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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110화 (110/139)

110화

‘몰이 당하고 있다.’

쫒아오는 사슴들을 힐끗 살피며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무수히 솟아난 나무들과 사방에서 들이치는 사슴 때문에 방향 감각이 틀어져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저 사슴들은 나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움직임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건가.’

분명했다. 요정왕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도록 나를 유인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씹었다.

-끼이아아아!

사슴 괴물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날아드는 가시를 피했다.

동시에 왼쪽에서 사슴 한 마리가 내게 뛰어들었다.

“어딜!”

그대로 검을 위로 올려 긋는다.

휘두른 검격에 반토막이 난 사슴의 상반신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다. 곧 비명이 하나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쫓는 사슴은 넘쳐났다.

[확실하구나.]

“네?”

[확실히 7성이라고 하기에는 다루는 숫자가 너무 많도다. 저 괴물들이 아무리 육체적으로는 나약하다지만 그 전투 능력은 발군이잖느냐? 그런 괴물을 저렇게 많이 다룰 수 있는 녀석이 7성일 리가 없도다.]

그 말 그대로다.

저 숫자는 솔직히, 7성이라기엔 너무 많았다.

물론 7성 소환사도 이 정도 소환수를 다룰 수는 있다. 아무리 그래도 7성이 만만한 등급은 아니니까.

하지만.

‘소환사의 특징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

소환사는 스스로의 전투 능력이 전무하다.

아니, 전무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대체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소환사는 자신을 지킬 소환수를 따로 준비해두기 마련이다.

심지어 이런 견제와 유인을 위한 공격이라면, 이놈들을 소환하는 데 쓴 힘은 그다지 많지 않을 터.

‘분명 진짜 주력 부대는 요정왕의 곁에 있을 거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곳으로 유인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

나는 마르스의 완갑으로 날아든 가시를 막아냈다.

그리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계속되는 몰이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언제까지 사람을 몰기만 할 거냐.’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확실하다.

지금 나는 한 곳을 빙빙 돌고 있었다.

‘힘을 빼두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나는 리텐슈노프고, 그라힐 또한 대충이나마 내 본 실력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신중한 요정왕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이런 식으로 내 체력과 정신력을 고갈시킬 계획을 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이쯤 됐으면 슬슬 모습을 드러내 달라고.’

그래야 멜에게 내 위치를 알릴 것 아닌가.

나는 목에 걸어둔 신호용 아티팩트를 힐끔 확인했다. 마치 호루라기 같이 생긴 아티팩트는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다.

‘이걸 쓸 틈이 있어야 할텐데.’

나와 멜의 계획은 이러했다. 아티팩트를 이용해 멜을 호출하고, 함께 요정왕과 싸운다.

문제는 멜의 기척이 너무나도 멀어졌다는 것이었다.

‘멜이 내 흔적을 뒤쫓지 못할 리가 없다.’

이유 없이 나와 멀어질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아무래도 이 숲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네요.”

인식 저해, 또는 환각.

어떤 것이든 간에, 소드마스터의 기감을 흐트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법, 또는 무언가가 이 숲에 발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소환수의 능력일 것 같은데…….’

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대규모 지역에 인식 저해를 거는 소환수.’

전생에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젠장, 지금 시기에 그 놈을 다루고 있다고?’

그 녀석은 전쟁 후반기에나 튀어나오던 놈이 아니었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요정왕은 이 시절부터 그 소환수를 부렸을지도 모르지.

‘…….’

미스틸테인을 쥔 손에 땀이 찼다.

이번이 진짜 엄청난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드마스터를 두 명이나 잡아 먹은 괴물…….’

그런 괴물 소환수를 상대하게 되다니.

절로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그라힐과 요정왕을 치워두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저들은 내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암살자든, 뭐든 보내서 계속 나를 귀찮게 하리라.

‘한 놈만 치우는 건 의미가 없다.’

그 두 녀석이 서로 한 몸이나 다름없는 만큼, 둘 다 치워버려야 할 적이다.

그리고, 이번이 기회였다.

마그너스에게 암묵적인 허가를 받았고, 언제나 심처에 숨어서 웅크리고 있던 요정왕이 제 모습을 드러낸, 이 순간.

이 순간을 놓치면 그 이후에는 더욱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만 저들을 치울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 붙잡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

-솨아악!

눈앞을 가로막던 빽빽한 수해가 순식간에 옅어지고, 곧 거대한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보인 것은 어마어마하게 드높은 나무.

붉은 잎이 울창한 나무는 그 큰 덩치로 인해 만들어진 그림자만으로도 공터를 어둡게 가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무는 기괴했다.

죽죽 뻗은 가지는 어째서인지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사방에 핏줄 같은 무언가가 피어나 맥동하고 있었다.

희뿌연 안구가 이곳저곳에 꽃처럼 피어 있었고, 나무줄기에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입이 달려 있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이빨 사이로, 핏줄 가득한 눈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눈알 아래에 황금빛 가마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가마는 화려했다.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되고 여러 가지 문양이 가득했으며, 보석으로 엮은 발이 드리내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모습은 무언가 원숭이 같이 생긴 괴물들이 마차에 붙어 있는 탓에 빛바래 있었다.

‘역겹군.’

괴물을 마차꾼으로 쓰다니.

그런 가마 안에는 가느다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파악했다.

“라헬 엘븐하임.”

그러자, 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무엄하군요.”

힐끔 고개를 돌리자, 순록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여의 휘를 그리 마구 부르다니. 그런 친구가 어찌 여의 참된 신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누구 신하라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요정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곧 그렇게 될 겁니다. 물론 여의 피앙세와, 여를 모욕한 죄값으로 사지를 찢은 다음에 말이지요. 여가 특별히 제작한 향으로 푹 절여드리도록 하지요.”

“웃기시네. 미친 귀쟁이 년이.”

“…….”

그 다음 순간.

무언가가 빠르게 쇄도했다.

-팡!

마치 공기를 찢는 것 같은 소음.

나는 재빨리 땅을 박차고 자리를 피했다.

동시에 쿵 하고 내가 방금 서 있던 자리에 나뭇가지가 내리꽂혔다.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엄청난 크기의 구덩이가 나뭇가지가 꽂힌 곳에 패였다.

“……!!”

[피해라. 또 온다!]

하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곧바로 다음 나뭇가지들이 내게 날아들었다.

-쾅! 쾅! 쾅!

수없이 내리꽂히는 가지들.

전부 다 저 거대한 나무가 휘두르는 가지였다.

마치 가시 채찍을 휘두르듯, 거대한 나무 괴물은 제 가지를 무기로 쓰고 있었다.

“어떠한가요? 여의 세계수가. 아름답지 않나요?”

동시에 들려오는 요정왕의 목소리.

그 내용에 데우스가 기함했다.

[저 요정 년, 정말로 미친 년이었느냐? 저게 왜 세계수라는 것이더냐?]

“미친 년 맞다니까요!”

세계수.

그것은 바로 요정왕이 다루는 소환수, 바로 저 거대한 나무 괴물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대체 이계 어디서 저런 괴상망측하기 짝이 없는 괴물을 끌어다 소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확실하게 드러난 정보는.

저 세계수는 식물이 아니라는 것.

[당연히 식물이 아니겠지! 무슨 놈의 식물이 가지를 막 채찍처럼 휘두른다더냐!]

그리고 소드마스터에게도 통할 정도로 강력한 인식 저해를 대규모로 걸 수 있는 움직이는 요새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생에 소드마스터를 두 명이나 잡아먹은, 추정 10급의 괴물이라는 점이다.

나는 나뭇가지를 피하며 곧바로 호루라기를 집어 불었다.

-삐이이이익!

어지간한 인식 저해는 전부 뚫고 상대방에게 위치를 알릴 수 있는 아티팩트인 만큼, 멜은 이제 내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나, 위치를 안다고 해서 이곳으로 찾아올 수 있느냐는 건 별개다. 인식 저해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만큼, 멜이 길을 해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할 것은.

‘버티는 것.’

멜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추정 10급 소환수와, 마스터 급 소환사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할 수 있을까?’

절로 마른침이 고였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푹 젖는다. 이전까지 쌓였던 피로가 폭발하는 것처럼 몸을 덮친다.

‘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다.’

하물며 상대가 상대다.

당장 세계수만 때어놓고 봐도, 아라크네 급의 괴물.

심지어 저 놈은 나를 죽일 생각이 가득하다.

‘할 수 있나?’

전생의 나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거다.

당연히 도망쳤을 거고, 그 사실에 부끄러움조차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나는.’

나는 드레커 리텐슈노프다.

쥐뿔도 없는 천애 고아.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돌멩이가 아니라, 눈부신 빛을 발하는 보석이다.

이런 시련이 찾아온다고 무너진다면.

‘가주 자리는 애초에 포기하는 게 맞다.’

그건 자격이 없다는 증명이니까.

미스틸테인을 빼들었다.

동시에 날아드는 나뭇가지.

이전과는 달리.

나는 피하지 않았다.

“흡!”

휘두른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암적색 오러가 검신을 둘러싼다. 휘둘러진 검격이 나무줄기의 표피를 가르고, 내부의 살덩이를 찢어발기고, 마침내 물어뜯는다.

바인더샤칼 13식.

-콰직!

뜯겨나간 가지가 허공을 난다.

첫 공격의 성공.

하지만 기뻐할 틈은 없다.

그대로 검을 잘린 가지의 단면에 쑤셔 박는다.

바인더샤칼의 오러가 놈의 가지를 꽉 물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세계수가 비명을 지르며 가지를 회수한다. 나는 그대로 딸려 올라갔다.

순식간에 창공으로 솟아오른다.

나는 검을 뽑고 가지를 박차 뛰었다.

거대한 놈의 눈알이 섬뜩할 정도로 가까워진다.

핏줄 가득한 동공이 나를 응시하는 게 보인다.

동시에 세계수의 입이 순식간에 꽉 닫혔다.

약점인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단단한 이빨이 눈을 가리고, 마침내 가두어진다.

동시에 사방에서 나뭇가지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나.

‘상관없다!’

내게는 저 이빨을.

단단한 갑각을 뚫을 무기가 있으니까.

블러드하운드 54식.

붉디붉은 오러가 허공을 베었고.

“아,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놈의 이빨이 산산조각이 나며 비산한다.

동시에.

-푸욱!

물컹한 무언가를 가르며 검신이 쑤셔박힌다.

놈의 동공 한 가운데에 박힌 검에서 얼굴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핏물이 솟구친다.

동시에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 비명이 울려퍼진다.

-끄야야아아아악!

마치 대지가 뒤흔들리는 것 같다.

세상이 요동친다.

동시에 수많은 가시가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끝없는 공격.

나는 그 하나하나를 전부 베었다.

베고, 또 베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될 정도로.

검을 휘두른다.

하나.

-퍽!

모든 걸 다 벨 수는 없었다.

“커헉!”

옆구리를 후려친 나뭇가지에 나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튕겨나갔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쿨럭!”

[꼬, 꼬맹아. 괜찮느냐? 젠장, 이거 큰일인데……!]

핏물이 울컥 튀어나왔다.

사지가 뒤틀린 것처럼 격통이 찾아온다.

‘일어……나야 해.’

나는 바닥의 흙을 움켜쥐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눈앞으로 가지가 쏘아지고 있었다.

코앞까지 날아든 가지.

뾰족한 첨단이 내 얼굴을 노린다.

하지만, 나는 웃고 있었다.

‘늦었…… 잖아.’

죽음의 문턱까지 도달했나 싶은 순간.

“미안하다, 꼬맹아. 내가 길치라서 좀 늦었다!”

-콰과과과광!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세계수의 가지가 터져나갔다.

동시에. 염소 수염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멜 랭커스터는 힐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곤 피식 웃었다.

“잘 버텼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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