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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91화 (91/139)

91화

제퍼슨이 저질러왔던 비리가 밝혀지는 데에는 마리 유모의 말대로 고작 서류 수십 장이면 충분했다.

“여기, 이 서류도 그러네요. 곡물 산출량은 분명 전년도보다 줄어들었는데, 수입한 비료의 양은 오히려 증가했어요.”

“그, 그건……!”

“이것 말고도 광산 인부들에게 급양한 식량의 양도 똑같네요. 이걸 보면 인원이 줄어서 채산성이 떨어진다는 건 거짓말일 테고요.”

“어, 어떻게…… 어떻게 이걸……!”

마리가 제시한 증거에 제퍼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건지, 제퍼슨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물었다.

“고작 이걸로 어떻게 그런 사실을…….”

“무슨 소리예요? 이건 조금만 배우면 당연히 추론할 수 있는 상식이에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네요. 이런 중요한 자료를 남겨두다니, 대체 뭘 태운 거예요?”

마리는 하찮다는 눈으로 제퍼슨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제퍼슨이 이를 악물었다.

“크윽!”

“증거를 없애고 싶었다면 아예 전부 다 태우기라도 했어야죠. 이렇게 연결고리를 잔뜩 남겨놓고 안 들키기를 바라다니, 참 우둔하네요.”

마리는 그렇게 일침을 놓고는, 이내 덧붙였다.

“물론, 다 태웠다면 관리 소홀로 처벌받았겠지만요.”

“제, 젠자앙!”

발뺌할 구석이 없다는 걸 깨달은 제퍼슨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집무실 문으로 뛰어갔다.

“어딜 도망가?”

하나, 문 옆에 서 있던 멜이 한 걸음 가로막은 것만으로 제퍼슨의 짧디짧은 도주는 막을 내렸다.

퇴로가 막혔다는 걸 깨달은 제퍼슨은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굴색을 바꾸곤 음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저 유모의 말이 맞지요. 분명 제가 장부를 조작하긴 했습니다. 하나, 그건 전부 다 높으신 분의 명령을 따른 것뿐입니다!”

“높으신 분?”

“네, 맞습니다. 가주님의 차남이신 제랄드 리텐슈노프님의 명령이었지요. 저는 그분의 뜻을 따랐을 뿐이니 죄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께서는 제게 도련님을 회유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드레커 도련님께서 이 영지를 획득하신 과정은 잘못되었습니다!”

제퍼슨의 주장에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인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딴 소리가 튀어나오는 걸 보니, 진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다.

보다 못한 세르폰이 제퍼슨을 입 닥치게 하려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손을 들어 세르폰을 막아 세웠다.

“계속 말 해봐.”

그리고는 어디 한 번 지껄여보라는 듯, 턱짓했다.

그러자 제퍼슨이 열변을 토해냈다.

“그 거래는 정당하지 않았습니다. 고작 대련 따위로 영지가 오고 간다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당연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사기나 다름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니 모든 걸 원상복구 해야 합니다. 영지는 다시 레이첼 아가씨의 소유가 되고, 저희는 평화를 되찾는 것이지요. 만약 제 말을 거부하신다면, 제랄드 님의 분노를 맛보게 되실 겁니다.”

이제는 숫제 킬킬 웃으며 지껄이는 제퍼슨.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절로 피식 실소가 터졌다.

멜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폭소했다.

“푸하하하!”

“뭐, 뭡니까? 왜 웃는 겁니까?”

“와, 진짜로 이딴 머저리가 어떻게 제랄드, 그 인간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발언에 제퍼슨이 멜에게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뭐라고! 가, 감히 제랄드 님한테 그런 말을!”

손가락질당한 멜이 인상을 찌푸렸다.

“꼬맹아. 이제 이거 치우자. 슬슬 재미가 없다.”

“그러죠. 어차피 요식행위니까요.”

내가 다시 손짓하자, 그제야 기다리고 있던 세르폰이 다가와 제퍼슨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 손길에 제퍼슨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제퍼슨은 황급히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도, 도련님! 이러면 안 됩니다! 제랄드 님의 분노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저를 죽이면 제랄드 님께서……!”

“당신 따위를 죽인다고 큰아버지께서 분노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애초에,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큰아버지가 내게 왜 화를 내지?”

“그, 그게 무슨……!”

나는 덜덜 떠는 제퍼슨을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곳은 내 영지다.”

그리고 나는 그저 주인 몰래 집안을 갉아먹던 벌레를 치울 뿐이고.

그제야 내가 진심이라는 걸 눈치챈 제퍼슨이 기함하며 팔다리를 퍼덕거렸다.

“도, 도련님! 도련님! 사, 살려주십시오!”

나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목을 그어 보였다. 세르폰은 곧바로 녀석을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비명이 점점 멀어지더니, 잠시 후 끊겼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토해냈다.

‘하필 제랄드가 엮이다니.’

벌써부터 제랄드의 관심이 내게 닿는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그가 날 그다지 경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조금은 이득이다.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면, 절대 이런 허술한 놈을 계속 영지 관리인으로 두고 있을 리 없으니까.’

물론 이번 일로 경계수위가 올라가긴 할 거다.

그래도 아직은 제랄드가 나를 경쟁자라고 여길 리는 없다. 그가 내 실체를 깨닫기 전까지, 최대한 빠르게 내 세력을 부풀려야 한다.

‘후계 경쟁에 참전할 수 있을 정도까지 덩치를 불려야 해.’

만약 성공한다면, 그때부터는 지금처럼 숨죽이고 기다릴 필요 없다. 본모습을 드러내도 된다는 뜻이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만 참자.’

전생의 힘을 되찾고, 그 너머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서류 더미를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는 마리에게 물었다.

“유모, 이 영지가 정상화될 때까지 얼마나 필요해?”

내 물음에 마리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으음, 글쎄요……. 제 생각보다 구멍과 문제가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죄송해요, 도련님.”

“아냐, 그게 유모 잘못은 아니잖아.”

죄가 있다면 자기 딸의 영지를 제 쌈짓돈인 것마냥 계속 털어먹던 제랄드에게 있지 않을까?

“음, 그럼 당분간은 바르헴에 남아 있어야 하려나?”

내 중얼거림에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제가 여기 남아서 일을 처리하면 되니, 도련님은 돌아가세요.”

“그건 안돼.”

나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아직 여기는 큰아버지의 수족이 득실득실한 곳이잖아. 그런 곳에 유모를 어떻게 혼자 두고 가.”

그렇다.

아직 이 영지에는 제랄드의 손길이 닿은 인간들이 넘쳐난다. 이 정도 규모의 횡령이 가능했다는 건 영지의 가신단 대부분이 이 짓에 손을 보탰다는 뜻.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같은 상황은 말이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그놈들을 죄다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영지가 안 돌아갈 게 분명했다.‘

‘아무리 못해도 최일선 실무자가 절반은 끼어있을 텐데, 그걸 다 죽이면 영지는 어떻게 굴려?’

결국, 어느 정도는 어르고 달래서 계속 써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력풀이 적으니 벌레 같은 인간들도 계속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런 곳에 유모를 두고 가라고?

‘그건 안 되지.’

마리는 딱히 무력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다. 만일 두고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려고?

‘내 사람은 지켜야 해.’

아예 내 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내 사람으로 삼았다면 나 또한 그들을 지켜야 한다.

내가 아덴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잖는가?

“도련님…….”

내 대답에 마리가 오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뭔가 감동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대견하다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돌아온 세르폰이 어째서인지 날 힐끔거렸다.

“도련님, 그럼 남은 인간들은 어떻게…….”

세르폰이 내게 물었다.

“일단 영지를 굴려야 하니까, 대부분은 살려둬야지. 하나, 필요 없는 놈들은 다 쳐낼 거야. 그 판단은 유모에게 맡길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내 신임에 마리 유모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살짝 얼굴이 상기된 게, 어지간히 기쁘고 흥분한 게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사실상 이번 일로 마리 유모는 단기간이긴 하지만 어지간한 백작령과 맞먹는 크기의 영지를 좌지우지할 자격을 얻은 셈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리텐슈노프들의 밑에 있었다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기회였다.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도련님.”

마리는 굳은 의지가 담긴 눈으로 내게 다짐했다.

* * * * *

영지의 처분을 마리 유모에게 완전히 넘긴 뒤, 나는 다시금 멜과 마주했다. 아라크네와의 전투를 복기하기 위해서였다.

“보고 피했다고?”

“네. 갑자기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무언가 더 잘 보였습니다.”

전투 중간에 느꼈던 어떤 기시감.

그것에 대해 말하자, 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멜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 그건 리텐슈노프 혈통의 권능일 거다.”

“권능이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더 잘 보이는 권능이라니, 그건…….’

전생에 아덴 리텐슈노프가 지녔던 권능이잖아?

“시각의 권능.”

멜은 궐련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그거, 내가 알기로는 리텐슈노프의 혈통 중 가장 뛰어난 권능이다. 물론 역사서에는 그보다 윗줄의 권능이 있다고는 하던데, 내가 볼 때 그건 구라고.”

맞다. 아덴이 지닌 것은 리텐슈노프 최고의 권능이었다. 누구도 아덴만큼 대단한 권능을 지니지 못했다.

‘심지어 후계 계승의 명분 중 하나가 되기도 했지.’

무려 검제 마그너스가 지닌 것과 같은 권능이다.

아무리 아덴이 에르반보다는 실력이 떨어졌다지만, 그 차이를 뛰어넘을 잠재력은 충분히 있었다. 하물며, 에르반의 권능은 그야말로 쓰레기 아니었던가?

그런 권능을, 아덴 리텐슈노프를 후계자로 낙점받게 한 권능을 내가 지니고 있다고?

“그게 사실입니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질문했다. 그 물음에 멜은 가볍게 연기를 내뿜더니, 이내 뒤통수를 긁었다.

“아마도? 일단 네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제대로 빡돌아버린 아라크네의 공격을 네가 ‘보고’ 피했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물론 이건 추측일 뿐이고, 정확한 건 나도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니…….

나는 실망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는 뜻이군요.”

그런 내 모습에 멜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하지. 권능이 제대로 발현되는 건 스무 살 즈음인데 넌 아직 열다섯 살도 안 됐잖아? 제대로 판단을 하는 건 무리 아니겠냐?”

하긴, 맞는 말이다.

권능의 발현은 스무 살 무렵. 일찍 전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권능을 쓰려면 성인은 되어야 했다.

‘지금은 내가 시각의 권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보로 만족해야 하는 건가.’

그 무렵이었다.

[확실히, 저 멜이라는 녀석도 리텐슈노프의 혈통이 아니라서 정확히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아니, 이건 세월이 흐른 탓일지도 모르겠도다.]

데우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의미심장한 말에 내가 조용히 속으로 물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네가 지닌 권능은 ‘시각의 권능’이 아니다.]

“네?”

깜짝 놀란 탓에 절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고작 그따위 파편에 불과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 나에게.

[네가 가진 건, 모든 힘의 주인이 지닌 권능.]

데우스는 깜짝 놀랄 만한 비밀을 고했다.

[바로, 용의 권능이도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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