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레이첼 누님께서?”
측근 기사가 올린 가문의 동향 보고에, 그라힐 리텐슈노프는 오른손을 들어 미간을 가볍게 주물렀다.
곧, 그라힐은 이를 악물었다.
레이첼 리텐슈노프가 막내 동생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었다고 한다. 무려 자신의 저택으로 드레커 리텐슈노프를 초대했다고 한다.
‘왜?’
어째서?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첼 리텐슈노프.
그녀는, 소검제小劍帝 에르반 리텐슈노프에 필적하는 강자다. 분한 일이지만 그라힐 자신으로서는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는 여자라는 뜻이다.
또한 레이첼은 강자존을 숭배하는 여자였다.
아덴 리텐슈노프가 모든 형제들을 벌레 취급한다면, 레이첼은 스스로에게 필적하지 못하는 자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라힐 또한 레이첼에게 얼마나 멸시 받았던가?
처음 상급반에 올라선 날, 그라힐은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던 레이첼의 시선을 잊지 못했다.
그건 마그너스와는 사뭇 달랐다.
마그너스가 그라힐을 혐오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레이첼은 아예 사람 취급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 무미건조하면서도 공허한 눈은, 마치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었다.
그런 인간이었다. 레이첼은.
그렇기에 그라힐은 레이첼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최소한 그녀가 자신을 사람으로 바라보고 하고 싶었다.
자신의 행실 그 자체를 혐오하는 마그너스와는 다르게, 최소한 레이첼은 그라힐 자신이 힘을 키우는 것만으로 바꿀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막내가?
-빠드득!
악물은 이가 비틀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입술을 타고 핏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그라힐이 오판하긴 했다.
막내는 무능하지 않았다.
교류전에서 수석을 달성했고, 그 나이에 절대로 사냥할 수 없는 몬스터를 잡았으며, 마그너스의 총애를 받았다. 자신이 보낸 요정족 암살자들의 습격 또한 가볍게 제압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놈이 누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냔 말이다……!”
레이첼이, 레이첼 리텐슈노프가 녀석을 인정했다고?
마그너스의, 가주의 총애도 받은 주제에?
불공평한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불가능해.”
“도련님…….”
“불가능해! 그건 불가능하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어떻게, 그놈이, 그놈이 누님께!”
-콰아아아!
순식간에 그라힐에게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 그 섬뜩하기 그지없는 힘에 그라힐의 수발을 들던 여인이 공포에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라힐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쾅 내려찍었다. 그 즉시 의자 손잡이가 으스러지며 박살났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라힐은 눈앞에 엎드린 여인의 배를 걷어찼다.
“커헉!”
그라힐의 발길질에 마치 짚단처럼 날아간 여인이 벽에 쳐박히며 핏물을 토해내며 절명했다.
“…….”
보고를 올렸던 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허억, 허억…….”
그라힐은 거칠게 숨을 고르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틀어쥔 주먹이 파르를 떨린다.
“이봐.”
이내 심호흡을 한 그라힐이 고개를 돌렸다. 서슬 퍼런 시선이 곁에 있는 기사를 노려보았다.
“당장, 당장 마차를 불러라.”
“아, 알겠습니다! 그, 그런데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공포에 질린 기사가 덜덜 떨며 물었다. 그라힐은 핏발 선 눈으로 한자 한자 짓씹으며 대답했다.
“요정왕에게. 내가 직접 가겠다.”
* * * * *
에휴.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감수해야 할 일이다.
‘이 미친 여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라면…….’
몸이 좀 고생하더라도 어울려 줘야 한다.
사실 고작 이 정도로 미래의 소드마스터를 우호 세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것부터가 말도 안되는 기회다.
무엇이든 못할까?
나는 미스틸테인을 뽑아들었다.
월광이 뽑히자 레이첼의 눈이 반짝인다.
“미스틸테인?”
역시 검에 미친 사람이라는 평가 답게, 그녀는 보자마자 내가 소유한 검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렇습니다.”
“와, 진짜? 할아버님이 그걸 주셨어? 부럽다. 정말 부러워! 나도 그 검 진짜로 가지고 싶었는데……. 혹시 누나 줄 생각은 없니?”
“예?”
이건 또 뭔 미친 소리야?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내가 와락 얼굴을 찡그렸지만, 레이첼은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반짝이는 미스틸테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인데? 나 주면 안 되니?”
여전히 초롱초롱한 레이첼의 눈빛.
그 눈에 비치는 탐욕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못 드립니다. 전 이거 말곤 검이 없어요. 아니, 그리고 누님은 이미 여러 명검을 갖고 있잖습니까?”
“그야…… 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걸?”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쉽다는 듯 입술을 핥는 레이첼. 교태를 부리는 듯한 고혹적인 광경이지만,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는 소름이 끼칠 뿐이었다.
‘……다다익선 같은 소리 하네.’
검을 많이 얻어서 대체 어디다 쓰려고?
‘어차피 사람 손은 두 개잖아.’
뭐, 입에 물기라도 하게? 삼도류야?
하지만 사람의 탐욕이라는 게 어디 끝이 있나.
하물며 저런 기괴한 탐욕이면 더더욱.
‘이거 좀 위험한데…….’
절로 마른침이 입에 고였다.
차라리 대충 아무 검이나 가져올걸. 괜히 미스틸테인을 들고오는 바람에 곤혹에 빠져 버렸다.
이러다가는 레이첼이 날 쓰러트리고 검을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마그너스가 손자에게 하사한 검을 멋대로 빼앗고도 멀쩡할 수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저 여자가 어디 상식이라는 것으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인가?
레이첼 리텐슈노프는 말도 안되는 미친 짓을 대놓고 벌여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인간이다.
미스틸테인을 지그시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으스스하게 번들거리는 것이, 절대 내 상상이 그저 억측에 불과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레이첼 누님?”
“왜 그러니?”
“너무 지그시 쳐다보시는데요.”
“갖고 싶으니까?”
아니, 미친년아. 이거 내 거라고.
“아니, 저랑 대련하려고 부르신 거 아니십니까?”
“그치만, 원하는걸?”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은 살짝 달떠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어째서인지 주어가 빠진 채 튀어나온 발언. 묘하게 위험하다.
[거참, 슬픈 일이로다. 어찌, 저런 처자가 그런 저주받을 괴식에 빠졌을꼬! 내 손수 교육을 통해 내려 올바른 식성을 가르쳐주고 싶구나.]
데우스의 정신나간 탄식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도망칠까.’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그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무려 6성이다.
그것도 극후반의 6성.
‘절대 못 도망쳐.’
거기다가 어찌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고 쳐도, 앞으로는? 계속 검을 빼앗으러 그녀가 찾아올 텐데?
이건 선을 긋지 않는 이상 끝없이 이어질 일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레이첼은 아직은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럼 내기를 하는 건 어떠니?”
물론 그게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란다. 내기! 나와 검을 겨루는 내기를 통해서, 네 검을 나에게 주는 거지. 어때?”
얼토당토 않는 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릿속이 명검 수집으로 꽉 차 있는 탓일까. 레이첼의 발언은 앞뒤도 안 맞고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대충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내기를 하자는 거군.’
내가 지면 미스틸테인을 달라 이건가?
근데 내가 그딴 걸 왜 해?
“하지만 누님께서는 6성이잖습니까? 5성인 저와 그런 내기를 하기에는 전혀 형평성이 안 맞습니다만.”
“얘, 설마 내가 그런 내기를 제안하겠니? 너는 이 누나를 뭐로 보는 거야?”
글쎄요……. 미친년?
내가 너무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는지, 레이첼이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에 데우스가 감탄하며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굳이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곧 레이첼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10분.”
“10분?”
“그래. 10분. 앞으로 10분간 내 검격을 막아내면 네 승리. 하지만 실패한다면 내 승리. 간단하지?”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음.’
이건 반대급부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얻는 걸 말씀하시지 않으셨는데요.”
“네가 얻을 거?”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10분을 버티면 뭘 얻을 수 있습니까?”
“으음…….”
내 물음에 레이첼이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오오, 찌푸린 얼굴조차도 아름답구나!]
‘미친 소리 할 거면 닥치십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내가 데우스와 투닥거리는 사이, 레이첼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화색을 띄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영지는 어때?”
“……네?”
“네가 이기면, 내 영지를 하나 줄게.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혹시 더 필요하니?”
“…….”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대체 이 검을 얼마나 갖고 싶은 거야?’
영지를 주겠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조건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레이첼은 그걸 거부의 뜻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역시 하나로는 부족하지? 그럼 두 개?”
그녀가 손가락을 두 개 펴서 내게 내밀었다.
영지 두 개?
아무리 미스틸테인이 보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고작 검 한 자루일 뿐이다.
당연히 영지 두 개의 가치는 없다.
“아, 아니. 그…… 괜찮겠습니까?”
하지만 레이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응? 아아, 괜찮아. 어차피 나한테는 영지 따위는 쓸모도 없고. 그리고 그런 보물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 투자를 해야지 않겠니?”
그렇게 대답하며 찡긋 눈을 깜빡이는 레이첼.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걸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가 불러 터졌다고 해야 할지…….’
묘하게 씁쓸했지만 뭐, 일단은 내가 걱정해 줄 바는 아니다. 중요한 건, 저울의 반대편에 올라간 보상이 영지 두 개라는 사실이지.
‘10분이라…….’
나는 입술을 살짝 씹었다.
10분.
길다면 긴 시간이고, 짧다면 짧은 찰나.
절로 고민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능한가?’
못할 건 없다.
이미 멜 랭커스터와 여러 차례 대련을 치러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반격을 배제한 채, 그저 버티는 것뿐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이 미친년이라면 진짜 진심으로 덤빌 거라는 거지.’
레이첼이라면, 절대 손속에 자비를 둘 리 없다는 것.
‘멜과의 대련과는 다르다.’
그 대련은 나의 성장과 수련을 위한 대련.
당연히 멜은 그 대련에 진심을 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레이첼은 다르다.
‘미스틸테인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진짜로 죽일 듯이 공격하겠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영지 두 개…….’
저울의 반대편에 올라간 게 너무 컸다.
너무, 진짜로 압도적으로.
“…….”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검이다.’
미스틸테인은 명검 중의 명검이지만, 솔직히 이 정도 급의 검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내가 잃는 게 그다지 크지는 않다.
물론 검을 빼앗긴 것에 대해서 마그너스가 나를 질책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이건 불가항력 아닌가?
아마 마그너스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선택지는 없는 셈이야.’
여기서 거부한다고 레이첼이 포기할 리는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내기에서 승리한다면?
그녀의 성격상 몹시 아쉬워할 지는 몰라도, 한 입으로 두 말 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기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좋습니다.”
“진짜?”
내 대답을 듣자마자 레이첼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그녀의 눈이 호선을 그었다. 레이첼은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나긋이 중얼거렸다.
“정말 잘 생각했어. 그럼…….”
-스릉!
“어디, 버텨보렴.”
그리고 동시에.
검끝이 쇄도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