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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48화 (48/139)

48화

내 중얼거림에 멜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주인 얼굴? 누구, 짐작가는 사람은 있냐?”

내가 죽인 자가 요정족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는 멜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요정족을 부려서 날 공격한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냐는 의미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래?”

멜은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다시 질문했다.

“그럼, 누가 했는지는 알았고. 대처는 어떻게?”

대처?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받은 게 있으면 돌려주는 건 당연한 법.

그라힐이 내 뒤통수를 노렸으니, 나 또한 반격 정도는 해줘야 셈이 맞는다.

하지만.

‘현 시점에 녀석이 요정 놈들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다.’

가진 것은 오로지 심증 뿐.

당연히 당장 물증을 찾을 방법은 없다.

그나마 증거로 쓸만한 건 이번 암살을 주도한 자의 자백인데, 이 광신도 집단의 입에서 그런 증언 따위가 나올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오대 명가인 리텐슈노프의 직계 혈통을 건드렸다. 그 죄가 가벼울 리가 있겠는가?

당장 리텐슈노프 본가에서 군대를 끌고 와 깽판을 쳐도 할 말이 없다.

멜이 이번 암살 시도에도 천하태평한 건 그 성격이 특이하기 때문이지, 만약 멜이 아닌 세르폰이었다면 당장이고 범인을 찾아서 절멸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을 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놈들은 요정왕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녀석들이다.

‘어떤 고문을 해도 자백할 리가 없어.’

그러니 사실상 그라힐이 암살을 시도했다는 증거는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경쟁을 이유로 되갚아 주기에도…….’

딱히 명분이 없다.

당장 나와 그라힐의 접점은 없는 셈이니까.

결국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암살자를 보낸 요정족을 치는 것 뿐이지.’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필 요정족이라니.’

나는 입술을 씹었다.

요정족은 생각 외로 만만한 집단이 아니다.

애초에 그 녀석들이 별 볼일 없는 놈들이었다면, 그딴 식으로 인종차별이 일상인 녀석들이 아직까지도 멀쩡히 그 세력을 유지할 리가 없다.

당연히 오대 명가와 견주기에는 한참은 모자라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무시하기에는 매우 거대한 세력.

‘나 혼자서 처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당장 요정족을 응징할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멜, 그리고 가문.’

현직 최상위 소드마스터인 멜을 이용하던가, 아니면 리텐슈노프 가문의 힘을 끌어오던가.

나는 곁에 선 멜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내 시선에 담긴 뜻을 읽은 걸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늘, 멜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중얼거렸다.

“나는 네 보모가 아냐. 귀찮은 일은 사절이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럼 계속 입 닥치고 있어.”

“…….”

이런 꼴이니, 멜의 도움을 받는 건 기각이다.

‘그렇다고 가문의 힘을 끌어오자니…….’

애매하다.

일단 리텐슈노프의 기사를 불러오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장 리텐슈노프 혈통을 노린 암살이 있었으니, 가문 차원에서 이 사건에 대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마그너스 또한 이번 사건에서 가문의 기사를 끌어다 쓰는 것을 문제삼지 않겠지.

‘하나.’

그 방식은 너무나 무난하다.

지극히 평범하고 간단해서, 이런 상황에 빠진 리텐슈노프 중 어느 누구라도 취할 수 있는 행동에 불과하다.

가주를 목표로 삼은 자가 취할 방식이 아니다.

‘물론, 고작 이런 걸로 마그너스가 내 평가를 깎을 리는 없지만…….’

만일, 반대로 이번 사건을 내 힘만으로 해결한다면?

‘분명, 마그너스는 기뻐하겠지.’

그 시점부터 나는 범인凡人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이 내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최대한 내 힘만으로 해결하고 싶다.’

그를 통해.

마그너스의 총애를 더욱 더 독차지하고 싶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 * * * *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계획이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 보는 수밖에.’

나는 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네. 요정왕의 눈이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요정왕의 눈, 바리스.

그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리스는 요정왕의 최측근 중 한 명이다.

본인이 가진 무력은 보잘것없지만, 머리가 좋은 덕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자.

그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대수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요정족에게 요정왕의 명령을 하달하고, 요정족이 진행하는 사업을 총괄하며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 요정왕 대신 외부와의 교류도 도맡아 한다.

하는 짓만 보면 요정왕의 손발이라고 별명을 바꿔야 하지 않나 싶은 인간.

‘이놈이 그라힐과 요정왕의 연결고리지.’

현 시점에 그라힐이 내 암살을 요정왕에게 의뢰했다면, 분명 바리스의 손을 거쳤을 것이다.

그러니.

‘이놈을 이용해서 두 년놈에게 엿을 먹인다.’

계획은 이렇다.

바리스의 목을 벤 뒤, 그 머리를 그대로 그라힐에게 선물한다.

요정왕의 수족을 날려버리는 것과 동시에, 그라힐에게 은근한 경고를 보내주는 것이다.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고 말이지.’

단지 암살 시도 뿐만이 아니라, 그라힐과 요정왕의 커넥션 부분도 알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잘린 바리스의 머리통을 받아들었을 때, 그라힐이 지을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요정왕의 수하? 그놈을 찾는다고?”

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 녀석이 아마 실행 주체일 겁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요정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니, 그 수족이라도 날려서 죄를 갈음해야죠.”

“그래? 그럼 찾던가. 열심히 해 보라고.”

그렇게 대답하며 귀를 후비적거리는 멜.

나는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멜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뭘 봐? 난 안 도와준다니까? 귀찮은 일은 사절이라고. 그리고 굳이 내가 널 도와야 할 이유가 있나?”

“이유는 만들면 되는 법이죠.”

“이유를 만든다고?”

내 대답이 흥미로웠는지, 멜이 내 쪽으로 상체를 살짝 숙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하시죠. 저와 내기를 하는 겁니다.”

“내기?”

“네. 만일 그 내기에서 제가 승리한다면, 이번 일을 도와주십시오.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저 바리스를 제 앞으로 끌고 와 주시면 됩니다.”

지금 바리스를 치려면 최소한의 무력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세력은 미약하다.

세르폰을 소환한다고 해도 요정족 실력자들의 철저한 보호를 받고 있을 게 뻔한 요정왕의 눈을 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멜이라면?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이 없을 뿐이지, 요정왕을 죽이는 것도 멜에게는 식은 스프 먹기다.

물론 그 이후 사태를 수습하는 건 힘들겠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거다.

“내기, 내기라…….”

멜이 염소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만역 여기서 멜이 거부한다면, 계획이 좀 꼬인다.

물론 다른 방법도 생각해 둔 것이 있지만, 최대한 일을 깔끔하게 해결하려면 여기서 멜을 꼬드기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멜은 내 제안에 흥미가 생긴 모양이다.

곧, 멜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기면?”

“네?”

“내기라고 했잖아? 그럼 너도 무언가를 저울의 반대편에 올려야 하지 않겠냐? 너는 뭘 걸 건데?”

“뭐든지.”

내 대답에 멜이 품 속에서 궐련을 꺼냈다.

손끝으로 궐련에 불을 붙인 멜이 깊게 연기를 빨아들인 후,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아. 그 제안, 받아주지.”

“저는 뭘 걸면 됩니까?”

“글쎄, 그건 생각해보고…… 내기 주제는 뭐냐?”

“비전 내격을 익히는 것은 어떻습니까?”

“뭐?”

내 대답이 우스웠는지, 멜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딴 내기가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거냐? 너는 너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것 같은데, 어차피 네 재능이면 그까짓 건 충분히 익히고도 남거든?”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추가하죠.”

“시간?”

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손가락을 세 개 펴서 멜에게 보여주었다.

“제한 시간은 앞으로 3일. 그 안에 비전 내격을 익히는 데 성공한다면 제 승리. 만약 실패한다면 멜 경의 승리입니다.”

“흠.”

내 선언에 멜이 입을 꾹 다물었다.

3일.

애매한 시간이다.

내가 이 숲에 들어온 건 오늘부로 11일 차.

앞으로 3일 후라면 고작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멜의 비전 내격을 익히는 데 성공하겠다는 소리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겠지.’

물론 내가 내기에서 이긴다고 해도 멜이 피해를 보는 건 없다.

요정왕의 눈이고 나발이고, 그런 녀석 한 둘쯤 죽이는 건 멜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물론 그의 자존심에는 좀 흠집이 날 태지만…….

‘멜의 성격 상, 거절할 리가 없다.’

그리고 역시나.

“좋아, 받아들이지.”

내 예상대로, 멜은 제안을 수락했다.

‘성공이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멜이 이런 제안을 안 받을 리가 없지.’

여기까지 오면 이 다음부터는 쉽다.

“앞으로 3일이야. 덜도 더도 없어. 그 안에 무조건…….”

팔짱을 낀 채, 근엄하게 선언하는 멜의 눈앞에서 미스틸테인을 뽑아들어 오러를 내뿜어 보이기만 하면 끝이다.

“…….”

순식간에 눈앞에서 벌어진 사태에 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훈련법을 고안한 멜이라면 지금 내가 오러를 뽑아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리가 없다.

나는 여유 가득한 손짓으로 오러가 서린 검을 땅바닥에 꽂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이겼지요?”

그렇다.

나는 이미 멜의 비전 내격을 익힌 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암살자의 존재를 파악한 어제 무렵에 기술을 익혔다.

혹시라도 암살자가 훈련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굳이 티를 내지 않았던 것 뿐이다.

물론 암살자는 그딴 건 몰랐던 모양이지만…….

“너…….”

덕분에 내기에서 이겼으니 됐다.

“3일 안에 성공했네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쥐방울 만한 꼬맹이가, 완전 사기꾼이 따로 없구만.”

“사기라뇨? 이게 사기는 아니잖습니까?”

그저 정보의 우위를 이용한 것 뿐이다.

‘그러게,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았어야지.’

나는 허탈해하는 멜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찌되었든, 약속. 지키시죠.”

* * * * *

오르피스 고급 유곽의 연회장.

향략의 열기로 가득해야 할 실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연회의 흥을 돋우는 여자도 없고, 술잔도 오가지 않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축제 분위기였던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그 이유?

간단했다.

“하, 어이가 없군.”

연회장 주인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라힐 리텐슈노프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네모난 상자를 노려보았다.

파티 도중에 그라힐에게 배달된 상자.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누군가의 머리였다.

그라힐은 이 머리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야 모를 수가 없다.

금기나 다름없는 혈족의 암살을 지시하면서, 자신이 직접 눈도 한 쪽 뽑아주었으니까 말이다.

“되돌려 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라힐이 침묵하자, 그의 곁에 서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언제나 미쳐 날뛰던 주인의 침묵은, 오히려 광분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그라힐은 퍼렇게 변색된 바리스의 머리통에서 시선을 옮겨, 상자를 가져온 수하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수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라힐은 부릅뜬 눈으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지금 당장, 막내에게 전해라.”

“예, 예!”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다. 곧 찾아간다, 고.”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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