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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76화 (76/139)

76화

“세르폰 경, 능력 좋으시네요.”

성년식 당일.

내가 심드렁한 투로 지나가듯 던진 말에 세르폰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세르폰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진심입니다. 서로 계속 싸우고 사이도 안 좋으시길래, 둘이 서로 그렇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한 적 없었거든요.”

“죄, 죄송합니다.”

내가 비꼬는 중이라고 생각한 건지, 세르폰이 황급히 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 사죄했다.

딱히 갈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나?

“아니, 뭐…… 이게 뭐라고 그렇게 주눅 들어 있습니까? 그냥 놀란 겁니다. 놀란 거.”

어깨를 으쓱거리자, 세르폰이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 네…….”

“근데, 진짜 놀라기는 놀랐습니다. 대체 서로 언제 그런 사이가 된 겁니까?”

“…….”

내 물음에 얼굴이 더욱더 붉게 물드는 세르폰.

부끄러워하는 모습까지 마리 유모랑 쏙 빼닮았다.

‘거참, 아주 천생연분이구만.’

무슨 홍당무 남매냐.

[다, 닥치거라! 레이디 마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처절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데우스의 발악을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묘하게 목소리가 울먹이는 것 같기도 한데…….

솔직히 이 변태 드래곤은 자세히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기에, 굳이 깊은 심연까지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에휴.”

왜 하필 수호룡이 이따위인 걸까.

나는 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연회장 입구가 보인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아, 네. 그렇게 하시죠. 도련님.”

나는 세르폰을 뒤로 한 채,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드레커 도련님,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다가서자 문 옆에 서 있던 시종들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기 시작했다. 평소 열심히 기름칠해두었는지 거대한 문은 조금의 소음도 없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연회장 내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실내에서 수많은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굳이 표현하고 싶지 않은 수십 가지의 감정이 얽힌 눈빛이 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

전생이었다면 이런 시선에 주눅이 들었을지 모른다.

뒷골목 고아 출신. 가진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에게 이런 주목은 부담스럽고 두려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고개를 당당히 치켜들었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리텐슈노프 답게, 말이다.

* * * * *

“왔구만.”

연회장의 한 가운데.

흔히 상석이라고 불리는 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은 연회장 입구를 힐끗 살폈다.

저 멀리, 열린 문 사이로 흑발의 소년이 들어오는 게 보인다. 곧바로 많은 사람의 시선이 쏟아졌음에도, 소년은 조금도 긴장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날카로운 눈으로 연회장을 살핀다.

그 광경에 청년, 반 리텐슈노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반 리텐슈노프는 손에 쥔 카나페를 입에 털어 넣은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 모습이 열한 살이라고? 저 체격이면 열다섯 살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그 나이에 제국 말벌을 사냥할 수 있겠지.”

“그렇지요.”

대답은 바로 곁에서 튀어나왔다.

반 리텐슈노프는 힐끗 자신의 앞자리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무심한 눈의 청년이 있었다.

잿빛 섞인 금발 머리카락이 샹들리에의 불빛을 받아 반짝인다. 청년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술잔에 담긴 붉은 포도주를 살짝 흔들었다.

은은히 퍼지는 시트러스 향이 감미롭다.

하나, 청년은 전혀 술을 즐기는 자가 아니었다.

저 행동 자체가 연기라는 것이다.

술뿐만이 아니다. 이번 성인식 연회 자체에도 분명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겉모습만 보면 우아하게 연회를 즐기는 것 같다. 그 모습이 묘하게 거슬렸지만, 반 리텐슈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그가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젠장.

반 리텐슈노프는 입술을 잘게 씹었다.

‘솔직히 안 왔으면 했는데…….’

사실 초대한 적도 없긴 했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초대장을 발송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어째서인지 스스로 참석 의사를 밝히고 이 자리에 기어들어 왔다.

왜 이 녀석이 이곳에 온 것일까?

반 리텐슈노프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의문이었다.

“아덴.”

“왜 그러십니까?”

“내 성인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준 것에 감사를 표한다. 분명 상급반 수련생에게는 지금이 가장 바쁠 시기일 터인데도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이렇게 형님을 아껴주는 네 마음이 참으로 어여쁘구나.”

그래서 물었다.

분명 가장 바쁠 시기에, 형님으로 존중하지도 않는 내 성인식에 참석한 저의가 뭐냐?

반의 질문에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 물음에, 상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은은하면서도 품위 있는 미소.

하지만,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이미 알고 있는 반에게는 그것만큼 소름 끼치는 광경이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그야, 형님의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성인식 아니겠습니까. 아우 된 몸으로서 당연한 일이니, 형님께서는 괘념치 마십시오.”

개소리하고 있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속내를 씹어 삼키며, 반은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상대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뱀처럼 자신을 훑는 눈동자는 절대로 그런 의도로 이 자리를 찾아온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반 리텐슈노프는 판단을 포기했다.

어차피 상대는 자신이 재단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집안에 그런 인간이 한둘도 아니고. 굳이 피곤하게 머리를 쓸 이유는 딱히 없었다.

‘제랄드 숙부님 쪽 애들이 다 그런 인간이긴 하지.’

에르반 리텐슈노프도, 그 밑의 레이첼 리텐슈노프도 그랬다. 아직 에이미 쪽은 잘 모르지만, 형제 세 사람이 다 그 모양인 걸 보면 아마 그 녀석도 비슷하리라.

“……그렇구나. 어찌 되었든 고맙다. 네 덕분에 이 자리가 더 빛나는 것 같거든.”

“별말씀을.”

상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진짜로 별것 아니라는 듯한 태도가 심히 고까웠다.

‘왜 이놈의 집구석은 이렇게 개판이지? 사촌이라는 놈들이 다 이 모양인 거야?’

반 리텐슈노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흠흠, 이 술은 참 좋구나. 그거 아느냐? 남부에서는 이 술이…….”

대충 이야기를 돌리려는데, 상대 쪽에서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반은 힐끗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어딘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뭣에 집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거지 같은 녀석.’

반 리텐슈노프는 불쾌한 마음을 감춘 채, 반은 상대의 시선을 좆아 고개를 돌렸다. 대체 상대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방금 연회장에 들어온 소년, 드레커 리텐슈노프가 서 있었다.

“아.”

그런 건가.

반 리텐슈노프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소름끼치는 사촌 형제, 아덴 리텐슈노프가 굳이 이번 성인식에 참가한 이유를 말이다.

* * * * *

역시 리텐슈노프!

그런 감탄이 절로 튀어나오는 연회였다.

‘졸부 같은 아이스본과는 차원이 다르네.’

기본적으로 배치된 주전부리부터, 제공되는 음료와 술, 식사가 전부 고급스럽다.

그저 돈을 뿌려서 만들어낸 무언가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담긴 품위 있는 연회라는 것이었다.

[리텐슈노프, 이놈들이 은근히 연회 같은 행사에 진심이진 하지. 내가 현역일 때도 그러했으니까 말이다.]

덕분에 입은 즐거웠다.

마음의 부담을 덜어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연회 같은 곳에 발을 들일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덴의 최측근으로 활동할 때도 그러했다. 약간 과거의 트라우마가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뭐, 이제는 달라졌으니 상관은 없지만.

[거참, 맛나게도 먹는구만. 부럽구나, 부러워! 나도 어? 몸뚱이가 있었다면 그 맛을 볼 수 있을 터인데!]

‘몸이 있었다면 여자나 꼬시고 다니지 않았을까요.’

[하긴, 그렇겠지.]

‘……이럴 때는 부정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왜 부정을 해? 이 세상에 당연한 걸 부정하는 경우도 있느냐?]

어김없이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데우스 때문에 또 어지러워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정신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맛있는 게 필요하다. 나는 초록빛이 감도는 초콜릿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음, 이건 박하 향이 풍부하네요. 확실히 입이 심심하지는 않아서 좋긴 합니다.”

[……뭐? ……박하 향? 너, 너, 지금 설마 민, 민, 민트 초콜릿을 처먹은 게냐?]

“왜 그러십니까?”

[이런 미, 미친놈이! 이 정신 나간 꼬맹이가 드디어 돌아버리고 말았구나! 왜 하필 치약을 처먹는 게야!]

‘아니, 치약이라니……. 거참, 말이 심하시네요.’

[그건 치약이야!]

역시, 데우스는 미친 드래곤이 틀림없다.

이 맛있는 초콜릿을 보고 치약이라고 모독하다니!

저런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변태 꼰대 드래곤이 된 게 틀림없다.

잘못된 미각을 가진 데우스가 갑자기 가여워졌다.

아니, 생각해보면 아직 진짜 제대로 된 민트 초콜릿을 먹지 못해서 저렇게 된 게 아닐까?

[……제발, 제발 그 입 다물어라. 너는 오염되었어. 꼬맹이, 너 혹시 치즈 파이 위에 파인애플 올려 먹는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다오.]

울먹거리는 데우스를 무시하며, 나는 초콜릿을 몇 개 입에 더 털어 넣고는 식사를 끝냈다. 식도락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어디 보자…….’

나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내가 확인해야 할 인물은 세 명.’

이번 성인식의 주인공, 반 리텐슈노프.

그리고 은둔의 검술 천재, 에이미 리텐슈노프.

마지막으로…….

‘아덴 리텐슈노프.’

나를 죽인, 내 옛 주인까지.

이 세 사람이 이번 연회에서 내가 주시해야 할 인물들이었다.

‘솔직히, 반 리텐슈노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딱히 재능이 있는 것 아니고, 나중에 권력을 잡지도 못한다. 특징은 눈치가 굉장히 좋다는 것뿐이다. 솔직히 무능력한 사람이니, 경쟁자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반 리텐슈노프와는 인연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를 내 쪽으로 끌어들이면, 나보다 배분이 높은 형님 또한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구도를 만들 수 있다.

전생에 아덴 리텐슈노프도 이러한 방식으로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했다.

물론 아덴이 후계자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드래고니아 구축법과 더불어 에르반보다 더 뛰어난 권능을 소유했기 때문이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러니 차후 내 쪽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있겠지만…….’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다.

‘그 다음은 레이첼 리텐슈노프.’

연회장 구석에서 혼자 음료를 홀짝이는 흑발의 여인. 그녀는 가진 바 재능과 실력이 무려 소검제 에르반과 필적하는 숨은 괴수였다.

권능 또한 괜찮은 걸 지니고 있기에, 그녀는 주요 경쟁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 다행히도 그녀는 가문의 계승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저 인간은 검술에 미친 년이지.’

그녀가 관심을 품은 건 오로지 하나.

검술뿐이다.

진짜로, 레이첼은 검술이라는 것에 미친 인간이다.

‘날 귀찮게 굴 수는 있어도, 가주 자리에 욕심내지는 않겠지.’

내가 조금만 더 성장하면 대련하자고 붙들어 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레커 리텐슈노프?”

그 순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치 눈앞에 번개라도 내리친 것처럼 시야가 아득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주먹이 꽉 쥐어진다.

나는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파들거리는 얼굴 근육을 억지로 찍어눌러 표정을 지운 채 고개를 돌렸다.

나를 죽였던 잿빛 금발이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시선.

나는 그의 눈알을 쿡 찔러 터트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똑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덴 형님.”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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