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함정이라는 걸 알고도 당해줄 셈이더냐?]
아덴의 저택을 빠져나온 직후.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데우스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니까요.”
어차피 정식으로 임무가 내려오면 답이 없다.
심지어 ‘즉시 출발’ 같은 식으로 임무가 떨어지면 준비할 시간조차도 가지지 못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일찍 계획을 짜고 내 손으로 임무를 받아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채비하는 것도 그렇고,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할 준비도 미리 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무어, 그럴지도 모르지.]
데우스가 입맛을 다시며 그렇게 답했다.
“그럴 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그게 맞습니다.”
[말대꾸 하지 말거라, 이놈. 그리고 이전부터 말이다. 자꾸 나를 탈모용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주 풍성한 머릿결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안 미끈거린다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드래곤도 머리카락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은 머리에 아무것도 없는데? 비늘뿐이라서 그냥 미끈미끈한 거 아냐?
의아한 마음에 묻자, 데우스가 신바람 난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했다.
[그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내게는 아주 결이 좋아 찰랑이는 머리칼이 있다, 이 말이다.]
“왠지 설명만 들으면 가발 같은데요?”
[……거, 네 녀석도 나중에 머리털이 숭숭, 숭하게 빠질 날이 올 게다. 그때 가서 울지 마라.]
“가발 맞네, 뭐.”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나는 유아동으로 향했다.
‘일단 빨리 움직이자.’
임무를 받은 만큼,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챙길 것이나 만날 사람은 딱히 없었다.
어차피 안톤, 가롯, 루시엘, 제이스는 내가 급하게 떠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으니까. 그렇다고 마리 유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르폰이야 어차피 상급반 임무에는 같이 따라갈 수 없다.
‘일단 무구부터 챙기자.’
마르스의 완갑과 미스틸테인은 기본적으로 챙기는 물건이다. 내가 챙겨야 할 것은 가문의 무구.
나는 곧바로 가문의 무구 창고로 향했다.
‘일단 상급 방어 마법이 걸린 흉갑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오우거 뱃가죽으로 만들어 방어용으로 쓸 수 있는 망토. 스틸 호드의 가죽을 덮은 각반.
나는 빠르게 무구 창고에서 필요한 걸 챙겼다.
“좋아. 이 정도면 되겠다.”
무구 창고를 지키는 쇠매 기사단 소속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해 준 뒤, 나는 곧장 유아동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그런데.
“어?”
유아동에는 예상외의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지냈냐, 꼬맹아?”
멜 랭커스터는 까맣게 탄 피부를 한 채, 손에 든 새까만 연경을 까딱이며 내게 웃음을 던졌다.
* * * * *
“멜 경?”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의아한 일이었다.
이 인간이 대체 왜 나를?
‘찾을 이유가 있었나?’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하지만.
‘잘 됐군.’
어차피 멜은 내가 찾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마스터를 상대하려면 이쪽도 마스터를 한 명 쯤은 데리고 가 줘야지.’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 오래인 멜이라면 요정왕과도 분명 호각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여긴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당연히 너 때문에 왔지, 이 쥐똥 같은 꼬맹아.”
멜은 그렇게 툴툴거리며 연경을 얼굴에 썼다. 검은색 유리알이 그의 붉은 눈동자를 완벽히 가려주었다.
“저 때문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나 때문에 올 일이 있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절로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혹시 가주님께서 무슨 명령을 받으셨습니까?”
“뭐…… 비슷하지? 최종적으로 마그너스 님께서 허가를 내리셨을 테니까.”
“허가?”
여전히 의문투성이인 상황.
그 순간 멜은 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임무 하나 받았지? 그 임무에서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에서 너를 지키라고 아자르가 날 보냈다.”
“아자르 님이요?”
아자르가 명령했다면, 아마 그건 마그너스의 의지일 것이다. 아자르는 마그너스의 검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혹시 가주님께서도 요정왕이 움직인 걸 아십니까?”
“아, 그게 그래서였나? 흠. 하긴, 그게 그런 건가.”
그러나 멜은 이상한 반응만 내뱉을 뿐이었다.
내가 답답함을 느낄 무렵. 멜이 입을 열었다.
“일단 위쪽에서는 요정왕이 움직이는지는 몰라. 이번에 알게 된 것은 그라힐이 너를 노리고 진짜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웠고, 그 과정이 이번 임무라는 것뿐이니까.”
“그렇습니까?”
“그런데 요정왕이라……. 생각보다 귀찮겠는걸.”
멜은 그렇게 대답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나는 그런 멜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말을 해야 하나?’
요정왕이 사실은 마스터 급 강자라는 걸 알려줘야 하나?
하지만 그걸 알려주면, 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추궁당할 게 뻔했다. 대외적으로 지금 세상에 요정왕은 7성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말이다.
고민으로 머릿속이 가득 찰 무렵.
나를 힐끔 바라보던 멜이, 중얼거렸다.
“설마, 너도 알고 있냐?”
“네? 무엇을 말입니까?”
“요정왕이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걸.”
그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어디선가 쿵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순식간에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나는 끼긱거리는 목을 돌려 멜을 바라보았다.
검은 연경 탓에 표정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긴장이 치솟는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대답을 골랐다.
“마그너스 님이 말해주셨냐?”
그 순간. 멜이 물었다.
시간이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나는 숨을 쉬었다. 멜은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안, 안 들키고 잘 넘어간건가?’
나는 속내를 삼키며, 멜에게 물었다.
“그걸 멜 님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너, 방금 내 말을 뭘로 들었냐?”
“아…….”
그제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마그너스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군.’
마그너스가 알고 있다면 아자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리텐슈노프 수뇌부는 요정왕의 저력을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어째서 요정족 암살자가 계속 나를 암살하려고 시도하는데, 요정왕을 7성이라고 알고 있을 마그너스가 요정족을 짓밟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절로 입맛이 썼다.
‘젠장, 확실히 델리우스가 한 말이 맞군.’
델리우스 게인은 말했다.
마그너스 사후, 리텐슈노프는 나약해졌다고. 오대명가라고는 불러줄 수는 있으나, 세력은 빛이 바랬다고. 지금까지 윗자리에서 안주한 탓에 독보적 1위였던 호엔슈타펠과 함께 리텐슈노프도 추락했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는 파악한 걸, 고작 한 세대 만에 잊다니.’
아무리 마그너스가 급사로 떠났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조사를 해 보았다면 분명 알 수 있는 사실일 터였다.
‘그걸 조사하지 않아서 개처럼 털리다니. 역시 제랄드, 이 인간도 가주 자리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어.’
빠득.
전생에 그 전쟁에서 했던 개고생은, 사실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이가 갈렸다.
하나.
전생은 전생.
그리고 나는 지금 리텐슈노프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집중하자.’
나는 멜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요정왕이 마스터 급 강자라는 건 알고 있겠군요?”
“뭐야, 마그너스 님이 너한테 그것까지 말해줬어?”
내 말에 멜이 깜짝 놀랐다.
역시, 마그너스는 전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고작 이 정도 정보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아덴과 제랄드를 속으로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의하라고 말하시더라고요.”
“허, 그렇군. 하여튼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널 호위하게 되었다. 물론 임무는 임무고, 실제로 사건이 터질지 아닐지는 모르니 원거리에서 경호를 하겠지만.”
“이전에 스텐필즈에서처럼 말입니까?”
“뭐, 그건 경호가 아니라 감시였지만. 그래.”
그 정도라면 나쁠 건 없었다.
어쨌든 이번 임무도 임무는 임무니까.
‘진짜로 후작 영애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임무의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수행하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일이다. 진짜로 그런 후작가에서 수색 의뢰를 넣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임무는 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원거리에서 경호하시는 걸로 하시죠. 저도 임무 평가를 짜게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너는 이런 상황에서 임무 생각이 나냐?”
“그럼요.”
당연하지.
점수 잘 받을라고 이 개고생을 하는 건데, 이것도 개판으로 받는다면 억울해서 살지 못한다.
아니, 막말로 임무 평가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점수고 뭐고 그냥 위험해 보이는 임무는 안 받으면 된다.
그럴 수 없으니까 위험을 감수하는 거고.
‘아마 그라힐도 그걸 알고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
내 행동 방식을 읽힌다는 게 기분이 좋진 않으나, 아직까지 수련동 소속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뭐, 일단은 그렇게 알고. 그래서, 바로 출발할 생각이냐?”
멜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갈 생각입니다. 오히려 시간을 주면 저쪽도 더 준비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이미 저한테 필요한 준비는 끝냈습니다.”
“그래, 뭐. 알겠다.”
멜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게, 마스터 급 소환사와 싸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한 것 같았다.
‘멜이 긴장할 정도라니.’
절로 나 또한 긴장이 되었다.
나도 요정왕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는 죄다 소문이나, 경험담으로 들은 것 뿐.
하나, 그 소문의 정확도가 높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무려 요정왕과 직접 전투를 해 보았던 아덴의 입에서 나온 정보였으니까 말이다.
‘나도 할 수 있다.’
아덴, 그 놈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되뇌이며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 *
물건을 챙겨서 떠나는 드레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멜은 생각했다.
‘뭐하는 놈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거짓말을 할 줄이야.
‘마그너스 님이 너한테 그런 걸 알려줄 리가 없잖아.’
자신도 며칠 전에야 알게 된 정보였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움직여 조사해서 말이다!
최근 멜은 마그너스에게 요정왕에 대해 조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 탓에 스텐필즈에 다녀온 이후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땡볕에서 굴렀다.
그의 피부가 타버린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알아낸 정보를.
‘저 꼬맹이가 먼저 알고 있다고?’
그건 불가능하다.
‘아직 마그너스 님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드레커가 이 정보를 알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드레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 못해, 능청스럽게 거짓말까지 했다.
‘허, 어이가 없군.’
멜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젠장, 이런 짓은 안 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다. 의심스러운 건 알아봐야 하니까.
그래야 가주를 옹위하고 가문을 수호할 수 있다.
그게 ‘징벌기사단’의 사명이다.
“아오! 이거, 야근 수당은 줘야하는 거 아냐?”
멜 랭커스터가, 드레커의 뒷조사를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