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볍게 내리그은 검날이 공기를 가른다.
그다지 빠르지 않은 검격. 당연하지만 그런 속도로 허공을 베었으니, 파공음 따위는 들릴 리 없다.
-카가각!
하지만 기이하게도 검격과 동시에, 고요한 연무장에는 이질적인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마그너스 리텐슈노프는 휘둘러진 검격의 사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시선 끝에 놓인 것은 은빛 갑옷이었다.
갑옷의 전면부는 검이 닿지 않았음에도 완전히 갈려 박살이 나 있었다. 드레커가 휘두른 검격에 담긴 블러드하운드 54식의 오러가 갑옷을 파괴한 것이었다.
씨익.
그것을 확인한 마그너스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곧 표정을 지우고는 고개를 돌렸다. 휘두른 검을 갈무리하며, 무미건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 손자를 바라보았다.
역사서에 영원히 기록될만한 괴물 같은 업적을 이뤄냈음에도,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그 사실에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말없이 자신의 평가를 기다리는 손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마그너스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열 살에 5성에 올라섰구나.”
“그렇습니다, 가주님.”
드레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서는 으레 이러한 성과를 이룬 자가 내비칠 으스대는 기색이나, 감격스러움이 없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 예정된 일이었다는 듯한 평온함. 그러한 드레커의 처신이 마그너스의 기분을 더 기쁘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히 표정을 숨기려 했음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정말, 참으로 잘하였다.”
마그너스는 흐뭇한 마음으로 드레커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
가주가 이뤄낸 성과를 칭찬하며 손수 다독여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황송해하며 고개를 숙였을 터지만, 드레커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드레커는 고개를 빤히 치켜들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마그너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약속했던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당당한 행동에 마그너스가 더욱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리라.
마그너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이 정도 성과라면 충분히 네 능력을 증명한 셈이겠지.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중급반은 조기에 졸업하게 해주마. 그러면 되겠느냐?”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 대답에 드레커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까닥였다. 그리고는 가만히 마그너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모습에 마그너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예끼, 이놈. 고작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거냐? 네 속에 품은 시커먼 욕심이 차고도 넘친다는 걸 알아라!”
그제야 드레커 또한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야 뭐…… 가주님께서 제안하신 건 올해까지였잖습니까? 약속한 기간을 몇 달은 단축했으니, 제가 무언가 조금 더 바라는 게 큰 욕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
이미 충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더욱 더 많은 걸 바란다. 그러나 그걸 과욕이라고 말하기엔, 드레커는 이미 받은 만큼의 성과를 언제나 내고 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과욕이 맞다.”
입으로는 그렇게 대꾸했으나, 마그너스가 품은 속내는 달랐다.
더 강해지기 위한 욕심이 과연 죄인가?
‘그렇지 않지.’
아니다.
이곳은 강자존의 리텐슈노프다.
다른 곳이라면 또 모를까, 리텐슈노프에 속한 자라면 그러한 욕망을 품는 것은 오히려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하지만.”
여전히 눈을 빛내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손자를 향해서, 마그너스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재능은 욕심을 가져도 될만하지.”
능력을, 재능을,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된다.
이곳에선 그것의 유무가 모든 걸 정당화해주었다.
아니, 적어도 최소한 마그너스는 그렇게 믿었다.
“감사합니다.”
드레커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마그너스는 곧 다시금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일단, 네 졸업 시기는 열두 살이다.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 육체가 성장해야지 외부 활동도 나설 수 있으니, 너도 이 부분은 참작해야 할게야.”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어린애를 가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투입할 수는 없다.
이건 능력 이전에 가문의 체면 문제니까.
“케찰코아틀의 심장을 먹었으니, 열두 살 정도라면 네 육체도 충분히 성장을 끝마쳤을 거다. 그때라면 너도 외부 활동을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중급반 커리큘럼을 따를 필요 없다. 네게는 시간 낭비일 게 분명하니까.”
중급반의 커리큘럼은 2~3성을 기준으로 짜둔 것이다. 그런 훈련을 5성이 받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오히려 다른 수련생에게 위화감만 가져다줄 뿐이다.
“그럼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와 그다지 다를 건 없다. 앞으로 내년까지는 멜에게 임무를 부여하지 않을 터이니, 계속 녀석과 훈련을 하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그너스의 대답에 드레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흡족히 바라보던 마그너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으음.
마그너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손끝으로 입술을 쓸어내렸다. 절로 고민이 되었다. 올해까지 내라고 한 성과를 단축하기는 했으니, 무언가 보상을 줘야할 터.
‘한데…….’
이 녀석에게 대체 무엇을 주어야 할까?
무구? 중급반을 졸업하고 상급반에 들어선 이후라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무구가 필요 없다.
영약? 포션? 여기는 리텐슈노프다. 직계 혈통인 드레커에게 그런 것이 부족할 리가 있나?
‘그렇다면…….’
마그너스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생각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가르침을 내려야겠군.’
곧, 그가 눈을 떴다.
눈동자에서 붉은 귀화가 일렁이는 모습. 그 광경에 드레커는 일순 움찔 몸을 떨며 뒷걸음질쳤다.
“드레커야.”
“……네, 가주님.”
마그너스는 천천히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소리 없이 검집에서 뽑힌 검이 서늘하게 빛을 발한다.
“잘 봐두거라.”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검을 쥔 마그너스의 몸에서 일순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기세가 솟구쳐올랐다.
“이것이.”
흘러넘치는 마나에 공간이 일그러지고, 세상이 왜곡되어간다. 그 광경에 드레커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곧, 가공할 만한 힘이 검 끝에 맺힌다.
동시에 마그너스의 목소리가 추상처럼 떨어졌다.
“네가 올라서야 할 끝이다.”
다음 순간.
느긋하게 내리그은 검끝을 따라, 세상이 단절되었다.
* * * * *
“여기, 왜 이러냐?”
오늘도 내 훈련을 돕기 위해 연무장에 도착한 멜 랭커스터가 눈을 꿈뻑였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입에 머금으며 대답했다.
“가주님께서 검을 휘두르셨거든요.”
“마그너스 님이?”
그 말에 멜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연무장 외벽을 샅샅이 훑었다.
연무장의 외벽은 사선으로 ‘잘려나가’ 있었다.
말 그대로였다. 연무장의 외벽 일부는 마치 가위로 잘라내어 세상에서 지워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모두 마그너스가 일검을 휘두른 결과물이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노인네야.’
사람이 만들어낸 흔적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이런 짓을 벌이려면 대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할까?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의 육신으로 그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긴 한가?’
전생에 봤던 어떤 인간도 이딴 짓을 하진 못했다.
그리고 그건 소드마스터였던 멜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인간도 못 하는 경지라니…….’
나는 힐끗 멜을 살폈다.
멜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열심히 벽에 난 상흔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곧, 그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 너 진짜 운이 좋네. 이런 검격을 휘두르는 걸 눈앞에서 봤다고? 눈호강 아주 제대로 했겠는데?”
심히 부럽다는 듯한 얼굴로, 멜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쓰게 웃었다.
“저는 암담하기만 하던데요?”
“왜?”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주님께서 이걸 보여주시면서, 앞으로 저보고 이 정도 경지까지 올라서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그래?”
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이번에 처음 봤었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너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자 멜은 눈을 찌푸리더니, 이내 염소 수염을 매만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예?”
그건 또 뭔소리야?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자, 멜은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넌 진짜 양심이라는 게 없냐? 아니, 그 정도 재능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뭐 이리 엄살이 심해? 지금 기만하는 거냐? 뒈지고 싶어?”
“아니, 그건 또 뭔…….”
“닥치고 마그너스님의 검격이나 복기해. 그런 걸 볼 수 있는 게, 어디 흔히 찾아오는 기회인 줄 알아?”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여튼, 쥐방울 만한 꼬맹이가 투정만 많아서는…….”
멜은 한참을 투덜거리며 나를 타박했다. 겉보기에는 내 마음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부러운 마음에 성질을 부리는 거였다.
한참을 그렇게 구박을 당했을까.
슬슬 조금 질릴 무렵, 멜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에휴, 아무 의미 없다. 널 갈군다고 뭐가 나오나? 그런다고 내가 검을 견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죠. 그러니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이놈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네.”
“악!”
결국 한 대 쥐어박히고 말았다.
내 머리를 후려친 멜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안되겠어.”
“……뭐가 말입니까?”
내가 정수리를 문지르며 묻자, 멜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는 너무 스승에 대한 존겅심이 없어. 안 그래?”
“거, 스승 놀이 따위는 안 하신다…… 아닙니다.”
멜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는 터라, 나는 말을 삼켰다.
그제야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한 멜이 말했다.
“그러니, 네 녀석에게 존경심이란 걸 심어줘야겠다.”
뭔가, 몹시 불길한 발언이었다.
“어…… 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이제 너도 5성이 되었으니, 지금보다는 훨씬 더 심하게 교, 아니, 굴릴 수 있지 않겠냐?”
……뭐요?
‘그보다 방금, 교육이라고 말하려다가, 굴린다고 바꾸지 않았나?’
심히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에 나는 가만히 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실실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아주 개처럼 굴려서 다시는 스승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해 줘야겠어. 그래야 집 나간 예의범절이 다시 네 몸 속으로 돌아오지 않겠냐?”
“아니, 그게 무슨……!”
어이가 없었다. 하나,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선택한 스승 아닌가?
악을 쓰면서라도 버텨야지, 뭐.
나는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번쩍 들었다.
“에휴, 그래요. 그러시죠. 그래서, 이번에는 대체 어떻게 굴리실 겁니까?”
멜이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냐?”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내가 나만의 기술을 만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말이야.”
“아, 분명…….”
처음 기술을 만들기 시작한 건 4성이었지만, 제대로 무언가를 창조한 건 6성부터라고 했었나?
“그래. 맞다. 내 고유 기술 중 쓸만한 건 대부분 6성이 되어야 배울 수 있는 것들이야.”
“네.”
“한데, 그걸 네가 못 배울 이유가 있나?”
불길한 소리.
그제서야, 뭔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
“생각해봐? 7성 무렵에나 익힐 수 있는 기술도 익혔는데, 고작 6성 짜리 기술을 못 다룰 리가 없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멜은, 몹시 악랄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