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어머.”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아멜리아 아이스본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짧게나마 내비친 마음의 동요는, 곧 살포시 피어오른 눈웃음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멜리아.
그 순수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선 한 줌의 의혹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자꾸 파고들려 하는군.’
보기 좋게 반달로 휜 그녀의 눈.
그 속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심해의 괴물은 지금도 내 속내를 파헤치기 위해 열심히 꿈틀거리고 있을 터.
‘짜증나네.’
남에게 속내를 들키는 것 만큼 불쾌한 게 없다.
심지어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딱히 막을 방도가 없다면 더욱 더.
‘이미 눈을 마주쳤으니…….’
알았다면 모를까, 지금은 방도가 없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줄이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전생의 내가 아멜리아를 마주한 건 그녀가 가주 자리에 오른 이후였다.
그렇기에 내가 기억하는 아멜리아 아이스본이라는 여자는 빙하처럼 차갑고 눈보라처럼 냉혹했던 군주 시절의 모습 뿐이다.
‘심지어 머리색부터 다르다고.’
아멜리아는 칙칙한 회색빛의 머리칼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에 은발일 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짜증이 났지만, 일단 침착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지.”
굳이 민감한 이야기를 연회장에서 할 필요가 없다. 아멜리아 또한 내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성큼성큼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아멜리아 또한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연회장 밖에는 널찍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적당히 한적해 보이는 분수대로 향했다.
분수대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노골적으로 훑듯이 나를 살펴보는 아멜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나한테 접근한 목적을 말해.”
내 물음에 아멜리아는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아까 말했잖아?”
“협력?”
절로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협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번 교류전은 타인과 협력할 이유가 없다.
즉, 거짓말이다.
절로 목소리가 낮아졌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생각보다 입이 험하네? 생긴 것만 보면 전혀 그런 단어를 쓸 것 같은 인상은 아닌데.”
“쓸데 없는 소리도 지껄이지 말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아멜리아가 싱긋 웃었다.
“미안, 하지만 방금 한 말은 진심이야.”
“협력하자는 게 진심이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음. 그거 말고도 하나 더 있잖아?”
뭔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내가 눈을 치켜뜰 무렵, 아멜리아는 분수대를 살짝 살피더니 이내 내가 입은 셔츠 주머니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내가 아니다.
“하, 어이가 없네.”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셔츠 앞주머니에 끼워 둔 손수건을 꺼내 분수대의 턱에 펼쳐서 깔아주었다.
그제야 아멜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손수건을 깔아 둔 자리에 살포시 걸터 앉았다.
곧 그녀가 가볍게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협력하자는 말은 진심이야.”
“내가 너를 믿을 이유가 없다는 건 차치하고, 기본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협력을 말하는 거지?”
“그야 이번 교류전을 말하는 거겠지?”
“뭐? 아니 아까부터 무슨…….”
절로 짜증이 치솟을 무렵, 나는 계속 이야기가 헛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만.’
그 즉시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이야기가 왜 헛돌고 있지?’
침착하게 생각하자.
현 상황을 짧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하나. 아멜리아 아이스본은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 아멜리아 아이스본은 이번 교류전의 협력을 위해 편지를 미끼로 나에게 접근했다.
하나. 아멜리아 아이스본이 내게 접근한 이유는 내 생각을 읽고 이번 교류전에서 나와 협력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거, 말이 안 되는데.’
나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띈 채 의기양양하고 있는 아멜리아와 슬그머니 시선을 마주했다.
‘전생의 아멜리아 아이스본은 타인의 생각을 거의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약간의 과정을 더 거치면, 그 사람이 가진 과거의 기억까지도 뽑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아멜리아는 이번 교류전이 개인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일단 겉으로 드러난 정보로 판단한다면, 그녀는 교류전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모른다.
‘그렇다는 건…….’
나는 아멜리아의 푸른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속에 숨어 있는 괴물과 마주하기 위해서였다.
‘생각보다…… 예쁜 눈이네.’
문득 든 쓸데없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내며, 나는 눈동자라는 심해에 숨은 괴물을 살폈다.
그리고.
‘그런가…….’
깨달았다.
왜 이야기가 엇나가고 있는지를.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생각했던 게 맞았네.”
“응?”
아멜리아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아직 ‘눈’의 개화가 완벽하게 안 끝났지?”
그제야.
영원히 평온할 것 같던 아멜리아의 표정에 금이 갔다.
* * * * *
“…….”
분수대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아멜리아 아이스본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에휴.”
아멜리아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곧, 그녀가 분수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내 앞에 섰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아멜리아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는 내 ‘눈’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은 없었단 말이야? 내가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고. 그럼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리는 없잖아? 그런데 나는 네가 의심할 거리를 던져준 기억은 없단 말이지…….”
아멜리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눈을 반짝였다.
“아! 혹시 너도…….”
“미안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은 안 가지고 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내가 여기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그녀가 당장 진실을 알아낼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다.
‘어차피 능력은 개화하게 되어 있다. 그럼 나중에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쯤은 간파하겠지.’
물론 그녀의 꿰뚫는 눈을 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하면 그녀가 정확한 내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나중에나 가능한 일.
‘아멜리아의 개화가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당장 그게 내일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빠르게 개화를 끝마칠 리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괜한 거짓말을 했다가 관심을 사면 곤란해.’
어중간하게 넘어갔다가 온전히 개화가 끝난 아멜리아와 아무런 대비 없이 마주하게 된다면 일이 꼬인다.
‘회귀나, 빙의에 대한 비밀을 들킬 지도 몰라.’
내 전생에 관한 정보는 앞으로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알아낸 거야?”
아멜리아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그보다 내 생각을 읽은 것부터 사과하지? 내가 혹시라도 몰랐다면 상관 없겠지만, 난 알고 있잖아?”
“어?”
“사과부터, 이야기는 그 다음에.”
내 단호한 대답에 아멜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음.”
표정을 보니 약간 시무룩해 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는 그 모습을 믿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20년 넘게 숨긴 여자다.’
어지간한 연기 실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지금 내게 보여주는 모습도 연기일지 모른다.
‘소름끼치는 일이지만,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크고.’
그렇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사과할게. 너 몰래 생각을 읽어서 미안해.”
이것 보라.
보통 이 나잇대 애들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들켰을 때, 사과라는 것을 하던가? 그것도 언제나 고귀하게 떠받들어진, 큰 명가 출신이?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분명히 속아 넘어갔을 거다.
“그래, 사과. 받아들이지.”
“그럼 이제…… 알려줄래?”
그녀는 그렇게 물으며 눈을 치켜떴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내가 말해줄 이유가 있나? 딱히 얻는 것도 없는데.”
“얻는 게 없다고? 아까 말했잖아. 기억 안…….”
순간 말 끝을 흐리던 아멜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이번 교류전, 개인전이구나?”
“……!!”
순간적으로 그녀가 내뱉은 추리에 흠칫 놀랐지만, 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하지만 그녀는 내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은 채,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떠들었다.
“그래서였구나? 내가, 네 속내를 읽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이유가. 그러네. 내가 실수했어. 음, 아니다. 그렇다기엔 너무 정확하게 맞췄는데? 여전히 이해가 안 되네.”
“…….”
내가 침묵하자, 아멜리아는 아쉽다는 듯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두드려 댔다.
“아아, 모르겠네. 정보가 너무 부족해. 아직까지 다른 사람 생각은 확실히 읽지 못하겠거든. 뭐라고 해야할까, 생각을 단어 뭉치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해야하나?”
“그러냐.”
“그래. 참 아쉬운 일이야. 그런데…….”
순간, 아멜리아가 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나와 마주쳤다.
마치 어둡고 깊은 심해와 마주하는 기분.
잠시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저 심연 속으로 떨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생각보다…… 마주할 만 한데.’
어째서일까, 그 심해가 생각보다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빠져드는 것 같긴 한데, 그렇게 깊은 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약간 발목 정도만 물에 잠긴 느낌?
그리고 그 감각을 뒷받침하는 듯이.
아멜리아는 놀라운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너는 그 단어 뭉치도 잘 읽기 힘들더라고.”
“…….”
“왜 그럴까? 대체 이유가 뭘까? 너는 혹시 알겠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무슨 뜻일까?
‘장난…… 은 아니겠지.’
그저 아멜리아가 나를 놀리거나 속이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만, 방금 내가 느낀 묘한 감각이 어째서인지 마음에 걸린다.
‘아멜리아가 내 생각을…… 읽기 힘들어 한다?’
물론 아예 못 읽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숨겨둔 편지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을 타인보다 읽기 힘들어 할 가능성은 있다.
‘용의 심장.’
지금은 연결이 흐릿해지고 있다지만, 나는 상상 속의 존재인 드래곤과 연결된 상태기 때문이다.
아무리 괴이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아멜리아 아이스본이라지만, 그 본질은 결국은 인간이다.
심장에 드래곤의 격을 품고 있는 나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거, 생각보다 데우스 덕을 많이 받네.’
내 심장에 똬리를 튼 변태 꼰대 드래곤은 연결이 흐릿한 지금도 예상외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아아, 모르겠다.”
그 순간, 아멜리아가 투덜거렸다.
“네가 그 이유를 아는지도 모르겠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어차피 알려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시간 낭비만 했네. 아, 바보 같아. 짜증나.”
“이쪽도 시간 낭비 한 건 마찬가지야.”
지금이라도 얼른 연회장으로 돌아가서 편지를 찾아야 한다.
“그럼 볼일은 끝났으니, 난 간다.”
꽤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이미 몇 놈은 편지를 찾아 유적으로 향했을 지도 모른다. 얼른 움직여야 한다.
“아, 잠시만.”
그 순간, 아멜리아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나?’
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아멜리아가 뜬금없이 주먹 쥔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뭐야?”
“받아.”
얼떨결에 손바닥을 펼치자, 그녀가 내 손 위에 쥐고 있던 것을 툭 떨어트렸다.
그것은 곱게 접힌 편지였다.
“……무슨 의도지?”
나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난 하나 더 있거든. 남는 거 주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아멜리아는 또 하나의 편지를 손 끝에 끼운 채 흔들어 보였다.
“이걸 주는 의도가 뭐냐고.”
“글쎄? 내가 네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 시켜서? 네가 잘생겨서? 아니면 신사답게 손수건을 깔아줘서?”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중얼거리던 그녀가 곧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그녀는 미소가 가득한 눈으로 살갑게 웃었다.
“일단은, 그래. 흥미로워서. 응. 그걸로 해두자.”
“…….”
“그러니까, 나중에 또 만나면 모른 척 하지 말라고. 알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편지를 지도로 교환한 뒤, 곧장 유적으로 출발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