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허억, 허억.”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멜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꽤 하더라? 생각보다는.”
멜은 허리춤에 걸어둔 검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꼬맹이, 네가 죽을 줄 알았는데.”
“너무하시네요, 진짜.”
“안 죽었으면 됐지, 뭐.”
-카라랑!
그 순간,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멜의 검이 뽑혔다.
-화르륵!
마치 불길이 뽑힌 것 같았다.
검집에서 뽑혀 나올 때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한 검은 불길에 사로잡힌 채,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동시에, 순식간에 주변의 기온이 높아졌다.
약간 덥다고 느낄 정도의 온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불카누스.’
마그너스가 멜에게 하사한 검이자.
영원히 불타는 검.
화염검 불카누스.
‘이번 생에는 처음 보는군.’
맹렬히 타오르는 검신이 붉게 빛난다.
“……그 검.”
요정왕 또한 불카누스가 어떤 검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멜이 불카누스를 살짝 고쳐 잡았다.
“어디, 일 좀 해 볼까?”
-투쾅!
다음 순간.
땅이 터지듯 깨져나가며, 멜이 세계수를 향해 솟구쳤다. 흡사 투포환이 날아가는 것 같은 모습. 붉게 이어지는 불카누스의 화염이 마치 유성의 꼬리 같았다.
-콰가가각!
동시에 지옥의 겁화가 세계수의 몸을 내리그었다.
-키야아아아악!
어마어마한 비명이 울려퍼진다.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세계수가 가지를 마구 휘둘렀다. 하나, 멜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는 것으로 그 가지들을 접근하기도 전에 터트려버렸다.
그제야 지금까지는 덤벼들지 않았던 다른 소환수들까지 전투에 참전했다. 하나, 그 어느 것도 멜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무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데우스가 중얼거렸다.
[암즈의 체술이구나.]
“네?”
[저 염소 수염이 하는 거 말이다. 손가락 튕기는 거. 내가 현역이던 시절에 암즈에서 만든 체술 중 하나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암즈의 체술이요?”
나는 황급히 멜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달려드는 소환수가 터져나가는 것의 연관성은 발견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기술이야, 저게?’
대체 손을 어떻게 튕기면 적이 죽는단 말인가.
내가 기함하고 있는 사이, 멜은 벌써 세계수를 반쯤 불태우고 있었다. 주변에 돌아다니던 사슴과 순록은 이미 전부 다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상황.
그제야, 황금 가마에 쳐진 발이 젖혀졌다.
“이 쓰레기 같은 하등 종족 놈들이……. 감히 여의 소중한 아이들을 처죽여?”
가마 안에서 나온 것은 비쩍 마른 여인이었다.
반쯤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
나는 곧바로 저 여인이 요정왕 라헬 엘븐하임이라는 걸 깨달았다.
라헬 엘븐하임은 손에 뒨 곰방대를 꽉 움켜쥐며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그녀의 어두컴컴한 눈이 이글거리며 나와 멜을 노려보았다.
“비천한 것들이 감히! 그렇게 여를 우습게 보고도 남은 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당장 무릎을 꿇고 죄를 청하라. 그렇지 않는다면 허리 아래를 잘라, 땅을 기어다니게 해 주마!”
“허허, 약쟁이라더니, 그게 진짜였네.”
멜이 불카누스를 갈무리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웃는 것도 지금 뿐이로다.”
그 순간.
라헬이 곰방대를 휘둘렀다.
금빛 곰방대가 허공을 두드린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의 공간이 비직하고 찢어졌다.
마치 허공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구멍 너머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넘실거렸다.
라헬은 곰방대를 입에 물며 입술을 비틀었다.
“산양이어, 여의 부름에 따라라.”
그 순간, 멜이 황급히 내게 소리쳤다.
“귀 막아!”
그리고.
“울어라.”
-───!!!!!!!!
순간, 정신이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갔다.
* * * * *
-콰과과과곽!
충격파가 허공을 휩쓴다.
멜 랭커스터는 입술을 씹었다.
‘미친 새끼.’
대체 뭘 소환한 거야?
고작 울음소리만으로도 주변 사방의 모든 걸 날려버리다니.
‘얼마나 괴물 같은 놈을 다루는 거냐.’
역시나.
요정왕이 마스터의 격에 도달한 소환사라는 게 한낱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멜 랭커스터는 혀를 찼다.
“이거, 나가리인데.”
그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러면 전력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잖아.”
대충 대충 상대했다간 자신 또한 위험해 질 수 있다.
하나, 전력을 다하면 이 근방이 남아날 리가 없다.
멜은 힐끔 시선을 돌렸다.
저 밑에, 바닥에 쓰러진 드레커의 모습이 보인다.
방금 전의 울음소리를 듣고 기절한 모양.
이대로라면 전투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구하러 가자니…….’
멜은 다시금 전방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요정왕이 웃음 짓는 게 보인다.
고혹적이고 퇴폐적인 미소를 멜에게 던지는 요정왕.
이제는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듯한 모습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멜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뒤에 생긴 허공의 구멍.
그 구멍 안에서 검은 살덩이가, 꾸역꾸역 찢어진 공간을 넓히며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저 괴물, 최소 10급 최상위권이다. 어쭙잖은 소드마스터 수준은 될 거야.’
문제는 그 소드마스터의 덩치가 자신보다 백 배는 더 크다는 것일까. 체급 차이가 나는 만큼, 상대하는 건 더욱 더 까다로울 것이 틀림없었다.
“제발, 빨리 일어나줘라.”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멜은 바닥에 쓰러진 드레커를 한 번 더 흘겨보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허공을 박찼다.
불카누스의 검신이 살덩이에게 쇄도한다.
선빵은 필승인 법.
‘저 괴물이 다 기어나오기 전에…….’
일단 먼저 친다.
* * * * *
문득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뭐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나는 요정왕과 전투 중이었는데?
여기는 또 어디야?
그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거대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허리춤을 잡았다가, 이내 미스틸테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로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거대한 눈알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선조차 구분되지 않는 어둠 속.
세로로 쭉 찢어진 눈알이 붉게 빛난다.
그 눈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짓눌린 나는, 이내 무언가 떠올리고 말았다.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데우스 님?”
[그런 사람 아니도다.]
“맞네, 뭘. 아니,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데우스인지 제우스인지, 아니라니까?]
“탈모 드래곤?”
[이 쥐똥구멍 같은 꼬맹이가, 진짜!]
눈알이 가늘게 찢어진다. 분노가 가득한 시선이 내게 쏘아졌지만, 나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여기가 어딘지나 말씀해주시죠.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설마 저, 죽은 겁니까?”
[죽은 건 아니도다…… 아직은.]
“아직은?”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눈알을 쳐다보자, 데우스는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여긴 심상 세계 속이다.]
“심상 세계요?”
[그래. 정확히는 나의 심상 속이지.]
데우스의 심상 속?
왜?
분명 나는 요정왕과 싸우고 있었는데?
나는 마지막 기억을 되살렸다.
‘분명 그 거대한 살덩이가 보였고, 멜이 귀를 막으라고…….’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여기 왜 있는 겁니까?”
[네 심장이 멈추면서, 네 영혼이 이쪽으로 끌려들어온 것이다.]
“……뭐요?”
심장이 멈췄으면, 그건 죽은 거잖아?
“보통 세상 사람들은 그걸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놈! 내 말을 똑바로 들어라. 넌 아직 죽지 않았다니깐?]
“……심장이 멈추었는데,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데우스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그게 용의 심장이 가진 힘이다. 불굴의 의지와 용의 가호가 있으면, 너는 심장이 멈추어도 살 수 있도다.]
심장이 멈추어도 살 수 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능이 용의 심장에 있었단 말야?’
[하나, 이건 좋은 일이 아니도다.]
“당연히 좋은 일은 아니겠죠. 심장이 한 번에 멈출 정도의 적과 지금 제가 싸우고 있다는 소리니까요.”
[그렇지. 너는 너무 무모하다. 그리고 급하지. 어째서 그러는 것이더냐? 지금 네 재능이라면 필히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도다. 노력하면 가주도 될 수 있겠지. 그런데 급하게 마음 먹을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는 리텐슈노프의 가주가 될 수 없습니다.”
기억하고 있다.
제랄드 리텐슈노프가 가주 직위에 오르자마자,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제 형제와 조카들을 전부 죽여버린 걸.
거기에 더불어, 아덴이 에르반을 죽음으로 몬 걸.
“이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주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주가 되려면 제 큰아버지들을 뛰어넘어야 하고요. 그러니 지금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가문의 손에 죽은 뒤, 다시 태어나면서 한 맹세는 아직도 이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되고 있었다.
‘내가 모두 다 먹어치운다.’
어차피 사냥개로 살면 주인의 선택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목숨일 뿐이다. 그리고 이 가문에서 주인은 오로지 한 사람.
바로 가주 뿐이다.
그리고 이미 나는 능력을 많이 드러냈다.
‘그러니, 내가 이 가문을 벗어날 게 아니라면…….’
가주가 되는 것만이 내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가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네 선택이 그러하다면 이렇게 고생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 꼬맹이, 너를 존중하겠도다.]
“감사합니다. 근데, 그래서 여기서는 어떻게 나갑니까?”
[글쎄, 심장이 복구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걸 기다려야 하는군요.”
나는 그제야 바닥에 툭 주저앉았다.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그 순간.
[그리고…….]
“네?”
[네가 이 공간에 왔다는 것은 말이다. 네가 한 번 죽을 뻔 했다는 것도 의미하지만, 내 심상 세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의미한다.]
데우스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즉. 네가 내 기억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지.]
“데우스 님의 기억,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그 말은, 꼬맹이, 네가 이 몸이 기억하는 강자들, 네 조상들, 영웅들과 싸워볼 수도 있다는 뜻이도다.]
“……!!”
그게 무슨 소리지?
과거의 영웅들과 싸울 수 있다고?
“자, 잠시만요. 데우스 님. 그, 제대로 설명을 좀.”
[아, 시간이 되었군.]
“네?”
[심상 세계에서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그제야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황급히 데우스에게 소리쳤다.
“진짜죠? 저한테 거짓말 한 거 아니죠?”
[가거라. 나중에 또 올 기회가 있을 것이로다!]
“아니, 말을 좀 똑바로……!”
그 순간,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나는 눈을 떴다.
-콰광! 콰과과과! 캉!
엄청난 굉음이 곧바로 귀청을 찔렀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보인 것은.
“멜 경?”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는 멜과, 어마어마한 크기의 검은 산양이 날뛰는 광경이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