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입구 호숫가를 벗어나면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는 빠르게 움직여야 해.’
전생보다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전생에 내가 이 유적을 공략하는 데는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일부러 늦장을 부린 건 아니었다.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 그저 느긋하게 유적을 탐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시간 여유가 조금도 없다.
‘멜, 그 인간이 아라크네를 깨워버렸으니까.’
평소에는 하루 종일 유적 최심부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둥지에 가까이 접근해야만 눈을 뜨는 몬스터가 아라크네였다.
내가 전생에 찾아냈던 비밀 통로는 미로 중간에 존재하니, 계획대로라면 나는 아라크네와 마주칠 일도, 녀석을 깨울 일도 사실상 없는 셈이었다.
하지만.
멜이 마력 파동을 퍼트려 아라크네를 깨워버린 탓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소드마스터가 작정하고 내뿜은 파동이다. 그 거미 녀석이 안 깨어났을 리가 없어.’
아니, 그저 잠에서 깨어나기만 했겠는가?
제 단잠을 깨우고 영역을 침범한 자를 찾기 위해, 둥지를 벗어나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귀찮게 됐네.’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원래 아라크네는 깨어 있을 때도 제 둥지인 최심부 근처를 잘 벗어나지 않는 몬스터였다.
공략대가 유적 안에 들어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아라크네 입장에서 어쭙잖은 공략대는 제 발짓 한 번에 갈가리 찢겨나갈 벌레들이나 다름없다.
벌레가 제 둥지 안으로 들어온다면 당연히 응징해야 하겠으나,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면 굳이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라면?’
물론 실제로 멜은 유적 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파동을 느낀 아라크네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소드마스터는 아라크네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
당연히 침입자를 찾아 제거하려고 할 것이다.
‘그를 위해서 유적의 미로를 샅샅이 뒤질 테고.’
에휴.
가벼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어지간히 재수 없는 게 아니면 유적 최심부 근처로 가기 전까지는 아라크네를 만날 일이 없었는데…….’
조금 쉽게 가나 싶었지만, 이번에도 멜은 내 몸이 편하게 두지 않았다. 절로 발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나는 유적 미로의 초입에 서서 생각했다.
‘결국은 시간 싸움.’
내가 먼저 아라크네를 피해 비밀 통로에 도착하느냐, 아니면 아라크네가 나를 먼저 찾아내느냐.
나도 이 미로의 구조는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으니, 서로의 조건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술래잡기라고 했었나?’
문득, 멜이 날 걷어차기 전에 마지막으로 던진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절로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렇다면.”
한번 제대로 해줘야겠지. 나는 옷깃에 달린 도플갱어 브로치를 가볍게 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 *
아라크네의 연옥.
입구 기둥 앞에 한 사내가 정좌해 있다.
멜 랭커스터는 입구 기둥에 음각된, 세월에 풍화되어 이제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어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동굴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동굴의 벽에는 검붉은 이끼가 가득히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저 붉은 이끼가 지금까지 동굴에서 죽은 공략대의 핏물을 머금어 저주받은 것이라고 떠들었지만, 멜이 보기에는 그냥 동굴 이끼의 변종일 뿐이다.
이렇듯,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과, 실제 현실은 크나큰 괴리가 있었다.
“이 유적도 그렇지.”
멜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 속에서 작은 쌈지를 꺼냈다. 슬쩍 쌈지를 열던 멜이 움찔 몸을 떨었다.
곧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씹는 담배가 든 쌈지를 동굴 안으로 집어던지고는 궐련을 꺼내 물었다.
‘진짜 사실과, 알려진 상식에 큰 차이가 있으니까.’
아라크네의 연옥은 미공략 유적이다.
그 이유는 유적 내부에 수백 년 묵은 던전 거미, 아라크네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크네는 무려 추정 10급의 몬스터로, 지금까지 수많은 침입자를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정도로 위험하고 호전적이다.
‘……라니, 웃기는 소리를.’
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놈은 그런 몬스터가 아니다.
무려 직접 들어가 확인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덩치가 좀 크고, 나이값을 좀 할 뿐. 솔직히 녀석은 그냥 평범한 던전 거미와 행동 방식이 다르지 않지.’
직접 경험해 본 결과, 녀석은 10급 몬스터가 맞았다. 당연히 등급에 걸맞는 강함도 지니고 있었다.
하나.
호전적이라느니, 피를 탐한다느니, 침입자를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느니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정보는 죄다 잘못된 이야기에 불과했다.
물론 녀석이 멜에게 작정하고 죽자고 덤비긴 했으나, 그야 멜 자신이 아라크네가 목숨을 걸고 싸워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강대한 상대니까 그럴 뿐.
일부러 침입자를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잔혹한 몬스터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간단한 이야기니까.’
왜 유적에 침입한 공략대가 전멸했는가?
아라크네의 새끼일 게 분명한 거미들을 죄다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공략대는 던전 거미가 보이는 족족 잡아서 독을 채취했을 거고. 알에서는 더욱 더 고순도의 독을 얻을 수 있으니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 거다.
‘알을 낳은 어미를 분노케 하기엔 딱 좋은 짓이지.’
아라크네가 유적에 기어들어온 침입자를 하나도 남김 없이 죽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사실 녀석은 그저 제 새끼를 보호하기에 여념없는 어미 몬스터에 불과하니까…….’
녀석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아라크네는 절대로 침입자를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까 전에 그가 발로 걷어차서 집어넣은 드레커 리텐슈노프도 마찬가지다.
‘아라크네의 입장에서 꼬맹이는 굳이 죽일 이유가 없다.’
물론 드레커가 알을 건드린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꼬맹이가 바보도 아니고, 녀석이 절대로 그딴 짓을 할 리가 없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 보면, 드레커는 굉장히 머리가 잘 돌아가고 사리 판단이 올바른 녀석이다.
딱히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디 자빠트리고 싶은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닐 테니(애초에 그럴 나이도 아니지만) 드레커가 독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설사 아라크네가 모종의 이유로 드레커를 죽이려 든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녀석이 정도 이상의 살기를 내뿜는 걸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으니까.’
쉽게 말해서, 안전상의 문제는 없다는 거다.
“후우.”
멜은 가볍게 연기를 뱉어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열한 살의 나이에 5성의 성취를 거두었다.’
드레커의 성장 속도는 괴이할 정도로 빠르다.
최고의 재능과 끝없는 노력이 결합하였기에 가능하다, 라고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마치 속임수를 쓰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되었다는 건 아니었다.
드레커는 충분히 5성이라는 성급에 걸맞은 성취를 거두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빠르게 강해지고 말았어.’
지니고 있는 힘에 비해, 그에 걸맞은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는 것일까.
‘보통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녀석이라도 5성을 달성하는 시기는 스무 살에서 스물 세살 무렵.’
처음 검을 잡는 게 8살 정도이니, 12년에서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얻은 성취로 그 성급을 얻는 것이다.
그에 비해 드레커는 고작 3년 만에 5성이 되었다.
‘깨달음을 가다듬는 게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번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자신은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는 강대한 적을 상대로 겪는 진정한 실전.
그것은 어찌되었든 대련이라는 틀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멜은 제공해 줄 수 없는 경험이다.
‘아라크네와 맞부딪치며, 지금까지 얻은 깨달음을 가다듬어라.’
멜 랭커스터는 그렇게 생각하며, 궐련을 픽 튕겼다.
* * * * *
-쿠르르르릉!
엄청난 굉음이 유적의 미로를 따라 울려 퍼진다.
마치 수백 기의 기병이 내달리는 것 같은 소리.
바로 아라크네가 질주하며 내는 소음이었다.
-두두두두두!
미로를 내달리는 아라크네가 마치 쇠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질주에 뒤따르는 육중한 발소리가 비명과 섞여 두려운 하모니를 자아낸다.
-키리리리릭!
내지르는 발걸음에 미로의 바닥에 깔린 석판이 산산이 부서진다. 좁은 길은 몸으로 밀어붙여 부숴버린다.
미로를 사실상 재건축하는 수준이었지만, 아라크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유적의 미로는 그녀가 세운 것도 아니었기에 부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미로는 그녀와 그녀의 자식들을 노리는 침입자들이 숨을 공간만 제공해줄 뿐이니,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훨씬 더 좋은 선택지일지도 몰랐다.
-키리리리릭!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아라크네의 여섯 눈동자가 휙휙 돌아가며 사방을 훑었다.
시커먼 수정 같은 눈알이 초초하게 번들거리며 허공에 남은 마나의 흔적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유적을 샅샅이 살펴도 침입자의 흔적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야 멜 랭커스터는 파동만 내뿜었을 뿐 유적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아라크네가 알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적이 숨었다고 판단했다.
-키리리릭…….
아라크네가 탄식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가 둥지로 삼은 유적의 크기는 광대했고, 숨을 곳은 그야말로 사방에 넘쳐났다. 그 모든 곳을 전부 다 살핀다는 건 너무나도 지난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아라크네가 다시 육중한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키릭?
저 먼 곳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그녀의 여섯 눈알에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의 형체.
인간이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머나먼 거리에서 본 형체지만, 그녀가 인지하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아라크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곧바로 그녀의 여덟 다리가 빠르게 땅을 박찼다. 거대한 몸뚱이가 순식간에 수십 개의 벽을 돌조각 무더기로 만들며 쏘아지듯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덜커덕!
미로 한구석 모서리 부분의 타일이 툭 뒤집히더니, 그 안에서 검은 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개박살이 난 미로의 광경에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피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걸로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지.”
도플갱어는 자신보다 약하니 얼마 못 가 죽어버리겠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 미끼로 써먹기에는 충분했다.
‘도플갱어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아니, 애초에 도플갱어의 브로치는 원래 이런 식으로 쓰라고 만들어진 아티팩트다.
오히려 이건 제대로 잘 사용하는 게 아닐까?
‘물건은 제 역할대로 잘 사용될 때 가장 행복하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으니까. 난 잘 쓰고 있는 셈이지.’
속으로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중.
“응?”
드레커의 가슴팍에 매달린 브로치의 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까지는 거울이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는데, 다시금 사물을 비출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것은 소환했던 도플갱어가 방금 소멸했고, 다시금 새로운 도플갱어를 불러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크, 벌써 죽어버린 건가.”
빨리 움직여야겠군.
드레커는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재빨리 비밀 통로 안에서 빠져나왔다.
다음 비밀 통로가 있는 곳까지는 약간의 미로를 통과해야 하지만, 아라크네가 벽을 죄다 박살내어 준 덕분에 지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쿠구구구궁!
그 순간, 다시금 아라크네의 발소리가 들렸다. 절로 움직임이 빨라지고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린다.
아라크네의 감각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마나를 갈무리했기에, 움직이는 게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다음 비밀 통로에 도착한 드레커는 얼른 석판을 들어올려,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다 들어간 뒤, 석판을 끌어당겨 통로의 존재를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드레커가 통로 안으로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질주하는 아라크네가 비밀 통로를 스쳐 지나갔다.
아라크네가 아무런 행동 없이 지나친 걸 확인한 드레커는 통로 안쪽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기에 그는 몰랐다.
빠르게 달리며 스쳐 지나갔던 아라크네의 흑색 눈알이, 그가 들어갔던 통로의 입구를 훑었다는 사실을.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