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한 일주일 뒤에 출발하면 될 것 같다.”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도중, 턱을 질겅대던 멜이 툭 던지듯 말했다. 나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일정이 정해졌습니까?”
내 물음에 멜이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유적에 먼저 들렸다가, 오는 길에 네 영지를 확인하는 식으로 갈 예정이다. 아, 물론 바르헴 평야만 말하는 거야.”
“그야 당연한 말이잖습니까. 바르헴은 유적 근처에 있지만, 다른 하나는 정 반대편에 있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다른 한 곳에는 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두 곳 다 한 번씩은 들려야 할 거다.
‘레이첼이 영지 관리를 똑바로 했을 리가 없으니까.’
검과 검술을 제외하면 세상만사에 한 톨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그런 사람이 영지의 세입을 제대로 챙겼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레이첼이 영지 관련 자료랍시고 서류를 전달해주었는데, 솔직히 엉망진창이었다.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바르헴 정도의 영지에서 나와야 할 세입이 고작 콜마운트의 두 배 정도뿐일 리가 있나.
비리와 탈세가 만연해 있는 게 분명했다.
‘한 번 가서 푸닥거리해 줘야 말을 듣겠지.’
이전 주인은 그런 면에서 너그러웠을지 몰라도, 새로 올라선 주인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몸소 깨우치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뭐, 적당히 해라. 적당히. 아무리 영지가 네 거라지만 너무 꽉 조이면 목 졸려 죽는다.”
내 속내를 읽었는지, 멜이 턱을 질겅대며 타박했다.
은근히 저 질겅대는 모습이 거슬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 쩝쩝거리는 소리, 좀 어떻게 안 됩니까?”
“이건 씹는 거잖냐. 방법이 있겠냐?”
마리 유모에게 혼이 난 뒤로, 멜은 더는 연무장에서 궐련을 피우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그가 궐련을 끊은 건 아니었다.
그 대신 대체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씹는 연초’라는 걸 가져와서 씹어대기 시작했다.
마리 유모는 그나마 연기가 풀풀 날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기꺼워하는 것 같았지만…….
‘무슨 애들도 아니고.’
사실 연기 날리는 것보다는 서른 살 넘는 성인이 쩝쩝거리고 있는 게 더 꼴사납다.
전생에 나도 궐련깨나 폈었던지라, 연초를 끊는 게 어렵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차라리 이전처럼 연기 뿜던 시절로 돌아갔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리고 지금 네가 영지 걱정할 시간이 있냐? 유적에서 어떻게 버틸지 생각하는 게 더 급할 텐데?”
맞는 말이었다.
멜의 말마따나, 지금은 아라크네의 연옥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게 더 중요했다.
물론, 내가 할 고민은 유적에서의 생존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 인간한테 안 걸리고 유적을 털 수 있을까?’로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와 멜, 세르폰과 마리 유모는 함께 마차를 타고 아라크네의 연옥으로 향했다.
개인용 고급 마차(내 사비를 들였다)로 움직인 탓에, 이동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마리 유모가 함께한 터라, 멜이 계속 ‘씹는 연초’를 질겅거려서 신경이 거슬린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대체 네 유모는 왜 데려온 거야?”
“재무 상태를 확인하는 데 필요하니까요.”
아닌 게 아니라, 마리 유모는 영지를 장악하는 데 꼭 필요한 인재였다.
나도 그렇고, 세르폰도 서류 작업에는 젬병인 터라, 단순히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다, 는 정도를 넘어서서 어떤 부분에서 비리가 있었는지를 밝혀내려면 마리 유모의 회계 지식이 꼭 필요했다.
“쳇. 이래서는 궐련도 못 피겠구만.”
이제는 씹는 연초도 질렸는지, 유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멜은 유적으로 향하는 내내 투덜거렸다.
“도착해서 피우면 되잖습니까?”
“그 시간이 괴롭다, 이 말이다.”
“좀 참으시죠. 어차피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그렇게 말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내 것이 된 영지, 바르헴 평야였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평야는 마치 체스판처럼 격자무늬로 나누어진 밀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렇게 거대한 밭이 있는데, 소출이 그따위로 나오는 게 말이 되나.’
저 밀밭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이곳의 영지 관리인이 비상식적인 인간으로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간이 부은 거야?’
아무리 그녀가 관심을 안 가진다지만 리텐슈노프의 직계 혈통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보고서를 올리다니.
목숨이 한 아홉 개쯤 있는 고양이 인간인가 싶다.
‘……고양이라.’
고양이 생각을 하니,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도지를 향했다.
분명 유적에서 나왔고, 최초의 형태를 볼 때 가디언 비슷한 것이 분명한데, 정작 하는 짓만 보면 영락없는 애완동물과 다름 없는 녀석.
[분명 대단한 놈이다. 겉모습만 그럴 뿐, 절대로 평범한 가디언은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성장을 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데우스가 그렇게 강조하는 걸 볼 때, 절대로 보잘 것 없는 녀석은 아닐 터. 문제는 대체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걸까?
‘성장이 가능하다는 걸 보면, 지금보다 더 커지거나 강해질 수 있다는 것 같은데…….’
성장시킬 방법을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대충 어림짐작 하기에는, 고대 가디언의 코어를 먹이면(?) 무언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아라크네의 연옥 안에도 아라크네가 부수지 않은 가디언이 몇 개 남아있긴 하니까…….’
이번 기회에 그 코어를 수집해와서 한 번쯤 줘 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어느새 마차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마차 문을 열고, 세르폰의 호위를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곧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구덩이였다. 어지간한 영주성 성벽 둘레 크기의 구덩이는 그 깊이도 꽤 깊었는데, 한 가운데에는 마치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기둥이 있었다.
기둥에는 사람 두세 명이 드나들만한 구멍이 있었는데, 바로 저곳이 아라크네의 연옥의 입구였다.
“좀, 황량하네요.”
마리 유모가 구덩이 안쪽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구덩이 바깥에는 빙 둘러치듯 마을 비슷한 게 형성된 것과 대조적으로 구덩이 안, 특히 기둥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가끔씩 밖으로 빠져나오는 던전 거미가 숨어들거나 자리잡을 만한 곳을 미리 치워버린 듯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마치 발굴 현장 같습니다.”
세르폰이 그리 평했다.
실제로 다를 건 없었다.
‘유적은 보통 땅 속에 묻혀 있는 게 대부분이니까.’
사실, 지표 밖으로 드러나 있는 유적이 특이한 것이다. 대부분의 유적은 발굴에 준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세상에 그 모습이 드러났다.
아라크네의 연옥 또한 마찬가지로,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이 고대 문헌을 뒤적거린 끝에 땅을 거의 해집어놓듯이 해서 가까스로 찾아낸 유적이었다.
난생 처음 본 유적이 신기했는지, 마리는 구경하느냐고 여념이 없었다.
어디론가 정신이 팔려 있는 건 세르폰도 마찬가지였는데, 경력 상 세르폰이 유적을 처음 보았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도 마리 유모를 신경쓰느라고 그런 것 같았다.
[그으으윽!]
그 모습이 눈꼴이 시린 탓인지, 데우스가 기괴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 사이 뒤에서 몰래 궐련 한 개피를 피고 온 멜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자, 그럼 갈 사람은 가고, 들어갈 사람은 들어가야지. 거기 둘은 이 근처 여관이라도 한 곳 잡아두라고. 훈련이 끝날 때까지 지낼 곳이 있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 말에 세르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떠나보낸 뒤, 나와 멜은 곧장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가끔 길을 잃고 빠져나온 새끼 던전 거미를 사냥하러 내려가기 위해서인지, 구덩이에는 가는 샛길이 하나 나 있었다.
“그래서, 훈련은 어떻게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기둥 앞 유적 입구에 도착하자,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려 멜에게 그렇게 물었다.
“유적 초입부터 중반까지, 대충 던전 공략하는 것처럼 몇 번 돌릴 생각이다.”
멜은 어느새 빼물은 궐련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말이 유적이지, 사실상 던전이나 다름 없잖아?”
“그건 그렇죠.”
“아라크네인지 아크라네인지 하는 거미는, 최심부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하면 빠져나오지 않는다니까. 초입부터 훑듯이 슥 털면 되겠지.”
“근데, 그게 훈련이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솔직히 아라크네의 연옥은 우두머리인 아라크네의 힘이 압도적이기에 공략이 불가능할 뿐. 아라크네를 따르는 다른 거미들은 그다지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고 해봤자 5급 정도 되려나? 심지어 그 정도 되는 거미 숫자는 몇 마리 안 될 텐데.’
처음에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훈련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한데, 멜의 표정은 그런 문제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곧바로 멜이 설명한 내용이 그저 면피용 핑계일 뿐이라는 걸 눈치챘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모양인데.’
설마 훈련 명목으로 던전 거미의 독을 노리는 건 아닐 테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생각을 해보자.
멜의 평소 즐겨 쓰는 훈련 스타일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만한 일을 던져준 뒤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실력이 상승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 던전에서 내가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만한 일이……. 딱히 있나?’
아라크네를 직접 마주하는 게 아닌 이상…….
문득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곧바로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치솟았다.
“설마……!”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멜을 돌아보았다.
아니, 돌아보려 했다.
-퍽!
“억!”
멜가 내 등짝을 뻥 걷어차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런 젠장할, 그냥 설명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나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기둥의 수직 동굴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입구에서 멜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웅웅 울려퍼졌다.
“거미랑 술래잡기 열심히 해라!”
그와 동시에, 쿵 하는 굉음이 울려퍼지자.
멜이 방출한 어마어마한 마나의 파동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묵직한 존재감이 가득 담긴 파동.
이 정도라면 필히 유적 최심부에 잠들어 있는 아라크네를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빌어먹을 인간 같으니라고.’
그렇게 이를 가는 순간, 순식간에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수직 동굴 밑바닥에 있는 호수에 빠졌다.
재빨리 헤엄쳐 호수를 벗어났다. 입안에 들어간 물을 퉤퉤 뱉어낸 뒤, 나는 물기를 털어내며 혀를 찼다.
“에휴.”
절로 짜증이 치솟았지만, 곧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멜이 나를 감시하는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되었다면, 분명 비밀통로로 들어가서 아티팩트를 빼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기분은 좀 나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차라리 이 편이 더 나았다.
‘멜, 그 빌어먹을 인간은 내가 숨어서 도망다니느라 개고생 하기를 기대했겠지만…….’
그렇게는 안 되리라.
나는 비밀 통로로 꿀만 빨고 나올 거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