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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82화 (82/139)

82화

레이첼이 다시금 나를 찾아온 건 며칠 후였다.

-툭!

레이첼이 가벼이 던진 서류철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 힐끔 고개를 들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무엇입니까?”

“저번에 대련 때 말했던 거.”

그녀는 내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눈을 굴렸다. 소파 옆에 놓인 미스틸테인을 힐끔거리는 레이첼의 시선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내 거라고.’

수많은 명검을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계속 욕심을 내다니. 어지간히 이 검이 탐나는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나는 줄 생각이 없었다.

“대련에서 말씀하셨던 거라면, 영지 말입니까?”

“맞아.”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영지라…….

불공정한 거래지만, 어쨌든 주기로 약속한 것이니 받아야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파에 기댄 채로 손을 쭉 뻗어 서류를 집어 펼쳤다.

그리고는 두 눈을 의심했다.

“어?”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서류철에 적힌 내용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이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당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레이첼의 핵심 영지 아닌가?’

내게 양도하겠다는 두 영지 중 한 곳이, 생각보다 꽤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바르헴 평야라는 곳인데, 이곳은 콜마운트와 비교하면 스무 배는 더 좋은 영지였다.

큰 강의 지류를 끼고 있어서 수운의 요충지였고, 영지에 산출량이 많은 광산이 세 개나 있었다.

강 옆에는 넓은 평야가 있어 밀 농사가 활발했는데, 소출량도 많아서 걷히는 세금이 꽤 짭짤했다.

‘심지어 광산 중 하나는 금 광산인 거로 아는데…….’

이런 중요한 영지를, 그딴 웃기지도 않는 내기 때문에 나에게 주겠다고?

처음에는 글자를 잘못 읽어서 착각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서류에 기재된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첼 누님.”

“응.”

“이거 서류 잘못 가져온 것 아닙니까?”

“왜? 뭔가 문제라도 있니?”

내 반응이 좀 이상했는지, 레이첼이 성큼 내게 다가왔다. 나는 서류철 한 부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기, 제게 양도하는 영지 말입니다. 이거, 그…… 누님이 가진 핵심 영지 중 하나가 아닙니까? 영지 이름을 잘못 작성하신 거 같은데…….”

“아아, 아냐. 그거 맞아.”

……이게 맞다고?

“이걸 양도하시겠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자, 레이첼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여긴 싫어? 다른 곳으로 바꿔줄까?”

“아,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고작 그런 내기 한 번으로 받기에는 너무 과분한 대가가 아닌가 싶은데요. ……왜 이곳을?”

“그냥 주사위 던져서 고른 건데?”

몹시 해맑은 얼굴로 레이첼은 그리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주사위를 굴려서 뽑았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뭐…… 레이첼이 이런 걸 별로 중요시하는 인간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좀 너무 욕심이 없는 거 아닌가 싶다.

“너무 과분하게 느껴진다면, 보답으로 그 검이라도 주던가. 그거면 난 만족할 것 같은데.”

한데, 대답이랍시고 이딴 소리를 들으니 뭔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대체 미스틸테인을 얼마나 갖고 싶은 거야?’

.

.

.

‘……뭐 어때?’

미친 사람을 정상인의 잣대로 판단하는 게 바보짓이지. 나로서는 손해 볼 거 없으니 상관없다.

[양심 없는 놈.]

데우스가 빈정거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불공정한 거래면 어떤가?

본인이 상관없다는데.

‘내 알 바 아니지.’

마음을 편하게 먹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영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검은?”

“그건 못드리고요. 내기였잖습니까?”

“칫.”

내 대답에 레이첼이 혀를 찼다.

“그래…… 내기였으니까. 알겠어.”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여전히 레이첼의 시선은 미스틸테인에 꽂혀 있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그런 눈으로 봐도 안 됩니다.”

나는 슬쩍 검집을 끌어당겨 테이블 아래로 밀어넣었다. 그녀의 성정 상, 마구잡이로 내 검을 강탈할 리는 없겠지만 저런 눈을 하고 있으니 왠지 불안하다.

견물생심이니, 차라리 치워버리는 게 낫겠지.

테이블 밑으로 사라지는 미스틸테인을 아련하게 쳐다보는 레이첼에게 나는 서류철을 흔들어 보였다.

“누님, 여기에 서명하면 됩니까?”

“……응, 그래.”

나는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내 뒤에서 대기하던 세르폰이 곧장 펜 한 자루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서류철에 서명을 휘갈기며 생각했다.

‘좋아.’

이것으로 내 소유 영지는 세 곳이 되었다.

핵심 영지로 평가받는 바르헴 평야를 얻었으니, 그 가치는 평범한 영지 세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물론 그만큼 내가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몫도 늘어났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영지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차후 어떤 식으로 후계 경쟁이 흘러갈지 모른다.

전생에야 다른 대안이 없어 제랄드가 마그너스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리매김하였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일단 나라는 변수도 있고, 내가 불러일으킨 나비효과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 파란을 몰고 올지 모른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영지는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손에 쥐어야 했다.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될 군자금을 모을 곳이 영지를 제하면 딱히 없는 것도 이유겠지만, 영지는 여차하는 상황에서 병력을 뽑아낼 수 있는 중요한 전략 자산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할 만큼 상황이 위태롭지는 않지만.’

마그너스 리텐슈노프가 노화로 죽고 후계 경쟁이 촉발되는 건 앞으로 10년은 훨씬 더 남은 미래의 일.

‘이 정도라면…….’

그때까지 대비하기엔 충분했다.

고개를 쭉 빼고 여전히 미스틸테인을 힐끔거리는 레이첼을 바라보며, 난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 *

“……그래서, 그렇게 영지를 뜯어왔다고?”

내 설명을 들은 멜이 기막힌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기가 막혀서 그런 게 맞나? 순간 드는 의심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보니 그가 내비친 표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생각이 절반이오, 나머지 반절은 내가 소 뒷걸음치는 격으로 이득을 얻은 걸 고까워하는 것이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무 노골적으로 속내가 표정에 드러납니다만.”

“너 같으면 배가 안 아프겠냐? 칼 10분 휘두르고 영지를 받아왔다는데? 당장 아무 도시 광장 한복판에 서서 그딴 소리 입에 한번 담아봐라. 다짜고짜 칼 들고 다가오는 거지들이 몇 명이나 되나.”

“그렇다고 멜 경이 저잣거리 거지는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칼 들고 널 찌르지는 않잖냐?”

대신, 오늘 훈련은 좀 빡세게 굴리겠지만.

멜이 손에 든 수련검을 휘저으며 그렇게 말하니, 그간 훈련을 핑계로 내게 사적 폭력을 종종 휘두르는 게 아닌가 하는 오랜 의혹이 드디어 사실로 밝혀졌다.

물론, 그걸 안다고 딱히 바뀌는 건 없었지만.

“검이나 뽑아.”

“네.”

그렇게 언제나처럼 훈련을 빙자한 폭력이 이어지기를 서너 시간.

오늘따라 평소보다 훨씬 매섭게(아무리 생각해도 영지가 원인이었다)몰아치는 멜의 기세에 내가 체력적 한계를 여실히 깨닫고 있을 무렵, 마침 딱 좋을 시기에 마리 유모가 점심 식사를 들고 찾아왔다.

“오, 식사 왔네. 먹고 하자고, 먹고.”

요즘 들어 마리의 칠면조 찜에 입맛을 들인 멜은 유모가 끌고 온 트레이를 보곤 얼굴에 화색을 띄었다.

그제야 나는 미스틸테인을 내던지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땀에 흠뻑 젖은 전신의 근육이 덜덜 떨린다.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진짜로 끌어다 쓸 수 있는 체력은 전부 소진한 것 같았다.

‘……내 예상대로다. 역시 약발로 체격을 최대한 끌어올린다고 해도 한계는 있구나.’

케찰코아틀의 심장과 성장촉진제를 이용해 내 나잇대에 비해 체격과 체력을 끌어올리기는 했으나, 그것이 무적의 육체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체력이라는 것은 계속 단련해 키우는 것이지, 약을 먹는다고 알아서 커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렇게 약을 통해 부풀린 육체 또한 완전한 성인의 그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끽해봐야 열다섯 살 정도일까?

따지고보면 처음부터 완전한 육신을 만들려 한 게 아니라, 중급반을 조기 졸업하기 위해서 내 겉모습만이라도 최소한의 요건을 충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에 따르는 부작용은 감수하는 수밖에.

‘사실 부작용이라고 할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내 체격은 커졌고, 육신은 성장했다.

단지 그 몸뚱이에 걸맞은 체력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을 뿐인데, 그거야 기르면 될 일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가장 효율적인 단련법 정도는 머릿속에 빠삭하게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효율적이며 내게 적합한 방법을 꺼내 쓰면 될 일이다.

‘체력 단련 시간을 조금 더 늘려야겠군.’

속으로 그렇게 결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힐끔 돌리자, 벌써 자리에 앉아 열심히 칠면조 다리를 베어무는 멜 랭커스터의 모습이 보인다.

연무장 한켠에 깔아둔 테이블에 어느새 식탁보까지 펼쳐두고 식사에 열중하는 게, 참 본격적이었다.

‘마리 유모의 요리 솜씨가 저 인간의 입맛에 맞는 걸까, 아니면 그냥 칠면조를 좋아하는 걸까.’

둘 중 하나는 사실일 터인데, 요즘 한 달 내내 칠면조만 먹고 있다보니 어떤 게 진짜일지는 감이 안 왔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터덜터덜 테이블로 가 털썩 자리에 앉고 보니, 맛나다고 소문난 부위인 다리와 날개는 이미 멜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덩그러니 접시 위에 놓인 뼈다귀를 보니 없던 심술도 절로 솟아났다.

“멜 경, 양심이 있으십니까? 다리를 다 드셔요?”

“늦은 놈이 잘못이지. 안 그런가, 유모?”

“……앞으로는 부위별로 썰어서 따로 담아오든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리 유모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그리 답했지만, 멜이 그런 것을 신경 쓸 위인은 아니었다.

“따로 담는다고 못 뺏어먹던가?”

오히려 마치 세상 통달한 현자마냥 저렇게 중얼거리니,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복장 터지는 일이었다.

그나마 자기가 내 음식을 뺏어먹는다는 자각은 있으니까 다행이려나?

마리 유모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넉살 좋게 넘기며 나이프로 가슴살을 푹 찍은 멜이 흘리듯 중얼거렸다.

“아 맞다, 내가 외부 훈련 일정을 하나 잡아놓았다.”

“외부 훈련, 말입니까?”

의아한 소리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멜은 고기가 찍힌 나이프를 가벼이 흔들며 답했다.

“그래. 괜찮은 훈련 장소를 하나 찾았단 말이지. 이미 마그너스 님과 아자르 단장에게도 허락을 받았다.”

“……괜찮은 훈련 장소라는 게, 설마 저번처럼 구덩이는 아니겠죠?”

“구덩이요?”

사정을 모르는 마리 유모가 눈을 깜빡인다. 멜은 나이프에 찍힌 고기를 베어물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건 아니지. 어차피 이제는 걷어차서 쳐넣어도 기어나올 수 있잖아. 5성인데.”

“그건 그렇죠.”

“……걷어차서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고요?”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에 마리 유모가 이마를 짚었다. 물론 우리 두 사람 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하여튼, 원래는 한 두 달 뒤에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오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좀 바뀌었다.”

“어째서?”

“내가 알기로는 레이첼이 이제 곧 7성을 바라볼 텐데, 그런 녀석이랑 10분 간 대련할 수 있는 수준이면 훈련 속도를 좀 올릴 필요가 있잖냐?”

“그렇긴 하죠.”

“그리고 네 영지의 건도 있고.”

“영지요?”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한 훈련 장소가 고대 유적이거든? 근데 네 영지가 거기 근처더라고. 어차피 주인 바뀌었으니, 네 영지도 한 번쯤 확인하고 단도리 치러 가야할 텐데. 한 번에 처리하는 게 편하지 않겠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멜이 말한 유적이 어디인지 곧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바르헴 평야 근처의 고대 유적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나?’

아라크네의 연옥.

그곳은 전생의 내가 혼자 공략해냈던 유적이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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