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96화 (96/139)

96화

-빠득!

“……이 새끼가 뒈질라고.”

절로 이가 갈렸다.

저 시선에 담긴 의도가 똑똑히 느껴졌다.

전생에, 리텐슈노프의 사냥개였던 시절에 익히 마주했던 시선이었기에 절대로 착각할 수 없었다.

멸시.

저 덩치는 지금 나를 멸시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내게 시비를 걸었는지, 어째서 나를 멸시하고 있는 것인지, 그 이유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아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한 모양인데.’

참 재수가 없어도 더럽게 없는 인간이다.

하필 건드려도 리텐슈노프의 직계를 건드리다니.

“허허.”

분노로 피가 끓어올랐다.

하나, 머리는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나는 위쪽 좌석의 덩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내가 시선을 피하지 않자, 덩치의 눈에 분노가 일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빛에서 ‘감히 네가?’라는 뜻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

그런 내 모습에 아멜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곧, 그녀는 마치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내 입술 주변을 쳐다보았다. 뭐가 묻기라도 했나 싶어 입 주변을 매만지니, 내가 어느 샌가부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참.’

오랜만에 느낀 감정에 흥분한 건가.

리텐슈노프의 혈통을 얻은 뒤로는 느껴본 적도 없는 기분이었고, 겪어본 적도 없었던 상황인 탓이다.

‘진정해야지.’

당장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저 덩어리의 멱을 따 버릴 수도 있다. 하나, 그랬다가는 아이스본과 시빌라, 두 명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

독립도시라는 칭호는 그 두 명가의 합의를 통해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체적인 치안 유지 권한을 도시에 주었는데, 리텐슈노프가 그 규칙을 무시하고 미쳐 날뛴다?

‘그랬다가는 외교 문제다.’

그런 일이 터졌다간 지금까지 내가 열심히 쌓아 올린 마그너스의 호감도를 떨어트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안되지.’

물론 내가 현재 마그너스의 총애를 독점하는 만큼 사고 한두 번 정도는 괜찮을 지도 모르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는가?

그러니.

‘규칙으로 승부를 보자고.’

나는 씩 웃고는 팻말에 숫자를 휘갈겨 썼다.

잠시 후, 내가 들어올린 팻말에는 10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100 나왔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호가의 연속이었다.

“105!”

“120.”

“125!”

“150”

“151”

“160.”

순식간에 경매가가 수직 상승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이 끝없는 자존심 싸움을 보고 처음에는 즐겼으나, 점차 돈의 단위가 올라가자 슬슬 질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가버리고 있는 건 사슬에 묶인 채 무대 위에 서 있던 델리우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빌린 채권액을 훌쩍 넘긴 금액이 제 몸값으로 오가는 중이니, 눈이 핑핑 돌 수밖에 없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275를 팻말에 휘갈겨 썼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남은 돈을 계산했다.

‘이번 임무를 위해 가져온 자금은 금화 560개.’

작정하고 도박을 하거나, 어디 부동산을 사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전부 소비하기 힘든 고액이다.

그건 즉, 웬만한 귀족가에게도 부담되는 금액이라는 소리다. 저 덩어리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일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억에 없다는 걸 감안하면 그다지 별 볼일 없는 가문일 터.

‘이것으로 끝이다.’

상대가 280을 외치는 순간, 나는 곧바로 정확히 두 배 더 뛴 금액이 적힌 팻말을 들어올렸다.

“5, 560개! 금화 560개가 나, 나왔습니다!”

내 팻말에 쓰인 숫자를 본 사회자가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 할 일을 다 했다. 호가를 알린 사회자가 천천히 객석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올라오는 팻말도, 목소리도 없었다.

완전히 고요한 침묵이 사로잡은 경매장.

힐끔 고개를 돌리자 저 위쪽 객석에 앉은 덩어리의 얼굴이 붉게 익은 모습이 보였다. 당장이고 터질 것 같은 게 마치 썩은 토마토 같은 모습.

그 순간, 놈이 고개를 틀었다.

“……!!”

놈과 내 시선이 마주쳤고, 나는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려, 녀석을 비웃어 주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이익! 천 개! 천 개를 내놓겠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결국 선을 넘어버렸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그게 녀석의 가용 가능한 금전의 한계선이었다는 것일까?

“허어억!”

“처, 천개!”

“미, 미친 건가! 여기에 천 개를 태워!”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는 멍하니 놈을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친 새끼.’

아무리 자존심이 중요하다지만, 이딴 짓에 금화를 천 개나 던지다니. 돈이 썩어넘치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건 그냥 정신 나간 짓거리였다.

나는 가볍게 미간을 주물렀다.

내가 곧바로 호가를 하지 않자, 붉게 물들어 있던 덩어리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녀석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내게 던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내게 물었다.

“뭐야, 더 이상 호가 안 해?”

“……돈이 없다. 빌어먹을, 방금 그게 지금 쥐고 있는 돈 전부였어. 미친놈이 고작 노예 하나 값을 280에서 1000으로 올릴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뭐야, 빈털터리가 된 거였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려나.

‘돈이야 넘쳐나지만…….’

나는 영지를 세 곳이나 지닌 영주다.

가지고 있는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금화 1000개? 그까짓 거는 문제도 안 된다.

‘진짜 문제는 이게 자존심 싸움이라는 거지.’

상식적으로 금화 15개에서 20개 사이에 끝나야 할 경매였다. 그게 두 사람의 자존심을 건 승부로 변질되어 지금 여기까지 온 셈이다.

그런 상황이니,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제시하든 녀석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노예 한 명에게 금화 1000개를 태울 정도라면 어차피 저쪽도 돈은 썩어 넘칠 테니까.’

차라리 망가진 자존심을 지키고 말지, 고작 금화 몇 개 더 벌려고 내게 델리우스를 되팔 일은 없으리라.

‘리텐슈노프의 이름을 쓰는 수밖에 없나.’

내가 그렇게 결론을 내릴 무렵.

곁에 앉아 있던 아멜리아가 중얼거렸다.

“당장 돈이 필요하다면 빌려줄 의향이 있어.”

“……뭐?”

순간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심해를 연상케 하는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곧 그 눈이 살포시 접혔다.

“돈 필요하니, 친구야?”

“……정말로 필요한데, 협력자.”

내 대답에 아멜리아가 볼을 부풀렸다.

“칫, 빌려주지 말까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품 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는 아멜리아. 힐끗 살펴보니, 놀랍게도 아공간 주머니였다.

‘최소한 1000개 단위는 들어있겠군.’

대충 판단을 내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가능한데?”

“글쎄, 일단 내가 빌려주면 뭘 해줄건데?”

“뭐?”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아니. 친구라며, 방금?

“친구 사이라도 돈 거래는 철저히 해야지. 최소한 이자로 뭐라도 조금이나마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그 말에, 나는 잠시 가치를 판단해 보았다.

‘지금 이건 델리우스 게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거기에 더해 아덴에게 빼앗아 오는 기회이기도 하지.’

희대의 천재 책사를 얻음과 동시에, 빌어먹을 아덴 놈을 쥐도새도 모르게 엿먹일 수 있다고?

그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챙겨야 하는 기회 아닌가!

“내가 가능한 거라면 뭐든지.”

내 대답에 아멜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곧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고, 동시에 내 손바닥 위로 아공간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재빨리 나는 주머니를 펼치고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동시에 싯누런 금빛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졌다.

[……허어, 네 애인은 돈이 참 많구나.]

‘……누가 누구 애인이라는 겁니까?’

데우스의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넘기며, 나는 눈앞에 놓인 펜을 꾹 틀어쥐었다.

어째서일까.

‘……협력자 만만세다.’

웃음이 실실 튀어나왔다.

* * * * *

-쾅!

육중한 발이 애꿎은 문짝을 걷어찬다.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뜯겨져 나간 문이 방구석에 나뒹굴고, 동시에 씩씩거리는 콧김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진다.

터질 듯한 살집 탓에 이리저리 늘어진 비단옷을 걸친 사내, 라온 아시스는 치솟는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 개, 개자시익이!”

마치 돼지 멱따는 것 같은 목소리.

하나, 그 뒤에서 시립하고 있는 기사들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건반사적으로 공포에 질렸다.

그들의 눈에는 마치 지옥의 대악마가 격노에 차 고함을 지르는 걸로 보였다.

그들에게 라온은 그런 존재였다.

수틀리면 부하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언제나 망나니 짓만 일삼는 악독한 주인. 도저히 제 주군으로 모시고 싶지 않은 쓰레기 같은 인사.

하나, 그럼에도 그들은 라온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들이 아시스 백작에게 충성 맹세를 한 기사라는 것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온이 아시스 백작령의 소영주라는 사실이었다.

즉, 이 빌어먹을 망나니는 앞으로 미래에 자신들의 차기 주군이 될 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평범한 기사들 중에서 라온의 만행을 말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의 장난감이 된 대상을 동정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장난감, 아니면 분노의 대상은 바로 노예 경매장에서 시비가 붙은 소년이었다.

“제 주제에도 모르는 잡종 놈이! 어딜 감히 나, 라온 백작령의 정당한 후계자에게 그런 태도오를 보여엇!”

잡종이라.

솔직히 기사들이 볼 때, 소년은 꽤 고귀한 태생인 듯했다. 피부도 고왔고, 예법에도 충실했다.

거기다가 가진 재산도 꽤나 넘쳐 보였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적어넣어서 라온을 좌절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하나, 문제는 그 소년이 라온 아시스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름 방귀께나 끼는 가문인 아시스 백작령의 소영주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소년의 집안이 신흥 세력이거나, 아니면 타 지역에서 넘어온 자라는 뜻이다.

한데, 아시스 백작가는 이 근방에서 꽤나 유명한 가문이다.

타 지역의 명성 높은 귀족가들과도 충분히 교류하는 가문이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라온은 이 근방 사교계에서 망나니로 아주 유명했다.

그런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건 소년이 라온의 장난감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녀석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았다.

‘어디, 상회 주인의 아들인가 보지.’

‘가여운 것. 소영주님이 어지간히 화가 나신 모양인데. 몸 성히 돌아가기는 글렀겠군.’

‘젠장, 나는 애들 고문하는 취미 같은 건 없는데.’

그렇기에 기사들은 우중충한 표정을 한 채, 조용히 근처의 벽만 쳐다보았다.

제 주인이 실내에 있는 물건들에 최대한 화풀이를 끝마치기를, 그렇게 기운을 다 쓴 탓에 자신의 뺨을 갈기지 못하기를 빌며 말이다.

“아악! 아아악! 안되겠어, 야! 너희들!”

라온이 몇 명의 기사를 지목했다.

“네, 넵!”

동시에 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식었다. 몇 명은 입속으로 욕지거리를 씹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라온은 돼지처럼 찌그러진 얼굴로 마구 악을 썼다.

“가서 그 새끼 잡아와악! 그놈이 산 노예 새끼도!”

“아, 알겠습니다!”

그 말에 지목당한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최소한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은 미쳐 날뛰는 라온의 코앞에 서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어 명의 기사들이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나머지 기사들은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아, 맞다.”

“네, 네!”

“그 새끼 옆에 있던 녀석. 기억나냐?”

“그, 은발의 소녀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년.”

라온은 대체 언제 분노했냐는 듯,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그 년도 대려와. 아주 곱게, 잘 포장해서 말이지.”

“아, 알겠습니다!”

그 말에 기사들은 치밀어오르는 역겨움을 참으며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라온 아시스와 그 휘하 기사 열두 명의 운명이 정해졌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