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수련동.
내 개인 훈련실.
나는 훈련실 한가운데에 선 채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집중력이 흔들리는 탓인지 시야가 흐려졌다. 당장이고 쓰러질 것 같은 몸뚱이를 억지로 붙들고 섰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흙바닥에 떨어진다.
그 순간.
“……!!”
눈앞에 번쩍이는 빛살이 날아드는 게 보였다.
나는 재빨리 땅을 박찼다.
번쩍이며 날아드는 검격을 피한다. 권능의 힘으로 느려진 세계 속에서 모든 공격이 똑똑히 보인다. 마음으로는 모두 다 피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 내게 휘감겨오는 빛살은 너무나도 많았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검격.
마치 거대한 벽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전부 다 피할 수는 없다.
“크윽!”
그걸 인지함과 동시에, 빛살 몇 개는 검을 휘둘러 쳐내고, 몇 개는 미끄러지듯 흘려내며 회피했다.
그러나.
반격은 엄두도 내지 못할 연격이다.
그걸 곰이 재주 부리듯 전부 피해내는 건 마치 얄팍한 얼음장 위를 맨발로 내달리는 것과 흡사했다.
즉, 어려워서 돌아버리겠다는 거다.
“허억, 헉!”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고, 팔다리에 추가 매달리는 것 같다. 권능의 발현도 점차 흐릿해진다. 모든 게 명확하게 보였던 시야가 점점 부정확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챙!
좌측 하단에서 날아든 검격을 받아치는 데 실패한 나는 들고 있던 미스틸테인을 놓치고 말았다.
튕겨 나간 검이 허공을 빙빙 돌아 땅바닥에 꽂힌다.
동시에 손아귀를 찡하고 울리는 충격.
나는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르릉!
“…….”
내 목젖 바로 앞에 뭉툭한 검 끝이 겨누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 끝에는 멜이 서 있었다.
내 목에 검을 들이민 멜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말했다.
“34분 29초.”
34분 29초.
멜이 지금까지 휘두른 검격을 회피해 낸 시간이다.
무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이나 소드마스터의 검격을 피해낸 탓일까?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멜이 진심으로 검을 휘두른 건 아니었다지만, 현재 나는 아직도 5성에 불과하다. 내 실력으로는 멜이 힘을 살짝 빼고 휘두른 검격도 받아치기 힘들었다.
“허억, 허억.”
마치 몸이 물에 젖은 솜 같았다.
몰아치듯 쏟아지는 탈력감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멜은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한심하긴, 고작 이만큼 움직여 놓고 뻗냐?”
“죽을 것 같은데요.”
“그러게, 평소에 좀 몸에 좋은 것 좀 먹으면서 살아. 거지 같은 치약 맛 초콜릿 같은 건 처먹지 좀 말고.”
“그건 민트 초콜릿…….”
“어허, 치약이나 주워 먹는 놈이 어디서 말대꾸야?”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멜은 민트 초콜릿의 참맛을 모르는 불신자다. 불신자에게는 아무리 전도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미친놈.]
그 순간, 문득 과거의 일이 기억났다.
나는 안색을 바꾸고 멜에게 물었다.
“멜 경.”
“응? 왜. 뭔데.”
“이 정도면 그때에 비해서 몇 점이나 올랐습니까?”
“뭐?”
“멜 경이 일 년 전에 그랬잖습니까? 제 권능의 점수가 가주님에 비하면 6점밖에 안 된다고요.”
내 말에 멜이 미간을 좁혔다.
“지금이 그때보다는 더 권능을 잘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점수가 그때에 비해 꽤 올랐겠죠?”
“아아, 기억났다. 그거.”
멜은 염소수염의 끄트머리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47점.”
그 대답에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제가 권능을 그 정도까지 다루게 되었습니까?”
“뭐, 대충?”
진짜인가?
100점 만점에 47점이라니.
‘47점이면 거의 절반이잖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난 일 년간 멜에게 동네북처럼 얻어터진 보람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평소에는 개 못한다고 갈구시더니, 갑자기 평가가 후해지셨네요. 제가 열심히 연습한 덕분입니까?”
내 말에 멜은 뚱한 표정을 한 채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며 덧붙였다.
“아, 미안. 300점 만점에 47점.”
“…….”
그 순간, 절로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빌어먹을 인간은 조금 정이 들 법하면 나를 골탕 먹이는 못된 습관이 있었다.
“표정 봐라. 아주 그냥 똥 씹은 표정이네. 치약이라도 먹었냐?”
나는 킬킬 웃는 멜을 부루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멜이 콧방귀를 뀌었다.
“뭘, 그런 눈으로 보냐? 장난 좀 친 건데.”
“……진짜 장난 맞습니까?”
“절반쯤은.”
그럼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라는 소리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노려보았으나, 멜은 내 반응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채 기지개를 켰다.
“하여튼, 너 곧 중급반 졸업하지? 드디어 이제 나도 너한테 해방이구나. 네 스승 노릇 해주는 건 중급반이 끝이니까 말이지. 만나서 지겨웠다, 꼬맹아.”
“무슨 소리입니까? 멜 경은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듣고 온 거냐? 애가 이상한 것만 집어먹더니, 정신이 완전히 돌아버렸네.”
검지손가락을 머리 옆에서 빙빙 돌리던 멜은 이내 나를 놀리는 것도 질렸는지, 깍지 낀 손을 베개 삼아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예 수업을 포기해버리는 그 행태에 난 혀를 찼다.
“멜 경, 저 아직 졸업 안 했거든요?”
“그냥 오늘 졸업하면 안 되냐. 너 가르치는 거 귀찮아. 나도 어? 내 삶이 있다고.”
멜은 그렇게 대꾸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곧 코를 고는 그 행태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며칠 뒤.
중급반의 끝이 찾아왔다.
* * * * *
중급반 졸업 날.
마그너스가 저녁 느지막이 나를 호출했다.
‘무슨 일이지?’
딱히 별다른 짐작 가는 일이 없었던 터라, 나는 묘한 두근거림과 기대를 품고 철혈궁으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마그너스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선객이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 문이 열리곤 아자르가 밖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세요.”
“중급반을 조기 졸업한 거, 정말 축하한다. 주군께서 나가는 김에 너를 불러오라고 했단다. 지금 들어가 보면 될 거다. 아, 그리고 전에 준 선물은 잘 먹었니?”
“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어서 들어가 보렴.”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자르를 지나쳐 나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연초 내음이 코끝을 찌른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은 뒤, 천천히 집무실 책상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그너스는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울렸다.
“왔느냐.”
“네, 가주님.”
“자리에 앉거라.”
책상 앞에 놓인, 매끈한 가죽으로 만든 흑단목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마그너스는 한참 동안 말없이 궐련을 피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가문의 역사를 다시 쓴 것을 정말로 축하한다. 이제부터는 네가 가장 일찍 중급반을 졸업한 인재로 길이길이 알려지겠구나.”
“과찬입니다.”
나는 그렇게 겸양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내가 중급반을 조기 졸업할 수 있었던 건 전생의 기억과 위대한 스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과한 칭찬을 받으니 왠지 내가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
“겸손이 지나치구나. 만약 다른 사람들이 네 반응을 보면 어찌 생각하겠느냐? 이럴 때는 조금 자랑스러워 해도 된단다.”
물론 그건 온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마그너스는 그렇게 한참을 나를 추켜세우더니, 이내 자신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서랍 속에서 궐련을 한 개피 더 꺼낸 마그너스가 손끝으로 불을 붙였다.
두 개비 째 궐련을 태운 마그너스는 손가락을 비벼 손에 끼워둔 궐련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하여튼, 그래. 혹여 바라는 것이 있더냐?”
“바라는 것, 말씀이십니까?”
바라는 거?
‘있을 리가 있나.’
이미 나는 분에 넘칠 만큼의 보상을 받았다.
스승으로 멜을 붙여준 것부터, 중급반의 쓸데없는 커리큘럼을 빠질 수 있게 한 일. 케찰코아틀의 심장도 받았다. 거기다가 당장 중급반을 조기에 졸업한 것도 분명 5성을 달성한 보상 아니었던가?
‘뭐, 준다는 걸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나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할까?
내가 잠시간 보상을 고민하는 사이, 마그너스는 이미 내게 무엇을 줄지 결론을 내려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그래, 그게 있었지.”
“그거, 라니요?”
“네 첫 임무. 그걸 고르게 해 주마.”
마그너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랍 안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 서류들이 이미 서랍 안에 들어있었다는 걸 볼 때, 마그너스는 내게 임무 선택권을 쥐어줄 생각으로 날 부른 모양이었다.
“어디보자…….”
한참을 서류를 뒤적거리던 마그너스가 이내 서류 너머로 나를 슬쩍 살폈다. 곧 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자, 이 세 가지 중에 골라보거라.”
곧 마그너스가 세 장의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살폈다.
“음.”
최하급 임무 하나, 하급 임무 하나, 그리고 중급 임무 하나.
상급반 수련생에게 배정하는 임무의 최고 등급이 중급 임무라는 걸 감안하면, 고를 수 있는 가장 낮은 등급의 임무부터 가장 높은 등급까지를 제시한 것이다.
어떤 임무를 골라야 할까?
절로 고민이 되었다.
‘쉬운 임무를 고르면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자유로운 외부 활동이 보장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아직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보물이나 던전의 위치를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틈틈이 털어야 할 게 많으니까, 자유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반대로 어려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상급반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가문에 보탬이 되는 만큼 떨어질 마그너스의 총애는 덤이었다.
‘아니면 적당히 중간만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디 보자…….
괜찮은 임무가 있으려나?
그 순간, 내 눈길을 끄는 종이가 한 장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 종이를 움켜쥐었다. 내가 쥔 임무를 확인한 마그너스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하나, 지금은 마그너스의 자잘한 반응 따위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나는 서류에 적힌 임무의 수행 지역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걸 고르려는 게냐? 흠, 중급 임무는 처음 하는 입장에서 꽤 까다로울 텐데…….”
“……네, 가주님. 이 임무로 하겠습니다.”
서류에 적힌 임무 수행 지역은 ‘시빌라 - 아이스본 접경지대, 스텐필즈’
그리고 이곳은 내게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여기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있나.’
스텐필즈.
‘이곳은…….’
희대의 천재 책사, 시대의 총애를 받은 전략가.
아덴을 리텐슈노프의 후계자 자리에 올려준 사내.
‘델리우스 게인.’
그의 고향이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