어주지. 네놈의 개소리가 아니라, 그 모가지를 말이야.”

그라힐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래서, 그게 끝이야? 그럼 넌 뒈져.”

그 말에 몸을 부르르 떤 바리스가 황급히 말했다.

“더, 더 있습니다! 드레커 님은 오늘부로 저택을 떠나 밖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좋아.”

그라힐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쓸만한 소리가 나오는군.”

자세를 고쳐 앉은 그라힐이 물었다.

“그래, 떠났다고? 녀석이 어디로 가는 중이지?”

바리스는 그라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이, 일단은 오르피스로 향하는 마차를 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동 중인 방향으로 보았을 때, 아무래도 ‘에타’로 향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에타?”

바리스의 말에 연회장에 서 있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그 소란에 그라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부 다 입 닥쳐! 그래. 녀석이 에타로 향한다, 이 말이지?”

“네, 그, 그렇습니다. 그라힐 님.”

바리스가 겁먹은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 에타라.”

그라힐이 소파에 등을 기대어 누웠다.

“이유는?”

“수련이라고 합니다. 이건 확실한 정보입니다.”

“수련? 애새끼가 참 열심히도 하는군.”

그라힐이 빈정거렸다.

“그래서, 수호 기사는 따라가나?”

“아닙니다. 동행하는 것은 오직 멜 랭커스터 뿐입니다.”

“그래?”

그라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수호 기사는 언제나 어린 리텐슈노프의 곁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수호 기사에 필적하거나, 더 강한 자가 리텐슈노프를 수행할 때뿐이다.

‘그 멜이라는 놈이 소드마스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5성은 되겠군.’

그라힐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래서, 낭인은 준비되었나?”

“네, 네. 요정왕께서 직접 선별하셨습니다. 5성 최상위의 실력을 지닌 낭인입니다.”

“좋아.”

그라힐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럼 됐군. 이봐, 고블린.”

“네, 네? 저 말씀입니까?”

“그럼 누구를 부르는 것이겠나? 고블린 놈아.”

그라힐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별명에, 바리스가 속으로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그는 떨리는 몸으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네, 그라힐 님.”

그 모습에 그라힐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었다.

“낭인 놈을 에타로 보내라. 내 귀여운 동생이 대수림에 들어온 걸 환영해 줘야지.”

“알겠습니다. 곧바로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 봐.”

그라힐이 휙휙 손짓을 했다.

그 말에 바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돌아섰다.

그 순간.

“아. 잠시만.”

그라힐이 중얼거렸다.

그 불길한 말에 바리스가 떨리는 눈으로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하마터면 잊을 뻔했지 뭐야.”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라힐이 눈짓을 하자 바리스의 양옆에 서 있던 기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곧바로 우악스러운 손아귀로 바리스의 양팔을 꽉 쥐었다.

깜짝 놀란 바리스가 버둥거렸다.

“그, 그라힐 님?”

“네놈, 눈빛이 마음에 안 들더란 말이지.”

그라힐이 손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라힐의 중얼거림에 바리스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잠시만! 그라힐 님!”

“감히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그라힐 님! 살려주십시오!”

그라힐이 비릿한 미소를 짓자, 기사 한 명이 단검을 빼들었다.

-푸욱!

“끄아아아악!”

곧, 바리스가 얼굴을 부여잡으며 연회장을 굴렀다.

바닥에 흩뿌려진 핏물을 짓밟은 그라힐이 술잔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앞으로 고생할 우리 막내를 위해.”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번뜩이는 술잔, 그것을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며 그라힐이 씩 웃었다.

“건배!”

독한 향초와 술내음으로도 감출 수 없는, 피 냄새 가득한 웃음이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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