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박사박
낙엽 밟는 소리가 아른아른 울려 퍼진다.
퇴적된 부엽토가 푹신하게 발을 감싼다.
‘이 정도면 발자국은 분명 남았을 텐데.’
후작 영애의 흔적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분명 오르피스에서는 넘쳐나던 흔적이, 숲으로 들어오자마자 툭 끊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마치 잘라낸 것 같았다.
분명 흔적은 존재했다.
하나, 그 흔적들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나의 흔적에서 다음 흔적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을 수색에 투자해야 했다.
‘이거 참.’
아무리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다지만, 이렇게 되니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물론 그러면서도 바닥을 샅샅이 훑는 건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 드디어.”
흐릿하게 남은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내 것은 아닌 발자국.
그렇다고 이 숲에 들어온 다른 사람일 리는 없다. 영애가 신은 신발 자국의 크기와 모양은 이미 외워두고 있었으니까.
‘또, 이것뿐인가.’
나는 발자국을 노려보며 혀를 찼다.
요정왕, 또는 그라힐이 계속 나를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후작 영애는 용병 무리와 함께 이 숲에 들어왔다.
그 무리의 인원수만 무려 열두 명.
그런데 계속 영애의 발자국만, 그것도 툭툭 끊겨서 한 곳을 향해 발견된다? 차라리 이쪽으로 오라고 안내 표지판을 세워두는 것이 더 안 어색할 지경이다.
“쯧.”
나는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사방은 조용했다.
어디에서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감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요정족 암살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하나.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멜의 기척도 이제는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간 거야?’
뒤를 봐주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진다.
혹시라도 멜이 먼저 요정왕과 전투에 돌입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그랬다간 이 주변의 땅이 다 뒤집어졌을 거다.
마스터 간의 전투는 그런 법이다.
데우스 또한 주변을 살펴보고는 내게 알렸다.
[주변에 몬스터도 없는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왠 사슴이 좀 보이긴 하는데……. 차라리 배라도 좀 채우는 게 어떻겠느냐? 사람은 뭘 좀 먹으면 긴장이 풀리는 법이도다. 사슴이라도 구워 먹거라.]
“……사슴이요?”
뭔 소리야?
“대수림에 사슴이 왜 있습니까?”
여긴 몬스터가 가득한 숲인데?
그런 야생동물이 여기서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게?]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사슴.’
저 멀리 사슴들이 보인다.
마치 나뭇가지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두 개의 뿔.
길쭉한 귀와 동그란 코. 그리고 거뭇한 눈망울.
분명 사슴이었다.
사슴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대여섯 마리의 사슴들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이다.
문제는 저게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점일까.
‘대체…….’
그 순간.
나는 기괴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사슴들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 움직임을 따라 사슴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마치 표적을 향해 조준된 지팡이 같은 모습.
절로 등골이 서늘해진다.
‘요정왕이 다루는 소환수.’
그 중에 분명히 ‘사슴’이 있었다.
그 순간.
사슴 중 한 마리의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다.’
“……?!”
뭐, 뭐야?
절로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사슴의 머리통이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쭉 찢어지더니 두 덩이로 쪼개졌다. 두 덩이 사이에는 수많은 눈알이 가득 박혀 있었다.
그 눈알들 또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 이런 씨발!”
나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달렸다.
-투두! 투두!
곧바로 등 뒤에서 따라붙는 발굽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나는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뭐야? 뭐냐고.’
저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일단 하나 확실한 건,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일까.
‘차라리 한 마리였다면 싸워보기라도 했을 텐데.’
저 숫자는 위험하다.
‘정체를 파악해야 싸우든 말든 하지!’
얼마나 강할지 모르니, 어쭙잖게 상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전력을 다하자니, 저건 요정왕이 다루는 소환수의 일부에 불과하다. 중요한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 힘을 아껴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쯧.’
달리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코앞까지 따라붙은 사슴의 눈알들이 번뜩인다.
동시에 사슴의 등이 쭉 찢어졌다. 등짝 안에는 날카로운 검은 가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다음 순간, 가시가 내게 발사되었다.
“미친!”
-투두두두!
곧바로 미스틸테인을 휘둘러 가시들을 쳐냈다.
손 끝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거기다가 한 발 한 발에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이 정도의 가시라면 마나 스킨 정도는 쉬이 뚫을 수 있으리라.
‘저게 무슨 사슴이야!’
[저게 사슴일 리가 있겠느냐? 이계의 괴물이잖느냐!]
빌어먹을 요정왕 같으니라고.
-투두두두두!
가시는 계속 날아들었다.
처음 내게 가시를 날렸던 사슴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서 따라붙던 다른 놈들까지도 등짝을 열고 가시를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빌어먹을!”
빽빽이 솟아난 나무 틈바구니를 계속 스쳐 지나가며 나는 가시를 피해냈다.
하나, 이러한 회피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 탁 트인 공터가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몰리면 귀찮아진다.’
그러니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곧바로 마르스의 완갑을 발동시켰다.
순식간에 펼쳐진 마나의 방벽.
그 위로 가시들이 날아든다.
-티디디딩!
‘좋아!’
역시 예상대로 마르스의 완갑은 날아드는 가시들을 완벽하게 방어해냈다.
위대한 대전사의 물건다운 효과.
‘이 후로 7초.’
7초.
놈들이 다음 가시를 발사하기까지의 간극이다.
그 시간 동안 놈들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지금까지는 내가 도망치는 데 집중했기에 그 간극의 존재를 깨달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나는 미스틸테인을 쥔 손에 꽉 힘을 주었다.
“흐읍!”
동시에 크게 휘두르며 검격을 흩뿌렸다.
-콰직!
반월처럼 뿌려진 바인더샤칼의 오러.
그것이 달려드는 사슴 한 마리를 물어뜯었다.
-끼이아아악!
동시에 인세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진다. 반 토막 난 사슴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나, 고작 한 마리다.
나는 두 번째 검격을 준비하며, 곧바로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두른다.
다시금 섬광이 명멸하며 사슴 두 마리의 목이 물어뜯긴 채 허공을 날았다. 울려 퍼지는 비명이 안온한 숲의 분위기를 소름 끼치게 뒤바꾼다.
그 두 검격을 휘두르는 데 걸린 시간이 7초.
곧바로 다시 가시가 쏘아진다.
-투두두두!
마르스의 완갑으로 방어하며 가볍게 땅을 박찬다.
그대로 검을 내질러 사슴의 목젖을 꿰뚫는다.
검 끝에 피륙이 갈라지는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사슴 괴물의 등짝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저기가 입이었나?’
그럼 뱉어내는 가시는 대체 뭐야?
심심한 의문을 집어치우곤, 나는 사슴을 걷어차 검을 뽑아냈다. 그대로 반월을 그려 목을 베어낸 뒤, 다음 목표를 찾는다.
그 순간.
“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그렇게 무참히도 도륙하다니, 참으로 고얀 친구로군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마치 뼈마디를 부딪치고 비벼서 만드는 것 같은 깨진 음성.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사슴. 아니, 순록이었다.
다른 사슴과는 다른, 널찍하고 평편한 뿔을 지닌 순록의 목에는 기다란 입이 붙어 있었다. 목소리는 그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파악했다.
“요정왕.”
“어머, 여를 아나요?”
“알지, 제가 요정이라고 생각하는 광인 아닌가?”
“여에게 흉흉한 참언을 하는 그 행태는 필히 호된 벌을 받아도 싼 짓이에요. 한데, 얼굴도 곱상하고 육신도 탄탄한 게, 참으로 여의 어심을 흐리게 하는군요. 하지만 여는 피앙세가 있답니다.”
“뭐라는 거야, 이 약쟁이 년이.”
“어차피 친구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 그러니 그런 말을 해도 나는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아요. 오히려 친구가 명계로 가는 길을 고되게 할 뿐이랍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찢어지고 깨지는 듯한 음성이 그 웃음소리를 마치 지옥 문턱에서 흘러나오는 악마의 광소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는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럴지도. 근데, 설사 내가 죽는다고 해도 최소한 그라힐, 그 병신은 내 저승길 길동무로 데려갈 거니까, 잘 알아두라고, 이 미친 약쟁이 년아.”
“뭐라? 네 이놈이 감……!”
나는 곧바로 몸을 날려 그 순록의 목을 베어버렸다.
목이 베이는 즉시 목소리는 끊어졌고, 나는 남은 사슴 한 마리도 죽여 버렸다.
“후우.”
전투가 끝나자, 그제야 머릿속이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의아한 점이 떠올랐다.
‘너무 약한데.’
이 사슴들은 요정왕의, 7성 소환사의 소환수라기에는 너무나도 약했다. 아니, 정확히는 공격 능력은 강했다. 단지 체력이나 방어 능력이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야말로 야생 동물이나 다름없는 육신.
‘대체 이런 놈들을 왜?’
왜 이런 어중간한 놈들을 소환수를 쓴 거지?
[네가 한 이야기대로라면, 소문 때문일 것이다.]
“소문, 말입니까?”
[요정은 동물과 친하다는 설화가 있도다. 그러니 최대한, 평범하게 생긴 야생동물과 흡사한 이계의 괴물들만을 부리는 게 아니겠느냐?]
“허, 진짜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자기가 부릴 소환수를 고르다니.
‘검에 달린 장식 모양이 안 예쁘다고 장식용 검을 고르는 꼴이잖아?’
진짜로, 요정왕은 미친년이 틀림없었다.
‘그런 놈이 하필 마스터 급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니…….’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법이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조용히 하세요.”
나는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쯧.”
[그 요정 년이 화가 많이 난 모양이로구나.]
“그러게요.”
사방에서 우수수 몰려드는 사슴들.
[어쩔 테냐? 아무리 이놈들이 약하다지만, 이 숫자를 상대하기는 힘들 텐데.]
“어쩌긴요, 뭘 어쩝니까.”
나는 미스틸테인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데우스가 신바람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사나이라면 그래야지!]
“…….”
[아무리 적이 강대하다고 해도 허무하게 도망치면 쓰나! 싸울 때는 싸우는 게 남자의……. 꼬맹아, 너 어디 가는 게냐?]
“사나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 숫자면 당장 튀어야죠! 포위당했잖아요!”
[이런, 나약한 놈!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운 적 없도다!]
“데우스 님이 아니라, 마리 유모가 키웠거든요?”
그렇게 소리치며, 나는 땅을 박찼다.
그래.
이건 작전상 후퇴다.
절대 도망치는 게 아니다. 암.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