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마그너스 리텐슈노프의 이명異名은 검제劍帝다.
검의 길을 걷는 사람 중에서 하늘 아래 자신보다 더 높은 자가 없다 생각해 스스로가 붙인 칭호.
실로 광오하기 그지 없는 자칭이지만,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호칭이 오만하다고 비하하지 못했다. 검술명가로 이름 높은 호엔슈타펠의 가주조차도 말이다.
그러나.
리텐슈노프 본가에 소속된 자들, 특히 철혈궁에 소속된 이들에게는 검제보다 더 익숙한 호칭이 있었다.
용인龍人, 드라고니안.
절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표정을 짓지 않고, 겉으로 자신의 속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 마그너스의 성정 때문에 붙여진 이명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마그너스는 좀 달랐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눈은 반달로 곱게 접혔고, 입가에 머금어진 미소는 그칠 줄을 모른다.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와 속에 담긴 태산 같은 기세를 배제하고 본다면, 흔히 시골에서 보이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그런 마그너스가 어색한 탓에, 아자르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보고를 계속했다.
“멜의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성취가 굉장히 빠르다 합니다. 그 녀석이 ‘곧 있으면’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 이번 달 안에는 드레커 도련님께서 5성의 경지에 오를 것 같습니다.”
“아아, 그래. 그렇겠지. 그래야 하고 말고.”
하지만 마그너스는 그런 아자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어지간히도 즐겁고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자르야. 아자르야. 거, 사실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마 진짜로 올해 안에 5성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거든? 그런데 이걸 기어코 성공해냈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참으로 그렇습니다. 주군.”
아자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드레커 리텐슈노프의 재능은 놀라웠다. 아니, 고잘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5성을 앞두고 있다니? 역사책에서도, 아이들 동화나 통속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업이었다.
“역시, 핏줄이라는 거겠지. 몇 개 조금 흐려질 수는 있어도, 그 근본이라는 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게야.”
마그너스의 중얼거림에 아자르는 움찔 몸을 떨었다.
“…….”
절로 식은땀이 이마를 적셨다.
아마도.
아마도 흥에 겨워 무심코 튀어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 방금 전 마그너스의 중얼거림은 그가 평소에 품고 있는 속내가 어떠한지를 내비치고 있었다.
아자르는 작게 침음성을 냈다.
몇 개의 핏줄이 흐려질 수 있다. 그 말은 즉, 현재 자신의 자식들의 능력이 불만족스럽다는 걸 내포한다.
이미 장성하여 가문의 기사단을 맡아 이끌고 있는, 실질적으로 차기 가주 자리를 노리는 후계자들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역시, 드레커 도련님이 변수다.’
아자르는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마그너스가 후계자를 바꾸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아자르 또한 그 부분은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마그너스의 네 아들들은 솔직히 재능 면으로 볼 때 가주를 맡을 인재는 아니니까.
그렇기에 마그너스가 그 아래, 손자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것 또한 이해하는 부분이었다.
‘이전까지는 에르반 도련님, 아덴 도련님, 그리고 오마르 도련님을 염두하고 계셨는데…….’
드레커가 두각을 드러낸 뒤로, 마그너스의 총애는 오로지 드레커만을 향해 내리쬐는 중이었다.
다른 손자들의 보고들은 취합해서 받는 것에 비해서, 드레커의 보고만 아자르에게 개별적으로 받는 것부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주군께서는 다음 후계자로 드레커 도련님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너무나 수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드레커는 너무 어렸다.
이제 고작 열 살.
다른 후계자들이 중년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차이는 훨씬 심각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손자들 또한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그들은 위에 아버지 세대가 존재하지 않던가?
낙점한 손자의 아버지에게 가주 직위를 물려주고, 다시 그 손자 대까지 계승시키면 문제가 없다.
하나,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뒷배가 되어 줄, 한 번 가주 직위를 거쳐줄 아버지가 부재중이었다.
당연히 다른 손자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당신의 자식들이 못미더우신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고작 열 살 짜리 손자를, 중년의 나이에 이미 자신들의 세력까지 확고하게 굳힌 큰아버지들과 맞붙도록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아자르로서는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일단은 계속 지켜보라고.”
“주군, 정말로 드레커 도련님이 5성이 되면 중급반을 조기 졸업시켜주실 것입니까?”
“안 그러면?”
마그너스가 눈을 찌푸렸다.
“열 살에 5성인 녀석이 중급반에 있을 이유가 뭔가? 5성이면 교관 수준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서 뭘 더 배우란 말인가? 시간 낭비에 불과하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자르는 말을 흐렸다. 마그너스의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과를 냈으면 보상을 줘야지. 중급반 졸업은 별 것 아니잖는가? 어차피 미숙한 애들 가르쳐서 사람 만들 목적으로 세운 기관인데, 이미 사람이 된 녀석이 거기에 묶여있을 이유가 없지.”
마그너스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하지만, 아자르는 마그너스를 따라 웃지 못했다.
드레커의 성장은, 가문에 파열음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제부터는 단장들이 움직일 겁니다.”
“내 아들 놈들 말인가?”
마그너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드레커 도련님이 어떤 성과를 내어도 묵묵부답이었지만, 중급반 조기 졸업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5성 달성 사실을 숨기더라도, 분명 단장들은 의심을 품을 겁니다. 당장 지금도…….”
“……당장 지금도?”
서늘한 목소리에 아자르는 입을 닫았다.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치솟았다. 아자르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그너스의 눈치를 살폈다.
“…….”
마그너스는 말 없이 천천히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작은 갑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문 마그너스가 손가락을 쭉 폈다. 곧 손가락 끝에 붉은 오러가 맺혔다. 손가락이 스치자 궐련 끝에 불이 붙었다.
궐련을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마그너스가 연기를 뿜었다. 희멀건 연기 너머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누군가?
“……갈라할 님입니다.”
“……허허. 어허허! 으허허허!”
다음 순간, 마그너스의 광소가 집무실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래, 그놈이……. 그렇단 말이지.”
나직히 중얼거리는 마그너스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격노가 서려 있었다. 어마어마한 기세에 아자르는 흠칫 놀라며 무심코 뒷걸음질쳤다.
“그래, 알겠네.”
하지만, 마그너스는 곧 기세를 갈무리했다. 아자르는 땀에 축축히 젖은 주먹을 움켜쥐며 조심히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일세. 만일 자식 놈들이 섣불리 움직인다면, 그때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그렇게 대답하는 마그너스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 눈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너무 짙어.
아자르는 아무 대답도 꺼내지 못했다.
* * * * *
“에이 씨, 빌어먹을!”
하루 종일 대련 때문에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던 탓일까? 아니면 무려 세 시간이나 손 끝에 마나를 집중하느라고 정신력이 소모된 탓일까?
절로 탄식이 터져나오고,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연무장 흙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런 내 행태에 저 멀리 의자에 앉아 열심히 궐련을 음미하던 멜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쭈? 너 지금 뭐 하냐?”
“쉽니다.”
“쉬어? 쉴 시간이 있어?”
“아 좀! 세 시간이나 손가락질 했으면 좀 쉬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안그래도 식사도 못 했는데.”
절로 튀어나오는 투덜거림에 멜이 혀를 찼다.
“야, 이 짓거리를 내가 하자고 했냐? 네가 하자고 했지? 곧 있으면 열한 살이랍시고, 더 빡세게 굴려달라고 한 건 너 아니냐?”
“식사도 먹이지 말라고는 안 했는습니다만.”
“오러 뽑아내면 준다고 했잖냐.”
“…….”
나는 누운 채로 지그시 멜을 노려보았다.
내 시선에 멜이 헛기침을 했다.
“유모 부르던가, 그럼. 저번에 가져왔던 칠면조 요리 해오라고 해. 그거 맛있더라. 어디 칠면조냐?”
“제 영지입니다. 콜마운트라고…….”
“칠면조 맛집이었네, 거기.”
실없는 농담을 던진 멜은 다 피운 궐련을 흙바닥에 내던지고는 다시금 새로운 궐련을 뽑아 입에 물었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거의 다 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곧, 아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내가 5성의 경지에 도달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긴, 그동안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강해져야지.’
8개월.
무려 여덟 달이라는 기간 동안 개처럼 굴렀다.
수련 기간 내내 멜에게 미친 듯이 시달렸으니, 만약 5성에 근접하지 못했다면 미쳐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거의 다 왔어.’
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렇다.
5성에만 도달하면, 중급반을 나올 수 있다.
물론 당장 열한 살에 졸업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더라도 내후년 즈음이면 분명 중급반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나름 충분히 세력도 키우고 입지도 쌓았다.’
란체스, 반체스는 물론이고 에이미 또한 이제는 실력 면에서도 세력 면에서도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란체스는 자기 파벌을 다 털리고 홀몸이 된 지 오래였고, 에이미나 반체스의 파벌에서도 내 쪽으로 전향한 녀석이 몇 명 생길 정도였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오마르의 파벌에 호감도 쌓아 두었다. 오마르가 죽은 뒤라면 그쪽 파벌을 충분히 전부 흡수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떠나도, 레너드가 있으니 중급반에서 계속 새로운 파벌을 수급할 수도 있지.’
이 정도면 내가 수련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얻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졸업만 하면 된다.’
상급반에 올라선 이후부터는 외부 활동이 훨씬 더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임무 수행을 핑계로 아직까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여러 보물이나 기회, 인재를 내 손에 넣을 수 있다.
상급반에 올라서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 속도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인 무력도, 세력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른 이 짓거리를 성공해야겠지.
나는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허공에 손가락을 뻗었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손 끝에 마나를 집중한다. 사용하는 검식은 바인더사캴 13식. 내가 전생에 사용했던 검식 중 가장 숙련도가 높은 검식이다.
검식의 묘리를 따라 마나를 운용했다. 드라고니아와 슬리드 구축법으로 만든 마나 하트가 기동하며, 밑바닥까지 떨어진 마나를 긁어모아 손끝으로 보냈다.
“꼬맹아, 배고프다며? 칠면조 요리, 빨리 주문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멜의 목소리는 무시한다.
그가 내뿜었던 궐련 연기가 내 머리 위를 떠돌았다. 나는 마치 검을 휘두르듯이 천천히 손끝을 움직여 연기를 내리그었다.
그리고.
“……!!”
손 끝에 반짝이며 맺혀 있던 마나가, 허공의 연기를 물어뜯는 걸 확인한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5성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