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드레커 리텐슈노프.”
귓전을 찌르는 중저음에 심장이 쿵쿵 뛴다.
하나,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눈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잿빛 금발의 청년을 지그시 응시했다.
“아덴 형님.”
“거기 앉거라.”
아덴 리텐슈노프는 붉은 의자에 앉은 채 손을 까딱거렸다. 아덴이 가리킨 자리는 손님용 소파.
자신은 집무실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맞이하겠다는 그 오만한 태도에 절로 입술이 비틀린다.
“차 한 잔만 주십시오, 형님. 급하게 달려오느라고 목이 타는군요.”
“그러냐? 알겠다. 이봐, 여기 차 한 잔 대령하라.”
아덴이 종을 울리며 외치자, 밖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곧 묘령의 여인이 아름다운 도자기에 담긴 차 한 잔을 내왔다.
붉은 빛의 홍차.
나는 홍차를 조용히 음미하며 아덴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서로의 위치가 다르다, 이거구만.’
불쾌하지만, 지금 당장은 맞는 말이다.
아직은 내 세력이 녀석보다는 작으니까 말이다.
씁쓸함을 삼키며 나는 아덴에게 물었다.
“형님께서 보낸 사람이 말하기를, 임무를 내려주기 위해서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직계들은 이런 식으로 임무를 내려받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우리 막내에게 좋은 임무를 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직접 손을 쓴 거란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아덴 형님.”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덴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 미소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부터 천천히 파헤쳐 봐야 하리라.
“그래서, 어떤 임무입니까? 송구한 말씀이지만, 저는 쉬운 임무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건 원치 않아요.”
일단은 선을 그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던지는 순간 자리를 파하겠다는 내 선언에 아덴이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알고 있단다. 첫 임무부터 중급 임무를 수행해보인 너라면 별 것 아닌 임무는 성에 안 차겠지. 그래서 일부러 최하급 임무들은 뺐다.”
“……감사합니다.”
최하급 임무를 전부 제외했다라.
나는 홍차를 삼키며 표정을 숨겼다.
[분명 속셈이 있어 보이는구나.]
‘그렇겠죠.’
[딱 봐도 음흉한 얼굴이야. 마치 꼬맹이, 네 녀석 같이 말이다.]
‘조용히 하세요. 탈모 드래곤.’
[아니, 나는 탈모가 아니라니깐!]
나는 아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붉은 눈이 나를 살핀다. 속에 담긴 음울하고 저열한 감정이 절로 넘실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럼 어떤 임무입니까? 중급입니까?”
“중급 임무는 아니다. 너는 이제 고작 열두 살 아니더냐. 방금 막 중급 임무를 끝마치고 온 네게 그런 무리를 하게 할 수는 없지. 네가 받을 건 하급이란다.”
“아, 그렇군요.”
나는 다시금 홍차를 마시며 표정을 가렸다.
이것으로 아덴의 속셈이 더욱 더 확실해졌다.
만일 아덴이 내게 최하급 임무를 주었다면, 사실 그건 중급 이상으로 임무였을 것이다. 차마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임무를 주면, 내가 임무 수행 중 죽어버리는 걸 기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만일 아덴이 내게 중급 임무를 주었다면, 그건 암살자를 보내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어려운 임무 도중에 방해꾼이 나타나면 감당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덴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다.
최하급도, 중급도 아닌 하급 임무.
‘내가 하급 임무 따위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걸 준다, 라…….’
덕분에 쉽게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나를 유인할 속셈이군.’
내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장소를 특정해,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할 생각이다. 아마 그 장소에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적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이 계획을 입안한 건 아덴이 아닌 그라힐이다. 이건 아덴의 스타일이 아냐. 이번 암살 음모에서 아덴은 조력자에 불과하다.’
천천히,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그럼,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겁니까?”
정보가 차오른다.
“일단은 하급 임무고…….”
구멍난 부분이 채워지고, 모든 게 명확해진다.
“대수림에서 진행되는 요인 수색 임무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
순간적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응? 왜 그러니. 갑자기 얼굴이 굳고. 혹시 차 맛이 너무 쓴 건가? 아니면 대수림은 가기 싫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나는 황급히 표정을 풀고 손사래를 쳤다.
하나 두근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런, 젠장할.’
등줄기를 타고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고, 손아귀가 젖는다.
나는 입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곤 이를 악물었다.
‘요정왕인가…….’
그라힐은 나를 죽이기 위해 요정왕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요정족이 아닌, 요정왕 본인의 힘을!
‘그래서였나? 아덴이 관여하지 않은 게?’
아덴은 그라힐이 요정왕과 연인 사이라는 걸 모른다. 그렇기에 그저 나를 유인하는 부분에서만 관여한 것이다.
만일 아덴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의 악취미스러운 계획이 더해져 더욱 더 짜임새 있는 함정이 나를 향해 이를 벌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알고 있었다면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려나.’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라헬 엘븐하임과 맞부딪쳐야 한다니.’
절로 이가 갈리고, 긴장이 치솟았다.
‘위험한데, 이거.’
현 요정왕, 라헬 엘븐하임.
그는 7성의 소환사로 알려져 있었다.
왜 ‘알려져 있었다’라는 표현을 쓰냐면, 실제로 그녀는 7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7성이지만 실제 가진 바 능력은 7성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제랄드가 그라힐을 숙청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제랄드가 가주 직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형제들과 함께 형제의 자식들 중 머저리라고 판단된 녀석들을 전부 치워버린 것이었다.
그라힐은 그 중 첫 번째 표적이었고 말이다.
‘하나, 그건 실수였지.’
그라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요정왕이 분노에 가득 차 리텐슈노프에게 전쟁을 걸어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에 제랄드는 코웃음을 쳤다.
고작 해봐야 7성 따위의 요정왕이 전쟁을 걸어봤자 뭘 할 수 있겠느냐는 게 이유였다.
하나, 전쟁이 장기화되며 리텐슈노프는 깨달았다.
요정왕은, 제 힘을 숨기고 있었다고.
아니, 전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고!
누구도 요정왕이 가진 진짜 힘을 알지 못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마약에 찌들은 채 평생 제가 요정이라고 믿어 온 정신병자가. 사실은 마스터 급의 자질을 지니고 있을 줄을.’
소환의 대가.
그 전쟁이 끝날 무렵, 요정왕이 얻은 이명이었다.
물론 결국 요정왕은 죽었다.
아무리 요정왕이 마스터 급이라지만, 오대 명가 중 하나인 리텐슈노프가 지닌 저력은 어마어마했고, 심지어 아이스본까지 리텐슈노프 쪽에 합세해 요정왕을 토벌했으니까.
물론 아이스본이 왜 리텐슈노프를 도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나, 결론적으로 요정왕의 세력은 명가 두 개가 힘을 합쳐야지만 물리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거다.
요정왕 또한 마스터는 되어야 상대가 가능하고 말이다.
‘그런 녀석이 나를 노리고 있다…… 이거지.’
입안이 텁텁해진다. 진짜로 목이 탔다.
나는 홍차를 쭉 들이켰다.
“이런, 천천히 마시거라. 하여튼 그래서 이번 임무는 요인을 수색하는 것이다. 오르피스 근방에 자리한 후작가의 영애가 사라졌는데,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대수림 근처라고 하더구나.”
“……그렇군요.”
“대수림을 샅샅이 훑어야 할 수도 있기에 하급 임무로 분류되었지만, 솔직히 여자애 하나 수색하는 거니 쉬울 거다. 어려울 건 없는 임무지. 한데, 그 후작가에서 수색에 제시한 돈이 워낙 많으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 거다.”
아덴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힐끔 살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싱긋 접힌다.
“할 수 있겠지?”
“…….”
자, 그럼 어떻게 할까.
‘거절하면 곤란하다.’
이 정도 일로 내 평가가 왕창 떨어지지는 않겠으나, 어느 정도 감점은 받을 거다. 더군다나 아덴이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리 없다. 아마 상급반 교관들을 움직여서라도 이 임무를 내게 쥐어주고 말거다.
‘거기서까지 포기하면 진짜로 평가가 떨어진다.’
물론, 목숨에 비하면 평가 따위는 사소한 거다.
죽으면 모든 게 아무 것도 아니니까.
‘…….’
나는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쨍!
힘이 가득 실린 찻잔이 접시 위로 떨어진다.
그 소리에 아덴이 눈을 치켜떴다. 뱀 같은 시선이 나를 훑는다. 어디 한번 선택해보라는, 하지만 그래봤자 너는 내 손바닥 안이라는 시선.
-빠득!
나는 찻잔을 내려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아덴은 동요하지 않고 그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곧 녀석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지?”
그제야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미소를 억지로 짓는다.
“형님께서 주신 기회 아닙니까? 받들겠습니다.”
“……좋다.”
그래.
어차피 도망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맞부딪치는 수밖에.’
그리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대로 당해서 죽어줄 생각도 없고 말이다.
* * * * *
드레커가 떠나고.
홀로 남은 아덴은 의자에서 일어나, 방금까지 드레커가 앉아 있던 자리로 향했다.
지그시 테이블을 내려다보자 살짝 금이 간 찻잔이 보인다. 그 실금이 몹시 불쾌하게 느껴져, 아덴은 사용인을 불러 찻잔을 치우게 했다.
그 무렵, 누군가가 집무실을 노크했다.
“들어와.”
아덴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목소리가 신호라는 듯, 곧바로 문이 열리며 에드워드가 실내로 들어왔다. 아덴은 천천히 얼굴을 피며 에드워드를 마주했다.
“어서 오게. 그래, 어땠어?”
“드레커, 말입니까?”
아덴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 자입니다. 속내가 절대 그 나이에 맞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어린 헛똑똑이 같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게 계산입니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자신의 나이와 행적까지도 전부 이용하는 노련함이 있습니다. 앞으로 만나실 때는 주의를…….”
“나는. 아닌 것. 같다고.”
한 음절씩 끊는 말투에, 에드워드는 열심히 놀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아덴은 그제야 일그러진 얼굴을 피며 천천히 소파에 걸터앉았다.
“찻잔을 부수더라고.”
“네?”
“내가 내어 준 찻잔을, 내 제안을 듣고는 깨트려버렸다, 이거지. 결국 제안을 듣고 동요했다는 게 아니겠어? 아직 어린 게 맞아. 고작 임무를 내려주는 것 따위에도 그렇게 걱정이 가득하다니.”
“하지만, 그것조차도 연기라면…….”
“내가 볼 때, 그거까지도 연기면 그 새끼가 가주 해야 해. 그런 놈을 어떻게 이겨?”
아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반응에 에드워드가 말끝을 흐렸다.
“그건…….”
아덴은 테이블 서랍에서 파이프를 꺼냈다.
파이프에 연초를 담은 뒤, 불을 붙인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아덴이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말라고, 집사. 주의하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드레커 녀석은 그라힐, 그 병신이 치워줄 녀석이잖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
“지금 중요한 건 에르반, 그 새끼지. 그래서 아직도 모르는 거야? 에르반 그 양반이 계속 수장고에 파묻혀 있는 이유는?”
“네. 물론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과, 찾는 물건이 그 수장고에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했습니다.”
“젠장, 대체 뭘 찾는 거야? 그 인간은.”
아덴은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이며, 품속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낡은 겉면에 이름 모를 자의 서명이 새겨진 수첩에는 아덴의 형수의 사진이 끼어 있었다.
아덴은 수첩을 펼쳐, 특정 페이지를 살폈다.
페이지를 노려보던 아덴이 말끝을 흐렸다.
“용의 심장이라니……. 그게 뭐냐고.”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