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 이후.
-탁탁탁!
나는 계속해서 아라크네에게 도전했다.
마주치는 순간 도망치는 게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아라크네를 공격한 것이다.
내 태도가 바뀐 만큼, 아라크네의 대응도 바뀌었다.
처음 몇 번은 녀석도 분노하여 감히 자신에게 덤벼든 나를 철저히 응징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덤비자 이제는 귀찮다는 듯 대충 처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정도로도 만신창이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크윽.”
[이번에는 좀 아프겠구나. 크흐흐! 드디어 꼬맹이, 네가 고생하는 꼴을 보는구나! 만세다, 만세!]
하지만 부상이라고 해봤자 잠시 쉬면 나을 정도.
그에 비해 내가 얻은 건 어마어마했다.
멜은 ‘깨달음’을 위해 나를 이곳에 데려왔다.
[깨달음이라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냥 무언가 깨우친 것일 뿐이니. 하찮고 사소할 뿐인 것도 깨달음이 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발전할 여지를 느끼거나, 잘못된 방식을 고치는 것도 말이다.]
그 의도대로 나는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오러를 뽑아낼 정도에 불과했던 블러드하운드 검식의 묘리를 더욱 더 깊이 깨우친다거나.
바인더샤칼의 오러로 구현한 송곳니를 지금보다 더 날카롭게 다듬는다거나.
아라크네를 기습하기 위해 마나를 더욱 더 갈무리해 흔적을 숨기는 법을 익힌다거나.
참으로 보람차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저 아라크네에게 덤비는 것만이 내 일과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모든 비밀 통로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라크네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건, 그 통로를 부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이 막힌 곳에 발을 들였다가 갇히면 끝장이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파괴된 통로는 하나도 없었다.
‘하긴…… 당연한 건가.’
아라크네가 봤을 때, 통로는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곳에 불과하다.
‘그런 곳을 굳이 파괴할 필요까지는 없었겠지.’
한가지 더.
통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어떻게 아라크네가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통로 내부에 종종 새끼 던전 거미가 숨어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쯧.’
이곳에 있는 던전 거미는 죄다 아라크네의 새끼일테니, 그 어미인 아라크네가 통로의 존재를 아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거……. 전생에 느긋하게 여길 돌아다녔던 거, 꽤 위험한 짓이었던 거 아냐?’
문득 든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지금도 알고 있는 통로의 존재를 그때라고 까먹었을 리는 없으니, 전생의 나는 아라크네의 손바닥 위에서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진짜로 재수가 좋은 거였구나.’
그래도 어찌 되었든 좋게 넘어갔으니 다행인 걸까?
하여튼.
그런 식으로 나는 수련 기간을 보냈다.
틈이 날 때마다 아라크네에게 도전하고, 체력을 회복하는 시간에는 비밀 통로의 상태를 확인한다.
도전할 만큼 도전한 뒤에는 그날 깨우친 것들을 복기하거나, 검식의 숙련도를 높였다.
시간이 좀 남으면 유적의 가디언의 잔해를 뒤져 도지에게 줄 코어도 확보했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 * * * *
“후우.”
깊게 들이쉰 숨을 내뱉었다.
오늘은 이 유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나는 만전의 상태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미로의 경계선에 섰다. 그건 일주일 간 계속 아라크네를 자극하며 깨우친 것인데, 이 선을 넘어가면 아라크네가 내 침입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거 알아내느냐고 진짜 개고생을 했지.’
생각보다 깊숙이 들어가면 아라크네를 너무 자극해버리고, 이 경계선 바깥에서는 녀석을 부를 수 없다.
이건 몇 번이나 얻어맞으며 알아낸 선이었다.
‘하여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나는 미스틸테인을 꽉 움켜쥔 채, 그대로 경계선을 넘어 달렸다. 이렇게 빠르게 안쪽으로 진입하면, 아라크네가 대번에 달려와 나를 막아선다.
-쿠르르릉!
그리고 내 예상대로, 곧바로 천둥치는 것 같은 발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아라크네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선수 필승!’
나는 달리는 자세 그대로 미스틸테인의 검 끝을 왼쪽으로 끌어내렸다가, 그대로 오러를 피워올리며 올려배기를 날렸다.
“하아앗!”
검붉은 오러가 허공을 그었다.
동시에 붉은 기운이 아라크네의 앞다리를 그었다.
하지만 아라크네는 개의치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그녀의 다리 또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그대로 옆의 벽을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아라크네의 다리가 쏜살같이 나를 따라 휘둘러진다.
그 기둥 같은 다리가 내게 부딪치기 직전, 나는 흑빛 오러가 담긴 검을 날아드는 앞다리에 휘둘렀다.
그리고 순간 세상이 스쳐 지나갔다.
“크으으윽!”
검을 쥔 손을 살짝 비틀어 나는 ‘이빨’을 놓았다. 그제야 아라크네의 다리에서 떨어져나올 수 있었다.
‘성공이다.’
방금 내가 한 것은 바인더샤칼의 새로운 기술이었다.
‘깨물기!’
이전처럼 물어뜯는 게 아닌, 오러로 형성한 이빨을 상대에게 박아넣어 고정하는 기술. 이곳에서 내가 새롭게 구상한 응용 방법이었다.
“좋아.”
그리고 이 기술의 성공은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새로 구상한 기술을 완성했다는 뜻.
그리고 다른 하나.
‘드디어……!’
드디어!
아라크네의 갑각에, 내 오러가 먹혔다!
이전까진 흠집도 내지 못했던 갑각에, 이빨을 조금이나마 박아넣은 것이었다!
[허, 이걸 진짜로 성공하다니.]
데우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라크네 또한 내가 제 갑각을 뚫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아라크네가 금속 찢는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키리리리릭!
“이크!”
나는 재빨리 도플갱어 브로치를 사용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년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솟아났다. 도플갱어는 나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라크네에게 달려들었다.
-키리리릭!
도플갱어가 아라크네의 시선을 끄는 사이, 나는 사전에 조사해 두었던 비밀 통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시간이 없다. 얼른 움직여야만 했다.
축축한 진흙투성이 길을 한참은 기어갔을까.
마침내 통로의 끝이 보였다.
-덜컥!
통로 끝에 설치된 작은 문을 열고, 바로 위에 놓인 석제 타일을 밀어 젖혔다.
숨죽인 채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살핀다.
다행히 아라크네는 보이지 않았다.
“후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통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 통로는 제단의 입구 바로 앞.
그러니까 유적 최심부로 통하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내가 최심부 근처로 향할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아라크네의 반응을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 있는 걸 들키는 순간 이번에는 진짜로 죽을 수도 있었다.
‘뭐, 이미 갑각 때문에 죽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섶에 달린 도플갱어 브로치를 힐끔 살폈다.
다행히 여전히 브로치의 거울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건 내가 미끼로 던져준 도플갱어가 아직 죽지 않고 아라크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뜻이었다.
“좋아.”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제단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제단실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실내 구석구석에 화려한 장식이 가득 달려 있었고, 금은으로 치장된 조각상 몇 개와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기이한 벽화가 그려져 있고, 재단 위에는 마치 핏자국이 흘러내리는 것을 표현한 듯 붉은 금속이 어지러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제단 한 가운데에는 붉게 타오르는 검이 한 자루 꽂혀 있었다. 푸른 불꽃이 넘실거려 어두컴컴한 실내를 밝게 밝히고 있었다.
그 광경에 데우스가 감탄했다.
[오오, 이것 참. 꽤 화려한 함정이로구나.]
그 말대로였다.
저, ‘유적의 보물’처럼 보이는 검은 사실 함정이다.
건드리는 순간 고열의 화염 광선을 내뿜으며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태워 죽이는 함정 말이다.
‘고대인들은 참, 악취미라니까.’
진짜는 그 뒤에 있었다.
나는 제단 너머에 있는 조각상 앞으로 걸어갔다. 금은으로 뒤덮인 조각상 뒤에는 자세히 보면 찾을 수 있는 버튼이 하나 있었다.
‘원래는 이 버튼을 누르면 그 뒤에 있는 문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을 테지만…….’
금고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미 부서져 있었다.
아무래도 경첩이고 고정장치고 하는 것들은 세월의 풍파에 고장나기 십상이다.
거기다가 10급 몬스터인 아라크네도 날뛰는 곳이니 문이 멀쩡하게 남아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밖에 안 부서진 게 오히려 신기한 거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각상을 치우고 무너진 문의 잔해를 지나쳐 곧장 금고 방 내부로 들어섰다.
방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천장에 달린 마력등은 과거에는 분명 찬란히 빛을 발했을 터였지만, 이제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밝기로 당장이고 끊길 듯이 깜빡일 뿐이었다.
빛에 의지하기에는 너무나도 불안전한 환경.
암순응을 위해 잠시 눈을 크게 뜬 채 기다렸다.
잠시 후.
내부의 사물이 대충 구분이 될 정도로 적응이 끝나자, 나는 성큼성큼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에는 재단과 의식용 잡기가 가득했다.
전생에는 암순응만으로는 부족해 이곳 저곳에 부딪쳤으나, 지금은 용의 심장 덕분에 어디 한 곳도 부딪치지 않고 곧장 금고 앞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금고 문 앞에 선 순간.
“어?”
전생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금고의 문은 아라크네가 뱉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희멀건 점액질과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다. 질척거릴 게 뻔해 보이는 액과 끈적한 거미줄은 서로 뒤섞여 끔찍한 몰골로 금고 입구를 막고 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
데우스 또한 동감인지, 기함하며 비명을 질렀다.
[우욱! 그, 그게 뭣이더냐? 역겹구나, 역겨워! 얼른 안보이게 치우거라!]
“젠장.”
나는 입속으로 욕지거리를 씹으며 혀를 찼다.
‘전생에는 이딴 게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은 더 지난 뒤니, 이 지저분한 것들은 그 시기 즈음에는 죄다 말라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겠지.
역겹지만 어쨌든 금고를 열려면 이것들을 청소해야만 했다. 나는 미스틸테인의 검집을 손에 쥔 채 대충 휘저어 지저분한 것들로 범벅이 된 문을 청소했다.
[우욱! 욱!]
그리고 마침내 청소가 끝나자, 그제야 문짝에 가득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로 한 줄에 30개씩 세로로 30칸.
총합 900개나 되는 구멍.
이 구멍이 바로 금고를 여는 열쇠였다.
마나를 담아서 정해진 패턴대로 구멍을 잇는다. 그렇게 총 9개의 선을 그으면 금고가 열리게 되어 있다.
‘이 패턴을 알아내느냐고 전생에 진짜 머리 깨지는 줄 알았지.’
유적의 기원부터 시작해서, 제작자의 성격과 그 당시 유행했던 암호까지. 정보를 찾기 위해 리텐슈노프 가문의 서고에 처박혀 며칠이나 밤을 새웠던가?
‘그래도 그때 개고생한 보람이 있구만.’
무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과거로 회귀까지 했음에도 그때 외웠던 금고의 패턴은 머릿속에 똑똑히 박힌 채 아직도 잊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미스틸테인의 첨단에 오러를 피워올렸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검 끝으로 구멍을 그었다.
순식간에 아홉 개의 마력으로 이어진 선들이 금고 문에 그어졌다.
내가 패턴을 완성하자 톱니바퀴 따위가 돌아가는 기계음과 함께 금고의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기름칠 한 번 하지 않은 탓인지, 금고의 문이 완전히 열리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자, 나는 곧장 금고 안으로 들어서서 내부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싯누런 금괴를 층층이 쌓아 만든 재단과 그 위에 놓인 자그마한 초록 부츠였다.
‘찾았다. 디딤돌.’
아티팩트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나는 금고 내부를 힐끔 둘러보았다. 사방에 쌓인 금괴가 고대 제국이 얼마나 부유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
[얼래?]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