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바르헴 평야의 영지 관리인, 제퍼슨은 초초한 안색으로 창밖을 힐끔거렸다.
창밖의 광경은 한 시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빌어먹을’ 마차는 아직도 저택 입구에 있었다.
여전히 마차 안에서는 아무도 나올 기색이 없었고 말이다.
‘대체 뭐냐. 뭐냔 말이다!’
제퍼슨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리를 떨었다.
‘대체 어떻게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수가 있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리텐슈노프의 혈족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걸까? 당장 튀어나와 자신의 멱살을 잡아채고 싶은 충동을 대체 어떻게 참고 있는 거지?
그 리텐슈노프의 혈족이, 어찌 조용히 좌석에 앉아 기다리고만 있단 말인가!
‘다른 인간들은 안 이랬다고!’
다들 똑같았다.
겉으로는 품위 있는 척, 귀족적인 척 하지만, 대부분의 리텐슈노프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인간들이었다.
수틀리면 곧바로 힘자랑을 하거나 손찌검을 올리는 걸 주저하지 않는 족속들이라는 말이다.
그런 인간들을 평생토록 수행했던 제퍼슨에게, 지금 저 마차의 주인인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관리인님. 그 이제 슬슬…….”
그 순간, 등 뒤에서 영지 재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퍼슨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슬슬 뭐?”
“슬슬 나가서 드레커 도련님 앞에 엎드려 죄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도련님께서는 저희가 의전을 수행하기 전까지 저 자리에서 나오지 않으실 생각이신 것…….”
영지 재무관은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제퍼슨의 기세에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대신 입을 연 것은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었다.
“그, 제퍼슨님. 제랄드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수행하시려면 일단은 나가셔야 합니다…….”
시종장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 대답에 제퍼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 년 말이 맞아……. 이 상태라면 위험해.’
이대로 가다간 날이 어두워지고 말 거다.
그대로 하룻밤이 지나면, 그때는 끝장이다.
제랄드가 그에게 내린 명령은 드레커에게 면박을 주라는 것이었다. 드레커를 은근히 모욕하여 적절하게 분노케 한 다음, 제랄드의 위세로 위압해 바르헴 평야를 토해내게 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즉, 어느 정도 선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한데, 한참이 지나도 드레커는 마차에서 내릴 생각을 안 했다. 의전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가득 느껴졌다.
‘만일 저대로 계속 밖에 세워두다가…….’
만약 감기라도 걸린다면? 아니, 그 이전에 영지의 주인을 마중 나가지 않는 바람에 마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한다면 아무리 제랄드의 명령이 있었다고 한들,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제랄드, 그 인간이 나를 보호해 줄 리가 없어.’
보호는커녕, 모든 죄를 다 자신에게 덮어씌우고 모른 체 할 인간이었다. 자신의 목이 잘리는 건 덤이고.
심지어 당장 저 안에는 징벌기사도 있잖는가?
‘……그치들이라면 진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공포에 질린 제퍼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는 몇 가닥 없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영지 관리인인만큼, 제퍼슨은 징벌기사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리텐슈노프가 수틀리면 싸대기를 갈길 족속들이라면, 징벌기사는 목을 자를 종자들이다.
“젠장……. 어쩔 수 없지. 다들 따라와!”
결국 제퍼슨은 드레커를 수행하기 위해 저택 밖으로 나섰다.
허겁지겁 발을 놀려 저택 입구로 달려간 제퍼슨은, 곧바로 마차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를 따라온 다른 가신들 또한 제퍼슨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마차의 문이 열렸다.
제퍼슨은 힐끔 고개를 들었다. 새로 장만한 가발의 윤기나는 머리카락 너머로 마차 내부의 전경이 보였다.
“…….”
마차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 그중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년만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제퍼슨은 곧바로 저 소년이 소문의 막내, 드레커 리텐슈노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열한 살이라고 들었는데…… 저게 어딜 봐서 열한 살이야?’
그저 아이답지 않은 서늘한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무렵 드레커의 육체는 겉모습만 보았을 때, 열여섯 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대체 뭘 먹고 큰거야?’
제퍼슨이 그런 의심을 품고 있을 무렵.
마침내 마차에 앉아 있던 드레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르헴의 영지 관리인인가?”
“그렇습니다. 소인, 제퍼슨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그럼…….”
엎드려.
아주 평이한 어조로 내린 괴상망측한 명령에 제퍼슨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잘못 들었습니다?”
“엎드리라고. 안 들려?”
“그, 어디 엎드리라는…… 아니, 그런데 어째서?”
혼란에 빠진 제퍼슨이 중언부언하자, 드레커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그야, 그게 예법이니까.”
아주 오랜 옛날.
고대라고 불리던 시절의 예법 중에 그런 게 있다.
충직하고 성실한 종은 제 주인이 마차에서 내릴 때, 그 아래에 엎드려 제 등을 밟게 한다.
그렇게 하여 자존심을 버릴지라도 충성한다는 사실을 증명함과 동시에, 제 목을 드러내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제야 제퍼슨의 머릿속에 그 예법이 떠올랐다.
‘미친, 개소리 하지 마!’
제퍼슨은 붉으락푸르락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대 시대에는 그딴 예법이 주인에게 바치는 포상 중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그건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쨌든 노예도 종은 종이니까.
하나, 제퍼슨은 노예가 아니었다.
드레커의 충실한 종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야말로 품위 있는 모욕. 자신보다 서른 살은 더 어린 놈에게 제대로 엿을 먹고 말았다.
“……크, 으음.”
제퍼슨은 볼 안쪽을 꽉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쌍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 심호흡. 심호흡을……!’
하나, 드레커는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 하는 건가. 어서 엎드리지 않고. 설마 내가 당신이 엎드린 순간 목을 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감히?”
드레커가 미간을 좁히며 제퍼슨을 윽박질렀다.
그 순간 드레커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염소 수염 사내가 제퍼슨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마치 분노에 가득 차 눈을 부라리는 모양새.
드레커의 눈에는 그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눈에 힘을 준 것에 불과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제퍼슨의 입을 꽉 다물게 하기엔 충분했다.
‘분명 저 인간은 소문의 그 징벌기사……!’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
마치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가 된 것 같았다. 절로 오금이 저리고, 소변이 마려워졌다. 제퍼슨은 가까스로 터지려는 요의를 참아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기……꺼이 하게, 겠습니다악…….”
제퍼슨은 덜덜 떨며 천천히 마차 앞에 엎드렸다.
영주의 대리인이 엎드리니, 다른 가신들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있나. 그들 또한 일렬로 땅에 엎드렸다.
모든 가신이 완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땅에 박자, 그제야 드레커가 마차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레커는 성큼 발을 뻗어 제퍼슨의 등을 밟았다. 꾹 누르는 압박감에 제퍼슨이 이를 악무는 순간, 드레커의 발이 실수로 그의 머리를 툭 쳤다.
그러자 제퍼슨이 새로 산 고급 가발이 흙바닥에 툭 떨어졌다. 제퍼슨의 눈동자가 파르르 진동했다.
“헉!”
“허억!”
그 모습에 다른 가신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드레커가 힐끔 가발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머리가 참 반짝거리는군. 혹시 광이라도 내는 건가? 아, 칭찬이네. 칭찬. 그러니 나쁘게 듣지 말게.”
‘이, 미친 애새끼가!’
하지만 제퍼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노예처럼 엎드린 채 부들거릴 뿐.
그렇게 굴욕의 시간이 끝나고, 드레커가 모든 가신들의 등짝을 밟은 뒤 땅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제야 제퍼슨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드레커가 눈을 찌푸리지 않았다면 일으켰을 것이다.
“이봐, 제퍼슨 관리인.”
“네, 네에.”
“당신 뒤에 있는 사람들은 안 보이나? 저들이 당신 따위보다 더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들인데, 왜 일어나는지? 당장 다시 안 엎드리나?”
그 말에 제퍼슨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안에는 유모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수호 기사 제복을 입은 사내, 그리고 여전히 눈을 부라리는 징벌 기사가 남아 있었다.
“…….”
징벌기사의 눈빛이 번뜩이는 걸 본 제퍼슨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흙바닥에 엎드렸다.
* * * * *
저택 입구에서 한 차례 푸닥거리를 한 뒤, 우리 일행은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를 안내하는 제퍼슨 관리인의 반짝이는 뒤통수를 불만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던 마리 유모가 내게 속삭였다.
“아마, 명령을 받았을 거야.”
“명령이요?”
“응. 사촌 형제나, 큰아버지들 중 한 명이 나를 견제하라고 저 자에게 명령했겠지. 그게 아니면 관리인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말이 안 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되었든 저 자는 이제 도련님의 사람이잖아요.”
“정확히는 ‘레이첼 누님의 사람’이었지. 뭐,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그것도 확실치는 않지만 말이야.”
그 말대로였다.
‘레이첼이 내게 이런 짓을 하라고 명령할 리는 없지.’
즉, 이건 그녀가 아닌 다른 리텐슈노프의 짓이다. 아마 영지에 만연한 비리 또한 그와 관련된 것이리라.
그리고 어지간히 간이 큰 자가 아니라면, 감히 레이첼의 영지에서 개수작을 부릴 마음을 품지 못한다.
그게 가능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레이첼보다 강하고, 이런 짓을 벌여도 감히 그녀가 어찌 할 수 없는 상대.’
그리고 그 모든 것에 해당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제랄드 리텐슈노프.’
그녀의 아버지이자, 회귀 전 차기 가주가 된 자.
-빠득!
절로 이가 갈렸다.
전생에 나를 처형하는 결정을 내린 놈은 아덴이지만, 실질적으로 처형을 명한 것은 제랄드였다.
아니, 그 때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제랄드 또한 나의 처형 명령의 결정에 분명히 관여했을 터.
‘그런 놈이 내 물건을 탐낸다, 이거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제랄드와 아덴의 일에서는 절대로 그냥 조용히 넘어갈 수 없었다.
아니, 넘어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복수해야지.’
나는 조용히 다짐했던 맹세를 바로 세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제퍼슨을 따라갔을까.
마침내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가득 쌓여 탑을 이룬 서류 뭉치들이었다. 멜의 키 높이까지 쌓인 탑이 무려 세 개. 그보다 작은 건 두 개.
그야말로 서류의 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광경.
“하아…… 참.”
마리 유모는 서류 더미와 제퍼슨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제퍼슨은 묘하게 의기양양한 태도로 대답했다.
“일단 오시기 전에 명령하신 대로, 관련 서류를 전부 챙겨서 정리해 두었습니다.”
“정리?”
나는 힐끔 서류 폭탄을 바라보았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한 내 시선을 마주한 제퍼슨은 어색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나, 그럼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한데, 최근에 저택에 화재가 난 적이 있는지라, 서류가 일부 소실되었는데…….”
“그 화재 때문에 가장 중요한 서류가 타버려 없어졌겠지? 거참, 편리하구만.”
“하, 하하. 하하하.”
나는 터벅터벅 서류 뭉치로 다가가 몇 장을 빼서 살폈다. 그래도 화재가 났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몇몇 서류와 방 구석에 검댕과 탄 자국이 있었다.
‘문제는 이 화재가 진짜 사고인지, 지들이 불을 지른 건지 알 수 없다는 거지만.’
그거야 일단 천천히 사용인들을 하나씩 족쳐보면 알 수 있는 일이고. 지금 당장은 서류를 확인해서 비리 증거를 확보하는 게 먼저다.
“마리 유모.”
“네, 도련님.”
“이거, 이걸로 확인이 가능할 것 같아?”
그 말에 마리가 총총거리며 내 곁에 다가왔다.
그녀는 서류 더미에서 한 묶음의 종이를 집어 살폈다. 곧,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네. 이 정도면 충분히 비리를 증명할 수 있어요.”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