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폴카르 중심가의 한 여관.
고급 객실이라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큼직한 고급 소파 위에 한 사내가 늘어져 있었다.
“하암.”
사내는 피곤한 듯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반쯤 감긴 눈에서는 졸음이 뚝뚝 흘러내렸고, 대체 몇 잔째 들이킨 것인지 모를 커피잔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레너드 랭커스터.
수련동 중급반의 선임 교관으로, 이번 오우거 사냥 훈련의 감독관으로 온 자였다.
레너드는 손에 쥔 서류를 대충 살피다가, 이내 탁자에 휙 내던졌다.
“졸려 죽겠네, 진짜…….”
짜증 가득한 투덜거림에, 그의 곁에서 같이 서류를 살피던 또 다른 중급반 교관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커피를 더 주문할까요, 선배님?”
“아니, 괜찮아. 그놈의 커피, 더 마셔봤자지.”
이미 몸뚱아리는 한계에 도달했는데, 여기서 각성제 더 붓는다고 정신이 멀쩡해지겠냐.
레너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후배 교관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가장 우수하신 게 어느 도련님이시라고?”
“그, 드레커 도련님이십니다.”
허.
후배 교관의 대답에, 레너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분이 지금 중급반에 있는 직계 중에서 가장 막내 도련님 아니었나? 다른 분들은 몇 년째 이 짓을 하고도 여전히 아리까리하시는데…….”
확실히 소문대로 대단하긴 하네.
레너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번 오우거 사냥 훈련의 목적은 두 가지다.
상급반이 임무를 받는 것과 비슷한 훈련 환경을 조성하여, 중급반 수련생들이 상급반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
그리고.
‘직계 혈통들의 자질을 파악하는 것.’
차후, 후계자 경쟁에 돌입할 직계 리텐슈노프들이 조직의 장이 되었을 때,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팀 자체가 직계 혈통을 중심으로 짜여 있으니까.’
현 중급반에는 수련생들의 구심점이 될 만한 직계 혈통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었다. 덕분에 이번 훈련에서도 대부분의 팀이 직계들 위주로 짜여 있었다.
‘직계들이 팀 기강을 잡아주니 사고 안 터져서 관리는 편하긴 한데…….’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이번 훈련에 차출된 교관의 숫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일까.
레너드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인력 부족 때문에 레너드는 며칠 째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달고 살 정도로 말이다.
‘아, 귀찮네 진짜.’
솔직히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오마르, 에이미, 란체스, 반체스, 그리고 드레커까지.
직계 혈통이 리더로 있는 팀이 무려 다섯 팀.
평범한 수련생들로만 이루어진 팀까지 합치면 지금 폴카르에 들어온 수련생은 총합 열 팀이 넘는다.
그 팀 전부를 하루 종일 감시하고 평가해야 하는데, 정작 그 업무를 담당한 교관의 숫자가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물론 레너드는 선임 교관인 만큼 다른 교관들처럼 밖을 싸돌아다니며 수련생들을 감시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그들이 정리한 평가 자료를 전부 살펴야 했다.
덕분에 그는 하루 종일 산더미 같은 종이쪼가리와 씨름해야만 했다. 고작 서류 읽는 작업이라는 생각에 내심 얕봤는데, 예상외로 피로가 쌓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레너드는 이마를 문지르며 작게 투덜거렸다.
‘젠장, 동기 녀석들은 다들 직계 줄 잡아서 성공하고 있다는데……. 난 대체 여기서 뭔 고생이냐, 이게.’
수련생 시절에 우물쭈물하다가 누구의 파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바람에 이도저도 아니게 되었다.
그 탓에 다른 동기들은 직계 리텐슈노프의 측근이 되어 승승장구 하고 있었지만, 레너드는 여전히 수련동에 짱박혀서 썩어가는 중이었다.
‘에휴, 앓느니 죽지.’
자신의 슬픈 인생을 한탄하며, 레너드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우울한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후배 교관은 여전히 서류를 확인하느냐고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괜시리 아니꼬와진 레너드가 툴툴거렸다.
“야, 야. 적당히 해. 어차피 훈련은 넘쳐나니까.”
“아, 네……. 그, 그런데 선배님.”
“응? 왜. 뭔데.”
“폴카르에 요정족이 올 일이 있습니까?”
……뭔 소리야?
후배 교관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레너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쟁이들이 여길 왜 와? 갑자기 뭔데?”
“아니, 그……. 며칠 전부터 시내에서 요정족이 난동을 부리고 그랬거든요. 혹시 모르셨습니까?”
“뭐?”
레너드의 눈이 일순 커졌다.
“……귀쟁이가 시내에 나타났다고?”
순간 절로 등짝에 식은땀이 흘렀다.
레너드는 황급히 대충 소파에 쑤셔박았던 몸뚱이를 일으켰다. 절로 몸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어어, 네. 그, 그런데…….”
후배 교관은 갑자기 바짝 긴장하는 레너드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난 레너드가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뭐? 뭔데?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해!”
“아, 네! 네! 그…… 제 생각에는 그 일에 드레커 도련님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요.”
“…….”
“요정족이 난리를 치면, 드레커 도련님의 팀원이 그 녀석들의 뒤를 몰래 밟는 것 같더라고요. 제 머리로는 도저히 무슨 일인지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그 뒤로도 계속 후배 교관이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레너드의 귀에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레너드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요정족과 드레커라는 단어만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 이게 그놈이 말한 그건가?’
그, 암살 어쩌구 하는 이야기?
그건 진짜, 아주 우연히 듣게 된 일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고 있긴 했다. 그라힐 리텐슈노프가 드레커를 시기하여 살수를 보냈는데, 죽이는 데 실패했다는 소문이.
물론 레너드는 믿지 않았다.
‘마그너스 님께서 혈족간의 골육상쟁을 철저히 막고 계신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설사, 그라힐이 돌아버린 나머지 그런 짓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마그너스가 가만 둘 리가 없잖는가?
하지만 그라힐이 어떤 처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진짜로?”
레너드의 수련동 동기이자, 그라힐의 측근이 된 녀석이 술에 취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기 전까지는.
‘미친 놈들!’
아마 녀석은 레너드를 그라힐 밑으로 끌어들일 생각으로 그 이야기를 해준 거 같은데, 그 덕분에 레너드는 그쪽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가주가 직접 금지한 직계 간 암살을 시도하는 미친 행동거지도 그렇고, 외부 세력을, 그것도 정신병자들인 요정족을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아니, 정신 나간 짓을 저질렀으면 성공이라도 하던가.’
아예 실패한 주제에 그걸 떠벌리고 다니는 건 뭐야?
그렇기에 레너드는 그라힐 리텐슈노프 쪽과는 엮이면 안 된다고 이미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또 요정족이 드레커 곁을 맴돈다고?
확실했다.
이건 두 번째 암살 시도였다.
‘이 씨발 새끼들이 진짜……!’
레너드는 이를 악물었다.
‘당장 여기서 사고가 터지면 내가 죽는다고!’
직계 혈통이 암살당했는데, 관리 감독 역할을 하던 놈들을 살려둘 리가 없다.
레너드는 과거, 에이미가 부린 수작질에 엮여들어간 몬스터 사육장 패거리들의 최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미수에 그쳤는데도 손모가지를 날렸어. 만약 혹시라도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죽을 거다. 그것도 끔찍하게.
그 생각이 들자 절로 이가 갈렸다. 가슴에 화가 끓어올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동시에 레너드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아냐, 이건 기회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딱히 인연이 없어서 줄을 잡지도 못했다.
‘차라리 내가 이 음모를 미리 막은 다음에…….’
저쪽에 붙는 건 어떨까?
“…….”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레너드는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어어?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잠시 일하고 있어.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 * * * *
병신 새끼들.
내 명령을 따라 며칠 간 요정족을 감시하던 가롯의 보고를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고작 욕지거리 몇 자 써놧다고 광장에서 지랄을 하고, 벽보 구경하던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다니.’
진짜 보면 볼수록 미친 놈들이다.
날 암살하겠다며?
이게 암살하겠다는 놈들이 할 짓인가?
‘아예 날 죽이겠다고 광고를 하고 다니지?’
광인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의 머리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뭐, 그 덕분에 놈들의 숫자와 본거지는 쉽게 파악했지만.’
나를 노리는 요정족 암살자는 총 6명으로, 폴카르의 서쪽 빈민가의 주인 없는 폐허에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이제 처리하기만 하면 되나.’
물론 아직 그놈들을 어떻게 쓸어버릴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대충 실력은 4성 정도인 것 같은데…….’
지금 내 성취라면 녀석들을 하나 하나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다.
문제는 여섯 명이라는 머릿수.
그 정도 숫자의 4성 기사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조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따로 따로 처리하자니, 몇 놈 놓칠 것 같고.’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쿵쿵쿵!
갑작스럽게 들려온 노크 소리에 객실 내에 있던 수련생들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뭐지?”
지금 이 시간에 이 객실을 찾을 사람은 딱히 없는데?
동시에 수련생들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눈치껏 검을 꺼내들었다. 이미 다들 요정족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묵직한 긴장감이 실내를 짓누른다.
여전히 밖에서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상황.
제이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열까요?”
“열어.”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제이스는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 걸쇠를 풀고 손잡이를 돌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며 찾아온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대는 이제 갓 서른 쯤 되었을법한 사내였는데, 입고 있는 제복을 보아하니 수련동 교관인듯했다.
그는 검을 뽑아든 수련생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광경에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하나, 곧 그는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수련동 중급반 선임 교관인 레너드 랭커스터입니다.”
“선임 교관?”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레너드는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등에 큼직한 가죽 포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포대 안에서 희미하게 피냄새가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내가 미스틸테인으로 짊어진 가죽 포대를 가리키자, 그는 굳은 얼굴로 포대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검 끝으로 슬쩍 포대를 젖혀 보았다.
포대자루 안에는 사람의 머리가 몇 개 들어있었다. 방금 갓 잘라온 것인지, 머리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뭡니까? 이건.”
내 물음에 레너드는 짧게 심호흡을 한 뒤 대답했다.
“도련님의 목숨을 노리던 요정족들의 머리입니다. 제가 방금 직접 베어 왔습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