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수련동.
개인 훈련실 구역.
오마르 리텐슈노프는 사색에 빠진 채 훈련실로 가득 찬 길고 긴 복도를 조용히 걷고 있었다.
“교류전 수석 우승이라…….”
언제나처럼 오른손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 위에 올려둔 채, 다른 한 손으로 입술을 살짝 매만지던 오마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역시, 가주님께서 막내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있었어.”
교류전 수석 우승.
굉장히 흥미로운 기록이다.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혹자는 말할 거다. 매 회차 수석이 나오는 행사에서 우승한 게 어째서 대단한 일이냐고. 하지만 그건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나 할 소리다.
‘근 몇 회차 동안 리텐슈노프에서는 수석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었으니까…….’
행운의 여신에게 밉보이기라도 한 걸까?
리텐슈노프는 계속 교류전에서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언제나 우승의 영광은 다른 명가의 것이었다.
심지어 리텐슈노프가 주최했던 교류전에서조차도 말이다!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야.’
그저 오마르만 그렇게 여기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리텐슈노프들, 그리고 리텐슈노프에 소속된 자들이 그러한 현실을 수치로 여겼다.
자신들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도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했다니,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그런 만큼.
드레커가 이루어 낸 교류전 수석이라는 성과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이어진 리텐슈노프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덧칠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히려 당장 없는 가치라도 만들어서 덧붙여야 될 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모두의 관심이 막내 녀석에게 몰릴 테지.’
지금까지는 가주, 마그너스만이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가문을 떠받치는 기둥들 또한 드레커를 주시하게 될 거다. 모두에게 소외받고, 무시받던 막내가 실질적인 경쟁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는 거다.
‘한동안 가문이 시끄러워지겠군.’
드레커를 두고 엄청난 이합집산이 펼쳐질 테니까.
물론 오마르는 그런 현실에 어떠한 감상도 품지 않았다.
경쟁자? 되라고 하지.
가주의 관심? 그게 어쨌다는 거냐.
‘리텐슈노프는 강자존이다.’
강한 자는 존중받고, 약자는 먹힐 뿐이다.
‘막내가 나보다 강하다면, 당연히 나보다 더욱 더 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거야.’
에이미나, 란체스가 하는 것처럼 굳이 지저분한 수작을 부려서 앞길을 막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가주라는 건 애초에 그런 수작질을 부린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가주 직위에 오른다?
그거야말로 가문을 말아먹는 짓 아닌가?
‘그럴 시간에 내 힘을 갈고 닦는 게 나아.’
지금 오마르가 드레커의 개인 훈련실로 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교류전 수석을 달성할 정도라면…….’
최소한 자신과 비슷한 선까지는 올라섰다는 소리다.
그리고 현재 중급반에는 오마르와 견줄 만한 실력을 지닌 수련생이 없었다. 비슷한 나잇대의 실력자와 겨뤄 볼 기회가 없었다는 거다.
그리고 오마르는 여전히 자신이 2성에서 정체되어 있는 게 그런 경험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막내와 검을 섞어 본다면…….”
3성으로 올라설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른다.
설사 얻지 못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좋아.”
오마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복도를 나아갔다.
잠시 후.
오마르의 시야에 드레커의 개인 훈련실이 들어왔다.
실내에서 격하게 대련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복도에서도 금속끼리 부딪치며 나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오마르는 곧장 훈련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훈련실 입구에 서 있던 누군가가 오마르의 앞길을 막았다.
“저, 송구합니다만 지금은 드레커 도련님께서 훈련중이시라, 출입을 금하셔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응?”
오마르는 자신을 가로막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분명 이름이 세르폰…… 이었던가?’
막내의 수호 기사이자, 스승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했더라?
“막내가 지금 안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오마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물음에 세르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식은땀을 흘리는 게 몸이 좀 아파 보였다.
“네, 지금 도련님께서는 훈련에 집중하고 있으신 터라…… 송구합니다. 혹시 용무가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따로 도련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찌 보면 무례하다고 볼 수 있는 발언이었다.
성격이 배배 꼬인 란체스였다면 당장 따귀를 올려붙였을 정도.
하나, 오마르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훈련 중이라면 방해할 수는 없죠.”
오히려 다짜고짜 찾아온 게 무례한 것 아닌가. 그것도 훈련 중이라면,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내가 왔었다고 전달해주시죠.”
그제야 세르폰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한데, 소리를 들어보니 대련 중인 거 같은데. 누구와 하고 있는 겁니까?”
“예?”
“세르폰 경은 밖에 나와 있고, 원래 스승이었던 멜 경은 임무 때문에 잠시 떠났다고 하던데……. 그럼 지금 막내는 누구와 대련 중인 겁니까?”
“어, 그…… 그건…….”
오마르의 추궁에 갑자기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한 세르폰. 뭔가 수상쩍은 모양새였지만, 오마르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새로운 스승이라도 구한 건가? 그렇다기엔 따로 들은 건 없는데……. 뭐, 하여튼 알겠습니다. 막내에게 제가 찾아왔었다고 전달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 하하. 하. 그, 그렇죠……. 새로운 스승…… 일단 알겠, 습니다.”
세르폰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오마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세르폰의 수상쩍은 모습은 오마르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끽해봤자, 드레커가 자신의 새로운 스승을 남들에게 숨기려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오마르는 깨닫지 못했다.
실내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 분량의 기감이, 거의 완벽하게 서로 똑같았다는 사실을.
* * * * *
미스틸테인을 휘둘러 검신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후우!”
그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 끝에는 뱃가죽에서 핏물을 흘리는 또다른 ‘나’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31전 31승인가. 역시 분신은 분신이군.”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건지, 반대편에 서 있는 도플갱어가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31전 31승.
그건 내가 도플갱어에게 치명상을 입힌 숫자였다.
도플갱어의 브로치로 소환한 나의 분신은 지금까지 31번이나 내 검격에 목숨을 잃었다는 거다.
나름대로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도플갱어인 만큼, 내 무자비한 손속에 치를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뭘 봐?”
내가 피식 비웃자, 녀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에도 놈은 반항하지 못한다.
브로치의 주인으로 인식되었다는 건, 그런 뜻이다.
“…….”
도플갱어가 문득 얼굴을 찡그렸다. 곧 녀석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체력의 한계에 도달한 거다.
조금 지나면 소환이 해제되리라.
그 순간.
“도, 도련님.”
벌컥하고 개인 훈련실의 문이 열리며, 세르폰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르폰은 바닥에 쓰러진 도플갱어를 보곤 움찔 놀라더니, 곧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 방금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르폰이 조심스레 훈련실 문을 닫고 내게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일단 돌려보내기는 했는데…….”
세르폰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세르폰은 계속해서 바닥에 쓰러진 도플갱어를 힐끔거렸다. 저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굉장히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나는 손을 튕기며 세르폰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누가 찾아왔습니까?”
“오마르 리텐슈노프 도련님이십니다.”
“오마르?”
의아한 일이다. 오마르가 날 찾아왔다고?
“딱히 오마르 형님과는 접점이 없는데……. 혹시 왜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오마르는 웃기지도 않는 파벌 놀이에 심취하지도, 그렇다고 가주 자리에 쓸데없이 집착하거나 과욕을 부리는 녀석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가 성장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성격인 터라, 딱히 나와 트러블이 생길 일이 없다.
‘그런데 오마르가 날 찾아왔다. 그것도 내가 교류전 수석 우승을 했다는 정보가 가문에 퍼진 뒤에…….’
그렇다면 분명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대련.’
성장제일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오마르 리텐슈노프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다.
그리고 세르폰의 추측 또한 나와 같았다.
“아무래도, 소문을 듣고 흥미가 생기신 것 같습니다. 도련님과 검을 겨루어 보고 싶으신 게 아닐까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렵의 오마르는 아직 2성에 정체되어 있을 터.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자신의 현 상황을 타파할 방법으로 나와의 대련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자, 어떻게 할까.’
나는 미스틸테인의 검 끝을 살피며 생각에 빠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 끝이 반짝인다.
‘오마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분명 진짜다.’
솔직히 고작 한 두 번의 대련으로 2성을 뛰어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을 터.
그렇기에 만약 내가 대련을 수락한다면, 녀석이 벽을 뛰어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검신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주시했다.
분명 휘둘러서 털어냈음에도 한 번 묻은 핏물은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핏물은 끈적하게 검신에 달라붙어 있었다.
오마르도 똑같다.
‘3년 뒤, 녀석이 폭주하는 사건은 고작 이 정도 도움을 준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아예 근본적인 부분부터 뜯어고쳐야만 막을 수 있는 일. 고작 이 정도로 변할 미래는 아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이득을 봐야겠지.’
결심을 내리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세르폰 경, 제게 충성을 맹세한 녀석들 말입니다.”
“네?”
뜬금없는 내 질문에 세르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볼을 긁적였다.
“그, 있잖습니까. 란체스 녀석의 파벌 말입니다. 제가 강제로 뜯어와서 충성 맹세를 시킨 아이들.”
“아.”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 세르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힐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오마르 형님 쪽 파벌이 걔들이랑 잘 어울린다고 했었나요?”
“아, 네. 딱히 배척하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호의……를 보이는 편에 가까웠습니다만.”
“그렇습니까.”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계속 쓰러져 있던 도플갱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세르폰이 흠칫 놀랐다.
그 작태에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저 녀석은 분신이라고 말해주었음에도 여전히 세르폰은 나와 겉모습부터 기감까지 흡사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게 기괴하고 소름끼치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이 문제는 전생에 아멜리아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놈들도 평생 익숙해지지 못했다고 말했으니까. 완전하게 원본과 흡사한 분신이라는 건, 그런 물건이다.
다시금 도플갱어에게 검을 겨누며 나는 말했다.
“나중에 시간을 낸다고 전해주십시오.”
“오마르 도련님께 말입니까?”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세르폰이 눈을 크게 떴다.
“네. 딱히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대련 정도인데요. 제가 손해볼 것도 아니니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 부하…… 부하? 부하인가. 하여튼 그 녀석들한테 잘 대해주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해드릴 수 있죠.”
나는 히죽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당연하지만 진심은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녀석만 이득 볼 일을 할까?
‘3년 뒤에 오마르 녀석이 폭주해서 골로 가버린 다음……. 녀석의 파벌은 그대로 붕 떠버린다.’
전생에는 그렇게 와해된 파벌을 에이미와 그라힐, 그리고 아덴 리텐슈노프가 흡수했다.
차후 에이미는 아이스본으로 도망쳤고, 그라힐은 대형 사고를 치고 후계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의 파벌까지 전부, 아덴 리텐슈노프의 것이 되었다.
‘그 덕분에 놈은 순식간에 주요 후계자 중 하나로 급부상했고, 에르반과 겨룰 자격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오마르의 파벌에 조금씩 내 영향력을 심어넣는다.’
굳이 내 쪽으로 넘어오라고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3년 뒤에 주인 잃고 방황할 놈들이니까.
‘지금부터 작업을 해 둔다면…….’
그 녀석들은 전부 다, 내 것이나 다름 없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