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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81화 (81/139)

81화

마그너스는 야외 테이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그는 원목을 반으로 잘라 만든 투박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입에는 반쯤 타들어 간 궐련을 문 채, 느긋이 내 얼굴을 살피던 노인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성인식 연회에서 레이첼, 고 녀석에게 붙잡혔다더니, 대련을 핑계로 흠씬 두들겨 맞은 모양이로구나.”

“예, 뭐…….”

내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리자, 마그너스가 짓궂은 얼굴로 웃음 지었다.

“그래, 결과는 어찌 되었느냐. 네가 이겼느냐?”

“네? 아니, 제가 어떻게 레이첼 누님을 이깁니까?”

내가 손사래를 치자 마그너스가 짐짓 혀를 찼다.

“에잉, 쯧쯧. 천재라는 놈이 그것도 못 하더냐? 열한 살에 5성에 오르면 뭐하누. 제 누이 하나도 못 이기는데. 깨달음은 죄다 헛먹었구만.”

그걸 이기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녀와 내가 서로 나이가 같은 것도 아니고, 처음 검을 잡은 시기도(물론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는 어드밴티지가 있지만) 분명 다르거늘. 대체 어째서 내가 레이첼을 이겨야만 한다는 투인지 모르겠다.

“무어, 그래도 레이첼, 고 녀석이 못난 녀석은 아니긴 하지. 야심이 없다는 단점만 빼면, 네 형제 사이에서 수위를 다투는 녀석 아니더냐?”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도 패배한 게 자랑은 아니다. 다음에는 네 사촌 누이를 이길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하거라.”

“네.”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이고 있으니 마그너스가 손으로 의자를 톡톡 두들겼다. 나는 조용히 걸어가서 노인의 곁에 궁둥이를 붙였다.

가까이 불러놓고도 마그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유유하게 궐련을 태울 뿐이었다.

대체 이 노인이 대체 왜 찾아왔는지 짐작이 가지 않아,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잠시간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을까.

“그라힐, 그 녀석이 또 일을 벌였다.”

마치 툭 던지듯, 마그너스가 말했다.

나는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마그너스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느긋한 손길로 궐련을 매만지고 있었다. 노인의 숨결이 섞인 연무가 마치 탄식처럼 흘러나온다.

곧 마그너스가 찡그린 얼굴로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 벌였다고 표현하는 건 무리가 있구나. 아직 무언가 시작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녀석이 또 요정왕과 만났더구나.”

그것도 이번에는 몸소 움직여서 말이지.

마치 탄식하듯, 마그너스가 중얼거렸다.

하긴, 한탄스러울 만했다.

‘나를 달래서 겨우 문제를 봉합해놨는데, 그라힐 놈이 열심히 터트리고 있으니…….’

혈족 간에는 절대 피를 보지 않도록 엄격한 규칙으로 어떻게든 억눌렀거늘, 웬 망나니 새끼가 자꾸 선을 넘나들며 가풍을 파괴하고 있는 꼴이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게 당연하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건 마그너스의 입장.

당사자인 나에게는 이건 기회였다.

‘그라힐 놈이 또 요정왕을 움직여서 내 목숨을 노린다, 이 말이지?’

어찌 보면, 명분이라고 할 수도 있고.

혈족 간의 유혈 경쟁은 금지한다.

처음 내가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이 규칙이 내 목숨줄을 살려주는 하나의 안전장치였지만, 5성의 경지에 오른 지금의 나에게 이 룰은 제약이었다.

‘수틀린다고 목을 쳐 버릴 수가 없으니까 말이지.’

당장 지금도 그렇다.

지금까지 계속 그라힐이 내 목을 노려왔지만, 나는 마그너스의 눈치를 보느라고 녀석을 칠 수가 없었다.

가주 직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마그너스의 총애를 잃지 말아야 하고, 그 말은 상황이 어떻든 그가 만든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이렇게 자꾸 명분을 세워 주면 이야기가 다르지.’

지금은 다르다.

이미 그라힐은 암살 시도로 계속 내게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상대가 지킬 마음이 없는데, 지키는 사람만 병신이 되는 꼴 아닌가?

이제는 내가 직접 그라힐을 치겠다고 선언해도 마그너스가 막아설 수 없었다.

그건 반대로 나를 병신 취급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근데 뭔가, 이런 상황이 오도록 마그너스가 방치한 것 같기도 한데…….’

만약 암살 시도를 하자마자 그라힐을 즉각적으로 처벌했다면 여기까지 상황이 악화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것을 생각하면 내가 그라힐을 배제할 수 있게 마그너스가 유도한 것 같기도 했지만…….

‘뭐, 굳이 파헤쳐 볼 필요는 없겠지.’

중요한 건, 이제 제약이 풀렸다는 거다.

‘물론, 이건 오로지 그라힐에 한해서겠지만…….’

어차피 상관 없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나?

설사, 마그너스가 내가 날뛰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선다고 해도 소용없을 거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내 형제들이나 큰아버지들이 규칙을 무너트릴 테니까.

‘오대 명가의 가주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경쟁이다.’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한 번이라도 끊어지는 걸 보면, 분명히 이 집안 놈들은 자제하지 못할 거다.

괜히 리텐슈노프의 가풍이 ‘강자존强者尊’이겠는가?

‘당장 제랄드부터 제 형제들을 전부 죽이려 들 테니.’

그건 전생에도 마그너스 사후 발생했던 일이다.

‘장담할 수 있다.’

금기가 깨지는 순간, 그들은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목줄 풀린 개마냥 달려들 거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

마그너스의 물음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노인의 메마른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굳이 이 자리에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악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사촌 형 말이다. 녀석을 어떻게 하고 싶더냐?”

“글쎄요. 규칙을 어겼으니, 가주님께서 직접 적절한 처벌을 내리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짐짓 점잔을 떨자, 마그너스가 피식 웃었다.

“예끼, 이놈!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당장 직접 날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이 제 형한테 암살자 수급을 보내?”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동생 된 몸으로써 예의를 차렸을 뿐입니다. 그저 보답을 보낸 걸 가지고 왜 그러십니까?”

“어쭈! 입만 살아서 그런지 말은 잘하는구나.”

“과찬입니다.”

후우.

마그너스는 다시금 궐련 연기를 내뿜었다.

끝까지 전부 타들어간 궐련에서 잿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마그너스는 남은 꽁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짓눌러 태워버리고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상급반.”

“네?”

“상급반에 올라선 이후라면……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다.”

“……!!”

승낙이 떨어졌다.

이것으로 나는 계속 날 귀찮게 굴 그라힐을 합법적으로 치워버릴 수 있게 되었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조용히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마그너스는 날 보며 착잡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당연하지만, 녀석의 목숨을 앗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지 하나 정도는 용서하겠다는 것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팔다리 하나 정도라…….’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팔다리 중 하나만 없어도 검사는 병신이 된다.

어차피 내 목적은 후계 경쟁에서 지켜야 할 선을 끊어버리는 것과, 계속 날 귀찮게 굴 그라힐을 쳐내는 것.

‘굳이 놈의 목을 베겠다고 날뛰어봤자, 마그너스는 물론이고 볼칸을 분노케 할 뿐이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사지 하나면 충분했다.

* * * * *

드레커를 돌려보낸 뒤에도, 마그너스 리텐슈노프는 여전히 테라스의 의자에 앉은 채 궐련을 피웠다.

한 개비.

두 개비.

그렇게 다섯 개비가 넘어갈 무렵.

“주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그너스는 피우던 궐련을 손끝에서 태워버리며 고개를 돌렸다.

“왔는가?”

마그너스의 물음에 아자르 랭커스터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그너스는 아자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손끝으로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자리에 앉게. 나이 들어서 계속 서 있으면 허리에 안 좋아. 자네도 이제 쉰에 가깝잖는가?”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성큼 다가온 아자르가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는 잠시 마그너스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결단은…… 내리셨습니까?”

“그래.”

“어찌…….”

“상급반에 올라서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네. 물론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지. 그냥, 팔 다리 하나 정도라면 날려버려도 묵인하겠다고 이야기해 주었네.”

“……!!”

마그너스의 대답에 아자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깜짝 놀란 아자르가 황급히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이 사실이 아드님들께 퍼졌다가는 당장 가문이 네 조각으로 쪼개질지도 모릅니다! 주군께서 세우신 규칙 덕분에 리텐슈노프는 이전 세대와는 다르게…….”

“어차피 나 죽으면 아무 의미도 없을 규칙 아닌가?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 와서 깨달았을 뿐이네.”

“……!!”

그 말에 아자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나?”

아자르가 대답하지 못하자, 마그너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당장 현실을 보게. 그라힐 녀석이 그 짓거리를 하는 걸 다른 놈들이라고 모르겠나?”

맞는 말이다.

볼칸, 제랄드, 갈라할, 코르테스까지. 마그너스의 아들들이 과연 그라힐의 폭주를 인지하지 못했을까?

절대 그럴 리 없다.

‘분명히 다들 알고 있겠지.’

손대지 않고 지켜보기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말리는 놈 하나 없어. 그저 오로지 내 입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

“…….”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내가 두려워 참고 있을 뿐, 내 처벌이 없다면 어떻게 되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마그너스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 모습에 아자르는 말끝을 흐렸다. 입 안에서 단어의 조합이 피어올랐다가 마른침과 함께 녹아내린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 부질 없는 짓이야.”

마그너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자르는 그런 마그너스를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이렇게 손을 놓아버린다면…….

‘그건 그저 방기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아자르의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그는 가까스로 튀어나오려던 단어 뭉치를 삼켜냈다. 마그너스가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군이 확고히 결정한 걸 거스를 용기는 아자르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요정왕 제거 계획은 파기합니까?”

“그걸 왜 파기하나?”

마그너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드레커, 그 녀석이 기사단을 맡으면 그때 넘기게. 하긴, 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귀쟁이 여왕이 그라힐 녀석에게 휘둘리는 백치라곤 하지만, 드레커가 제 목을 노리던 녀석을 가만히 둘 리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그너스는 껄껄 웃었다.

그러나.

아자르는 따라 웃지 못했다.

마그너스의 목소리에서 깊은 회한이 느껴진 탓은 아니었다. 시원하게 웃는 마그너스가 얼굴을 찡그릴 때마다, 노인의 눈가에 잘게 패이는 주름 자국이 너무나도 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때, 검제劍帝라 불렸던 위대한 노인의 삶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을 준비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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