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탁탁탁!
푸르디 푸른 죽림 한가운데.
-꾸어어엉!
어떤 소년이 그레이트 판타에게 쫒기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길쭉한 대나무들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피해내며 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무성한 대나무를 마치 수숫대처럼 부러트리며 바짝 쫓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이곳 죽림의 지배자.
그레이트 판타였다.
그레이트 판타는 한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분노에 가득 찬 녀석은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소년을 노려보았다.
-꾸어어엉!
“조금만 더……!”
소년,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그런 그레이트 판타를 되돌아보며 자신이 달려온 거리를 가늠했다.
목표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드레커가 땅을 박차는 다리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고 곧.
“……!!”
드레커의 시야에 허공에 묶여 흔들리는 밧줄이 보였다.
“흡!”
전력을 다해 땅을 내디디며 뛰어오른 드레커가 밧줄을 붙잡고 허공을 날았다.
뒤따라오던 그레이트 판타가 그 모습에 눈을 빛냈다.
-휘익!
녀석은 곧장 지척에 자라난 대나무를 부러트려 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꾸엉!
그레이트 판타의 손에 마나가 깃듬과 동시에, 놈이 쥐고 있던 대나무를 투창하듯 집어던졌다.
-파앙!
가공할 만한 힘!
대나무가 파공음을 내며 드레커에게 날아들었다.
“이크!”
드레커는 그 즉시 몸을 비틀었다.
그와 동시에 대나무가 아슬아슬하게 드레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휘익! 탁!
밧줄을 타고 허공을 활공한 드레커가 저 앞에 착지했다.
일견, 여유롭게도 보이는 그 모습에 그레이트 판타가 열이라도 받은 듯 씩씩거리며 돌진했다.
하지만.
-푸욱!
그레이트 판타가 짓밟은 수풀이 훅 꺼졌다.
-꾸엉?
그레이트 판타가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래봤자 숨겨진 함정에 빠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꾸, 꾸어어어?
순식간에 함정 속으로 추락하게 된 그레이트 판타.
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정 속에는 죽창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꾸어어엉!
그리고.
푸부부북!
구덩이 안에서 북 찢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꾸어어어엉!
죽창에 온몸이 벌집이 된 그레이트 판타가 울부짖었다.
녀석은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을 뚫은 죽창이 더 깊숙이 박힐 뿐이었다.
그 무렵 드레커가 함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흠.”
드레커는 천천히 죽어가는 그레이트 판타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버르적거리던 그레이트 판타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
드레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안으로 던졌다.
그러자.
-꾸아아앙!
죽은 척하던 그레이트 판타가 몸을 비틀어 돌멩이를 후려갈겼다!
-파삭!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진 돌멩이를 확인한 드레커는 가만히 앉아 속으로 시간을 재었다.
30초.
1분.
3분.
그리고 5분.
마침내 그레이트 판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방금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눈알에는 이제 더는 총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죽은 것이다.
“후.”
그제야 드레커가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드레커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꺼내 들었다.
“좋아.”
오늘 저녁밥은 곰 고기다.
드레커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꾸어엉?
어디선가 들려온 울음소리에 드레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한 놈이 더 있을 줄이야.”
함정은 하나밖에 못 만들었는데.
‘……어쩔 수 없지.’
드레커는 힐끔 함정 속에 빠진 그레이트 판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잠시 후.
드레커가 사라진 함정 근처로 그레이트 판타 한 마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트 판타는 함정 속에 빠져 죽은 자신의 동족을 한 번 보더니, 이내 코를 킁킁거렸다.
곧, 묘한 냄새를 맡은 그레이트 판타가 눈을 번뜩였다.
맛있는 냄새.
바로 어린 인간의 냄새였다.
침이 절로 고이게 하는 맛있는 향기는 생각보다 꽤 가까운 곳에서 풍기고 있었다.
그레이트 판타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따악!
손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레이트 판타의 사지가 구겨지며 몸속에 처박혔다.
-꾸에에엑!
그레이트 판타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동시에 허공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내려와 그레이트 판타의 머리 위에 사뿐히 올라섰다.
-꾸, 꾸어엉?
그레이트 판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녀석의 몸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압력의 마나.
태산 같은 마나의 무게에 짓눌린 녀석이 기겁하며 몸뚱이를 꿈틀거렸다.
하지만 사지가 전부 찌그러져 몸 안으로 말려 들어간 상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꾸에에에……
공포에 질린 그레이트 판타의 머리통 위에 털썩 주저앉은 염소 수염의 사내는 궐련을 입에 물며 생각했다.
‘곰 만나면 도망치라고 했더니…….’
그걸 사냥하고 있어?
어지간한 배짱이 아닌 이상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거 정말…….”
미친 놈일세.
피식.
멜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다섯 마리 째…… 인가.”
멜 랭커스터는 궐련 끝에 불을 붙이며 손가락을 꼽았다.
다섯 마리.
10일간 드레커가 이 죽림에서 사냥한 그레이트 판타의 숫자였다.
물론 크게 대단한 성과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레이트 판타가 아무리 죽림의 지배자라지만 결국 본질은 4급 몬스터.
이미 제국 말벌에 바실리스크까지 사냥한 전적이 있는 드레커에게 그레이트 판타는 그다지 어려운 상대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나도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그건 드레커가 정상적인 상태일 때의 이야기다.
현재 드레커는 마나를 봉인 당한 상황.
평범한 9살 어린아이와 다를 것 없는 상태다.
그런 상태인 주제에, 4급 몬스터에게 한 번도 붙잡히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사냥까지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드레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기어코 성공해 냈다.
‘아무리 그 리텐슈노프라는 걸 생각해도 말이지…….’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모습이다.
하물며 그 재능은 어떠한가?
‘겨우 10일 만에 마나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 적응했다.’
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한 번 마나를 다루다가 그것을 봉인 당하면, 여간 어색하고 불편한 게 아니다.
사지가 멀쩡한 채로 살다가, 어느 순간 팔다리를 잃은 느낌과 비슷할까?
절대로 고작 열흘 만에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드레커는 그것에 성공했다.
적응만 했을 뿐이냐?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지만, 드레커는 벌써 어느 정도는 봉인 당한 마나를 조금씩 꺼내서 쓰고 있었다.
아홉 살의 육체로 그레이트 판타의 추격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이 속도라면…….’
아마도 며칠 안 가서 훈련복의 봉인을 뚫어낼 수 있으리라.
‘어처구니가 없군.’
멜이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가르치는 맛이 나는 녀석이군.’
멜의 눈이 반짝였다.
그 순간.
“……음?”
멜의 감각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걸려들었다.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접근하는 누군가.
움직이는 방식을 보았을 때, 평범하게 그레이트 판타를 사냥하러 온 다른 모험가는 아니다.
마차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
멜의 미간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이것 봐라……?”
곧 멜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쥐새끼가 들어왔군.”
-치이익!
-꾸우어엉!
손에 쥔 궐련을 버둥거리는 그레이트 판타의 머리에 비벼 끈 멜이 몸을 일으켰다.
저자가 노리는 게 자신일 리는 없다.
‘날 잡을 생각이었다면…… 이딴 같잖은 놈을 보냈을 리는 없지.’
끽해봐야 5성 정도의 실력자.
절대로 소드마스터를 습격하기 위해 보냈다고 할 수 있는 적은 아니다.
아마도 목표는 드레커겠지.
멜은 고작 그것만으로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다른 리텐슈노프가 드레커를 견제하기 위해 사람을 쓴 것이리라.
“하여간.”
이 집안은 바람 잘 날이 없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쥐새끼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멜이 문득 든 생각에 몸을 멈추었다.
‘흠, 생각해보니 이거…… 나쁘지 않잖아?’
침입한 쥐새끼는 고작 5성 정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라면 멜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드레커의 목숨을 노리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도련님한테는 나름 시련이 되겠지.’
그리고 가해지는 시련이 클수록 드레커가 내격을 깨우치는 속도가 더 빨라질 거다.
거기에 하나 더.
“과연 도련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려나.”
멜이 전해 들은 대로라면, 드레커는 자신에게 덤비는 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설령 그게 자신의 형제일지라도.
오히려 형제이기에 더욱더.
‘어디, 한 번 지켜볼까.’
과연 드레커가 어떻게 이 위기를 대처할지.
기대되었다.
* * * * *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사실을 내가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돌아다니는 그레이트 판타의 수가 확 줄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레이트 판타는 자신의 영역을 철저하게 지키는 놈들.
내가 도지와 함께 죽림을 쏘다니며 제 놈들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는데도 가만히 굴속에 틀어박혀 있을 정도로 신사적인 놈들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뭔가 들어왔군.’
처음에는 멜 때문인 줄 알았다.
현직 소드마스터가 내뿜는 위압감이라면 아무리 호전적인 그레이트 판타라도 겁에 질려 제 굴속으로 숨어 버리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곧 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소드마스터 정도가 되면 기척을 다루는 데 능수능란하다.
실수로 기척을 흘리는 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멜이 일부러 자신의 기척을 드러내 몬스터를 치웠다는 건데, 지금까지의 훈련 방식을 생각해보면 멜이 몬스터를 늘렸으면 늘렸지 줄여줄 리는 없다.
‘다른 모험가가 들어왔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죽림을 찾는 모험가는 대체로 그레이트 판타를 압도하지 못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레이트 판타를 쫒아내려면 최소 5성쯤은 되어야 하는데, 죽림은 그 정도의 실력자들이 올 곳이 아니다.
수지타산이 안 맞으니까.
그리고 내 예상대로.
침입자는 몬스터를 잡으러 들어온 게 아니었다.
‘몬스터 사냥이 목적이었다면 사냥을 해야 하는데…….’
사냥은커녕 뭔가를 한 흔적 자체가 없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것처럼 말이다.
“……허허.”
그 시점에서 상황 파악은 끝났다.
침입자의 목적은 바로 나.
들키지 않으려는 듯, 흔적을 착실히 숨기는 꼴을 볼 때 절대 좋은 이유로 날 찾는 건 아니다.
아마도…… 척살이 목적이리라.
‘벌써부터 견제가 이딴 식으로 들어온다고?’
솔직히 말하면 좀 우습다.
내가 나름 뛰어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벌써부터 죽여버리겠다고 들 정도의 일을 한 적은 없으니까.
‘그걸 볼 때…… 이 새끼를 고용한 게 큰아버지들 쪽은 아니겠군.’
그들이라면 내 곁에 멜이 붙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소드마스터가 호위로 붙어 있는데 5성 따위를 암살자로 보내는 건, 그냥 쓸데없는 인력 낭비에 불과하다.
‘그럼 내 사촌 중 하나라는 소린데…….’
마그너스의 총애가 확실히 내게 뻗치고 있는데도 이런 식으로 과격하게, 앞뒤 분간 안 하고 나올 녀석은 내 사촌 중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라힐 리텐슈노프.’
그 정신 나간 망나니 새끼뿐이다.
마침 상황적으로도 공교롭다.
최근에 놈이 임무를 끝마치고 대수림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곁에 누가 붙어 있는지 알 리가 없지.’
설사 멜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놈의 성격이라면 얕잡아보고 무시할 가능성이 커.’
아마 소드마스터라는 걸 들었어도 믿지 않으리라.
그럼 지금 이 습격이 말이 된다.
의아한 것은 한 가지.
‘너무 무모한 짓 아닌가?’
그라힐이 자신의 수하를 시켜서 나를 암살하면 마그너스에게 그 짓이 안 걸릴 리가 없다.
그라힐이 아무리 망나니 새끼라고 해도 이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놈이 자기 수하를 보냈을 리는 없을 테니, 암살자를 따로 구했다는 건데…….’
그 망나니 새끼가 어디서 사람을 얻었지?
쩝.
‘어차피 상관없다.’
그라힐이 어디서 손을 빌렸는지 확인하는 작업은 지금 이 습격을 막고 나서 시작해도 충분하니까.
나는 미스틸테인을 꽉 움켜쥔 채 바람에 흔들리는 죽림을 노려보았다.
‘그라힐…….’
벌써부터 날 건드린 걸, 후회하게 해주마.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