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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89화 (89/139)

89화

일순, 무언가 물어뜯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이 미로에 쩌렁쩌렁 울렸다.

피어가 가득 담긴 울음소리에 나는 검 손잡이를 쥔 채 비틀거렸다. 10급 몬스터의 분노가 가득 담긴 피어는 순간적으로 내 정신을 아득히 날려버렸다.

시야가 하얗게 명멸하며 이성이 표백된다.

그 순간.

[정신 차려!]

아득한 곳에서 들려온 고함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허억!”

[미친 게냐? 여기서 쓰러졌다간 그대로 짜부라질 거다! 저 벌레 놈이 정신 못 차릴 때 빨리 튀거라!]

데우스의 고함에 고개를 털며 정신을 되찾았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쓰러지면 그대로 죽는다.

입술을 터지라 앙다물며, 나는 박아넣은 검을 지렛대 삼아 그대로 하늘로 몸을 날렸다. 디딤돌을 이용해 그대로 허공을 박차 미로 바닥에 착지했다.

고개를 돌리자, 광분한 아라크네가 사방팔방에 다리를 휘두르며 모든 걸 파괴하는 게 보였다.

이성이 날아간 건지, 나를 쫓지도 않는 녀석.

가공할 속도로 주변을 파괴하는 다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놈의 눈알은 이제는 다섯 개밖에 없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달렸다.

디딤돌과 미스틸테인을 적절히 이용해 막아서는 미로는 뛰어넘고, 그러기에 너무 높은 벽은 부숴버렸다.

빠르게 미로 지대를 빠져나가며, 나는 웃었다.

입꼬리는 찢어질 듯 벌어지고, 흥분이 정수리까지 솟아올라 머리칼이 삐죽이는 것만 같았다.

‘……찔렀다.’

놈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찰나의 순간에 들려온 물어뜯는 소리.

그것은 바인더샤칼 검식이 놈에게 먹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이빨도 안 박히던 내 송곳니가, 드디어 녀석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주었다.

나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놈의 눈알에 박아넣었던 송곳니의 감각이 선하다.

이 짜릿한 감각은.

절대로 잊을 수 없으리라.

* * * * *

수직 동굴 앞에 도착하니 멜이 기다리고 있었다.

멜은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팔다리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나에게 큰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가 물었다.

“뭐야, 너 어떻게 괜찮은 거냐?”

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투덜대는 목소리가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그 말은 마치 괜찮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들리는데요.”

“아니, 뭐 그건 아닌데……. 근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왜 일주일간 조용하던 거미가 갑자기 미쳐 날뛰고 있는 거야?”

“그야…….”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곧,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집을 털었냐?”

“당연히 제가……. 네?”

“야, 임마. 알집을 왜 건드려. 설마 독이 필요해서 그런 거냐? 그 나이에 여색에 빠지면 어떡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 아니 그게 무슨…….”

“아니, 아니지. 마그너스 님이 두 눈 똑바로 뜨고 계신데 그럴 리는 없지. 그럼 누구 납치라도 할 생각이냐? 그게 아니고서야 알집을 건드릴 이유가 없는데.”

얼토당토 않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제가 왜 알집을 건드립니까?”

“그럼 저 거미가 왜 저리 지랄인데? 뭐, 네가 꽁무니라도 칼로 푹 찌른 거냐?”

멜이 턱짓으로 유적 안쪽을 가리켰다. 유적 안쪽에서는 여전히 쇠찢는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꽁무니는 아니지만, 찌르기는 찔렀죠.”

“뭐?”

그 말에 멜이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제야 내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멜이 천천히 팔짱을 낀 채 턱짓을 하며 물었다.

“어딜 찔렀는데?”

“눈이요.”

“눈?”

멜이 눈을 치켜떴다. 곧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킁! 그런 짓을 했으면 아라크네가 저리 지랄발광을 하는 게 말이 되긴 하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10급 몬스터인 이상, 그 정도 상처는 몇 달 안에 회복할 것이다. 아마 일이년 뒤라면 내게 빼앗긴 눈알이 다시 새로 날 터.

그래도.

‘내가 눈알을 취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지.’

나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오늘의 기억은 아무래도 큰 자산이 될 것 같았다.

멜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품속에서 궐련을 한 개피 꺼내 입에 물었다.

빠르게 연기를 두어 번 빨아들인 멜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묘하게 어색한 얼굴로 중언부언했다.

“뭐, 하여튼…… 저놈이 나름 10급은 10급인데, 어찌 칼침 한 대는 놓아줬구만. 저리 날뛰는 이런 꼬맹이한테 한 대 얻어맞았던 게 쪽팔려서 그런 거였나? 10급 몬스터 체면 다 상했네, 이거.”

‘뭐야?’

갑자기 왜 이리 말이 많아진 거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나는 그제야 멜이 나를 칭찬하는 게 부끄러워서 저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식하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면 저도 꽤 강해진 듯하네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멜이 곧바로 눈을 찌푸리며 내게 삿대질을 했다.

“임마, 눈알은 부드러운 부위잖아. 고작 그거 뚫어놓고는 뭐 그리 대단한 일 했다는 듯 위세야?”

멜이 나를 타박했지만, 난 계속 웃었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멜의 말대로, 아라크네는 10급 몬스터.

그런 녀석에게 제대로 한 대 먹여줄 정도로 강해졌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전생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약하다. 일단 성급부터 두 단계나 차이가 나니, 당연한 일이다.

하나.

‘그 시절의 나였다면, 아라크네에게 덤비는 건 꿈도 꿔보지 못한 짓이었겠지.’

마음가짐 하나만은, 지금이 훨씬 더 나았다.

문득 코가 시큰거렸다.

그 순간.

“……그 감각, 잊지 마라.”

“네?”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는 멜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네가 아라크네의 눈알을 뚫은 건, 결국 너보다 강대한 적을 상대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어떻게든 칼침 한 대 놓기 위해 악을 쓴 끈기 때문이다.”

“…….”

“그 감각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그 말에 나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트고, 이리저리 상처 가득한 손.

그 손을 가볍게 움켜쥐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좀 나가자. 여기는 이상한 냄새가 난단 말이지.”

멜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코를 킁킁대고 있더니, 냄새가 나서 그랬던 듯했다.

나는 멜의 뒤를 따라서 호숫가로 향하다가, 이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미로 저편에서는 아라크네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그 비명을 들으며 미스틸테인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눈이 아닌 목을 물어뜯어 주마.

나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한참 후.

유적 입구 밖으로 나오자, 묘하게 피부에서 윤기가 나는 세르폰과 마리 유모가 나를 반겨주었다.

마리 유모는 나를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도, 도련님! 세상에. 대체 얼마나 고생을 하신 거에요? 몸에 상처도 가득하고, 피부도 다 까지다니!”

“별 일 아니야, 유모.”

“별 일이 아니라뇨! 거기다 세상에! 도련님 앙상해지셨어! 설마, 식사는 잘 드셨죠? 멜 경, 대체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시키셨기에 도련님이 이렇게 된 건가요?”

마리 유모가 멜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멜은 마리의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슬그머니 세르폰의 뒤로 가버렸다.

마치 세르폰의 등 뒤에 숨는 것 같은 모양새.

그 모습에 마리 유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세르폰 뒤로 숨는 거에요? 당신, 좀 비켜봐요.”

“어, 그. 저기…….”

세르폰은 난처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멜이 세르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들은 채, 무어라 귓전에 속삭이고 있었다. 옷깃이 구겨진 걸 볼 때, 어지간히 꽉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요!”

“비키면 죽는다.”

“그, 그어.”

멜과 마리 유모, 둘 사이에 낀 세르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불어 마리 유모의 호칭을 들은 데우스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다, 당신이라니! 저 비쩍 마른 오이 같은 놈에게 당신이라니! 레이디 마리! 어째서어어!]

그 혼란스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으로 심심할 틈이 없었다.

* * * * *

아라크네의 연옥에서 바르헴 평야로 가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소모되었다.

“일단 일정상으로는 시간이 널널해요, 도련님.”

“그래?”

“네. 이 영지에서는 제가 할 업무가 많으리라고 추측했기에, 애초부터 일정을 조금 널널하게 잡았어요.”

마리 유모의 대답에, 멜이 염소수염을 쓸어내리던 손을 가볍게 튕겼다.

“잘 되었네. 그럼 여기서 최대한 훈련을 하자고.”

“훈련 말입니까? 그럼 유적에서 한 것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멜이 쯧쯧 혀를 찼다.

“너는 복습 안 하냐? 배운 게 있으면 복습을 주구장창 해서, 완전히 네 것으로 익히는 과정이 있어야지.”

그거야말로 의아한 소리였다.

“제가 뭘 배웠는데요? 배운 게 없는데?”

“강한 적을 상대할 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잖냐? 거기다가 아라크네의 눈알을 뚫었다는 건, 네 검식이 그 순간 최고의 완성도를 보였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도련님. 완성도 높은 기술은 제 성급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도 대적할 수 있게 합니다.”

세르폰이 첨언하자, 멜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지. 말 잘했네.”

“그럼 뭐, 기술이나 검식을 더 깊게 익히는 훈련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물론 네가 쓰는 검식을 내가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거든? 특히, 블러드하운드 검식 같은 경우는 내가 더 완성도가 높을 거다.”

“하긴, 그건 그렇겠네요.”

징벌기사단의 선임 기수인 만큼, 멜은 블러드하운드 검식에 통달한 상태다. 어차피 익힐 거라면 정통파 훈련을 받았을 멜에게 봐달라고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멜 경은 블러드하운드의 오러를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응?”

내 물음에 멜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그걸 왜 못써?”

“넥, 네?”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혀를 씹어버렸다.

절로 찔끔 나오는 눈물을 훔치며, 나는 황급히 멜에게 물었다.

“아니, 멜 경이 그걸 어떻게 씁니까?”

이건 내가 만든 검식이나 다름없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네 검식을 따라하면 되는데.”

“…….”

입이 쩍 벌어지는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 근데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멜은 마차 창밖을 힐끔 살피더니, 이내 실내를 둘러보았다. 곧 그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 네 영지 아니냐?”

“제 영지죠.”

“근데, 영주가 왔는데 왜 마중을 안와? 그것도 마차가 이미 저택 코앞까지 도착했는데.”

“그거야…….”

“당장 비리로 가득한 서류를 태워야 할 테니까요.”

대답은 마리 유모 쪽에서 나왔다.

마리 유모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밖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감히, 도련님에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 용서할 수 없네요.”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빠드득 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세르폰이 공포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떠는 걸 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목가적인 영지의 분위기는 마치 폭풍이 불기 전 날 맑은 하늘처럼 느껴졌다.

‘이딴 짓을 영지 관리인 혼자서 생각했을 리는 없다.’

아무리 비리 투성이라고 해도, 감히 관리인 따위가 영주를 기다리게 하는 무례를 저지르지는 못한다.

즉, 이것은 다른 ‘리텐슈노프’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리고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다 털어주지.’

창밖에 비친 내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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