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건……?”
금괴 제단 위에는 또 다른 물건이 놓여 있었다.
두툼한 육각 기둥 모양의 물체.
반짝이고 투명한 것이 마치 수정 같았다.
하지만 그건 보석이 아니었다. 금괴 제단 주변에 새하얗게 서리는 성애와 새어 나오는 희뿌연 김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었다.
[이런 맙소사! 운칠기삼이라더니 요놈, 횡재했구나!]
“설마…….”
나는 황급히 제단 가까이 다가갔다. 동시에 나름 따뜻했던 주변 기온이 상쾌할 정도로 시원해졌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자, 뼛속까지 시리는 듯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동상에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기묘한 감각에 중독될 것 같았다.
이리저리 소문으로는 많이 들어보았으나, 직접 만져보는 건 전생을 포함해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년빙하.”
만년빙하萬年氷河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아르페리움 산의 정상에 쌓인 만년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 눈들이 자연적으로 뭉쳐진 끝에 형성되는 지고의 얼음.
만년빙하는 오대 명가인 리텐슈노프 가문의 보고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의 효능을 가진 영약이었다.
‘이건 진짜 보물 중의 보물인데…….’
그런데 어째서 이것이 여기에?
나는 만년빙하를 가만히 응시하며 생각했다.
‘전생에는 분명히 이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 삶에서 아라크네의 연옥의 금고 방에 들어왔을 때, 내가 얻은 것은 오직 디딤돌 뿐이었다. 금괴를 제외하면 이 방에는 디딤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만년빙하는 어디서 난 것이란 말인가?
‘내가 금고 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만년빙하는 제단 위에 놓여있었다. 우연히라도 발견하지 못할 위치는 아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먼저 왔다 간 건가?’
그렇다기에는 그럼 디딤돌이 멀쩡히 있었던 게 말이 안 된다. 설사 침입자가 디딤돌이 필요 없는 수준의 실력자였다고 해도 말이 안 된다.
어쨌든 디딤돌은 누가 봐도 아티팩트인 만큼 한 번쯤 지닌 능력을 확인이라도 해보았을 텐데, 디딤돌이 놓인 위치는 내 기억 속 전생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럼 뭐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려는 순간.
[어? 그거, 반쯤 녹았는데?]
데우스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녹았다고요?”
[그래. 봐봐. 지금도 녹고 있구만.]
그제야 나는 만년빙하를 살펴보았다.
하나, 녹은 흔적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찾는다고 나오겠느냐? 애초에 만년빙하는 말이다. 녹는다고 물로 변하지 않는다.]
“물로 변하지 않는다고요?”
[그래.]
데우스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이내 큼큼 목을 풀고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만년빙하가 정확히 뭐냐.]
“아르페리움 산의 만년설이 뭉쳐져서 만들어진 영약…….”
[그래! 그건 영약이다! 그리고 영약이라는 건, 이 안에 마나가 가득 깃들어 있다는 거지. 그렇기에 만년빙하는 평범한 얼음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는 말이다.]
성질이 다르다?
[만년빙하는 녹으면 물이 아니라 마나가 섞인 연기가 된다. 거, 지금도 봐라. 희뿌연 김이 계속 나오지? 그게 바로 만년빙하가 녹고 있다는 증거다.]
“아!”
그래서 이곳에서 느껴지는 공기 중 마나량이 바깥보다 진했던 것인가?
그제야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전생에 내가 이 유적을 공략한 건 앞으로 30년 즈음이 지난 미래. 유적에 방치된 만년빙하가 죄다 녹아서 없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때보다 일찍 유적에 들어왔기에 만년 빙하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거, 원래는 보존 마법이 걸려 있었을 거다.]
“그렇습니까?”
[그래. 풀린지는 30년 정도 지난 것 같다만……. 3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정도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원체 처음의 덩어리가 컸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 어째서인지 배가 아파왔다.
“쯧, 그건 좀 아쉽네요.”
나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 크기가 다 증발하는 데 30년이 걸렸으니, 단순 계산을 해보면 이 만년빙하가 처음에는 지금보다 두 배는 컸다는 소리 아닌가?
“더 일찍 태어났어야 했는데.”
내가 한숨을 쉬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데우스가 나를 타박했다.
[거 참, 욕심이 아주 그득그득하구나. 사람이 어? 만족을 할 줄을 알아야지. 그렇게 매번 꿀만 빨려고 하면 되먹지 못한 족속이 되고 말 거다.]
그 충고 아닌 충고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원래는 이것도 못 얻을 뻔했지’
멜이 이 유적에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이것보다 더 작은 만년빙하를 얻었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디딤돌을 찾으러 이곳에 오긴 했을 테지만, 그 시기는 아무리 빠르더라도 최소한 지금으로부터 5~6년은 지난 미래였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지.’
크기가 작더라도 어쨌든 지고의 영약 아닌가.
절대 손해라고 볼 수 없다.
그 순간.
[으응? 어! 꼬맹아, 네 거울이 투명해졌다!]
데우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곧바로 고개를 숙여 브로치를 확인했다. 데우스의 말대로 브로치의 거울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벌써?’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아무래도 아라크네가 내가 최심부로 향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플갱어가 고작 이 정도 시간만에 쓰러질 리 없었다.
“젠장.”
나는 황급히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제단 위에 놓인 디딤돌을 낚아채 발에 끼워 넣었다.
사이즈는 내 발 크기에 비해 약간 좀 작았지만, 역시 아티팩트답게 신자마자 적절하게 조절이 되었다.
“좋아.”
디딤돌의 사용법에 익숙해 질 필요는 없었다.
‘전생에 질리도록 쓰던 거니까.’
이미 이 신발에 대한 건 빠삭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곧 쓰게 될 거다.
‘아라크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디딤돌을 써야만 하니까.’
물론 상대한다는 말이 승산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5성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10급 몬스터를 쓰러트리겠는가? 대응하는 데 급급할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단 한 방도 먹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도 날카로운 가시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도망가는 건 너무 아쉽잖는가?
나는 만년빙하를 품 속에 넣은 뒤, 빠르게 금고 방을 빠져나왔다. 가짜 제단을 지나 내가 빠져나온 비밀 통로 앞에 서자,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약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땅.
‘오고 있다.’
-쿠구구구……
아득한 거리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땅울림 소리가 녀석이 이곳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미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여기서는 불리하다.’
뒤가 막힌 공간에서는 아라크네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비밀 통로로 들어갈 수도 없다.
지금의 아라크네라면 비밀 통로를 부숴버릴 테니까.
‘차라리 미로 안에서 싸우는 게 나아.’
도망칠 때도 그렇고, 전투에 돌입하기에도 탁 트인 공간이 훨씬 유용했다. 그리고 현재 미로는 딱 적당할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아라크네가 열심히 재건축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탁탁탁!
-키리리리리리릭!!!
부서진 미로를 내달리니, 점점 금속성의 비명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향하는 방향에서 녀석이 다가오는 중인 것 같았다.
그 생각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저 멀리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돌덩이와 먼지 구름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키리리리릭!!
아라크네의 여섯 눈알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키라라락!
끔찍한 비명과 함께 내리깔리는 살기가 엄습했다.
“큭!”
내가 주춤하는 순간, 아라크네가 선공을 했다.
아라크네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거의 헛간만한, 어마어마한 덩치가 하늘을 부유하는 모습. 참 초현실적인 광경이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내 코앞에 떨어진 아라크네가 내게 뒷꽁무니를 내밀었다.
“!!!”
나는 그 즉시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푸샷!
다음 순간, 무언가 막힌 게 뚫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가 폭발했다.
‘거미줄인가?’
녀석이 거미줄을 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건 아라크네가 지난 일주일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이번에는 죽일 셈이다.’
아까 쏘아보낸 살기도 그렇고, 지금 거미줄도 그렇고. 나를 죽이겠다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치솟고 신경줄이 팽팽히 당겨진다.
두려움이 엄습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 그래야지.’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두렵다? 당연한 거다.
애초에 목숨을 놓고 벌이는 싸움 아닌가.
목숨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넌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목숨은.
‘나 혼자만 걸고 있는 게 아니지.’
나는 미스틸테인을 꽉 움켜쥐었다.
곧바로 흑빛 오러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린다.
동시에 휘둘러지는 녀석의 앞다리. 뒤쪽의 네 다리로만 몸을 지탱한 체, 녀석은 앞쪽 네 개의 다리를 휘둘러 마구 내려찍었다.
-쾅! 쾅! 쾅! 쾅!
통나무 굵기의 다리가 내 머리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려온다. 잠시라도 흐름을 놓치는 순간 어포처럼 짜부라질 공격이 끝없이 이어진다.
나는 그 모든 걸 전부.
‘보고’ 피했다.
[어어어?]
아니, 피해내며 틈을 찾았다.
“하앗!”
공격과 공격 사이의 짧은 찰나.
눈 한번 깜빡일 시간에, 나는 땅을 박찼다.
쏟아져 내리는 다리의 비를 벗어나자 보인 건 널찍한 배와 가슴. 마치 여길 베어 달라는 듯이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다. 공격 또한 당연히 성공하겠지.
하지만 무시한다.
‘어차피 못 베.’
놈에겐 갑각이 있다.
지금 당장 내 검식으로는 놈의 갑각을 뚫지 못한다.
이빨을 살짝 박아넣는 것과, 그걸 베어내는 건 난이도부터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러니.
놈의 배 밑을 지나쳐, 꽁무니로 넘어갔다.
동시에 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아라크네가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쏘아냈다.
눈으로 쫒기도 힘들 정도의 초속.
‘피해…….’
곧장 내 몸을 향해 쏘아진 세 개의 거미줄을.
‘냈다……!’
난, 간발의 차이로 회피했다.
-키리리릭?!
설마 피할 줄은 몰랐던 건가.
당황한 아라크네의 울음소리가 비틀린다.
그 기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팟!
디딤돌의 힘을 사용해, 허공을 박차고 도약해 놈의 배 위에 안착한다. 그대로 검을 고쳐 잡으며 녀석의 등판으로 내달렸다.
기회는 단 한 번 뿐.
이걸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으리라.
배를 지나, 등을 넘어서, 날아드는 다리를 피해내며.
마침내 도착한 머리.
동시에 여섯 개, 세 쌍의 눈알이 나를 향했다.
당황에 젖은 놈의 눈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 검은 구슬 같은 눈알에.
나는 사냥개의 송곳니를 박아넣었다.
-콰직!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