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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114화 (114/139)

114화

머리가 땅을 구른다.

“아, 안돼애애!”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 섞인 아우성이 울려 퍼진다.

요정왕의 죽음에 요정족들이 절망하는 소리였다.

나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요정왕의 머리를 힐끗 바라보곤, 이내 멜에게 소리쳤다.

“요정왕! 잡았습니다!”

“잘했다, 쥐방울!”

동시에 끔찍한 괴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소환사와 연결이 아예 끊어져버린 산양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산양은 고통 가득한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아악!”

“안 돼, 안 돼!”

그 소란에 비명을 지르던 요정족들이 마구 휘말려 육편이 되었다. 물론 그들은 요정왕의 죽음에 제정신이 아닌 탓에 도망칠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지만.

거대한 육신이 피우는 난동은 어마어마했다.

주변 땅이 마구 갈아엎어지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뒤흔들린다. 불타오르는 초목까지 합쳐져, 세상의 종말이 찾아온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나와 멜은 그 상황에도 긴장하지 않았다.

저것이 마지막 발악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곧, 허공이 부욱 찢어지며, 이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계에서 날아드는 검은 기운이 산양의 사지를 속박한다. 그러자 산양이 더욱 날뛰었지만, 이전보다 월등이 떨어지는 속도와 힘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요정왕의 마나를 더는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환사의 마나를 받지 못하면 소환수는 약해진다.

그 당연한 법칙에, 산양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검은 기운에 저항하지 못했다. 곧 산양은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검은 공간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검붉은 살덩이가 마구 우그러지고, 작아지며, 마침내 공간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메에에……

아련한 울음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흔들렸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토해냈다.

‘다행히 큰 변수 없이 끝났다.’

소환수는 보통 소환사가 죽는 순간 다시 이계로 끌려가지만, 가끔씩 강대한 소환수는 약해진 상태로 이 세계에 그대로 남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있던 요정족은 대부분 죽어 있었다.

요정왕의 소환수 또한, 다들 이계로 끌려들어갔는지 죽어서 시체가 된 녀석들을 제외하면 보이지 않았다.

“전장 정리만 하면 끝인가.”

나는 후들거리는 팔로 검을 끌어당겼다.

아직 살아남은 요정족이 있다.

그들을 전부 죽여야 한다.

그 순간.

“정리는 내게 맡겨라, 꼬맹아.”

허공에서 들려온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멜이 공중에 붕 뜬 채로, 지상을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불카누스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벌레 잡는 데에는 불이 최고지.”

멜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불카누스를 휘둘렀다.

다음 순간, 지옥의 겁화가 담긴 오러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여전히 숨이 붙어 있는 요정족이 그 불길에 전부 불타올랐다.

곧, 모든 요정족이 죽었다.

그제야 나는 땅에 주저앉았다.

전신에 탈력감이 가득했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프고, 팔다리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움직일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이딴 몸으로 남은 요정족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니, 멜이 저 멀리 굴러다니는 요정왕의 머리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멜이 내게 머리를 휙 던졌다.

“자. 네 전리품이다.”

나는 두 손으로 요정왕의 머리를 받았다.

절로 입술이 일그러졌다.

“윽, 아무리 그래도 사람 머리를 전리품이라고 표현하니 기분이 묘한데요.”

“그게 사람이냐? ‘요정’이라며?”

멜의 우스갯소리에 나도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죠. ‘요정’이었죠.”

나는 요정왕의 공허한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으로 그라힐의 팔다리는 전부 잘린 셈이군.’

요정왕의 비호가 없다면 그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제 남은 건.

‘진짜 팔다리를 자르는 것 뿐.’

“멜 경.”

“응? 왜.”

나는 멜을 바라보며 물었다.

“징벌 기사단,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난 섬뜩하게 미소 지었다.

* * * * *

“으…… 머리.”

조용한 유곽 안.

그라힐 리텐슈노프는 강렬한 오한에 잠에서 깨어났다. 타는 것 같은 갈증과 함께 두개골을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은 두통이 느껴졌다.

마약에 더불어 술을 진탕 마신 후유증이었다.

그라힐은 주변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아무도 없나…….”

하지만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손끝에 집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평소라면 작은 소리에도 반응하고 달려왔어야 할 자신의 기사들도, 그의 곁을 따뜻하게 데워줄 여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유곽 안.

평소였다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곧바로 파악했을 그라힐이었으나, 요정왕이 준 약의 독성은 그의 뇌를 완전히 좀먹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한참을 뒤척거린 그라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얼굴이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핀다.

탁한 눈알이 점점 밝아지며 초점이 잡힌다.

그제야 그라힐의 시각이 돌아왔다.

여전히 정신이 어지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이제는 최소한의 분간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라힐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시립한 검붉은 제복의 기사들을.

수십 명은 될 법한 기사들이 약간 떨어진 거리를 두고 가만히 그라힐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그 광경에, 그라힐이 멍청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사물의 분간은 가능했으나, 사리 판단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라힐은 한참은 더 끙끙거리며 눈을 찡그리다가, 이내 헉 하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허, 허어억!”

그제야 발견한 것이었다.

기사들의 제복에 달린 휘장을.

순은으로 만들어진, 독수리가 새겨진 휘장을.

“지, 지, 징벌기사단……!”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라힐이 말을 더듬었다.

그제야 그라힐은 제복 기사들의 맨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년 사내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힐을 훑었다.

“그라힐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아, 아자르 경?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그야, 알고 있으시잖습니까?”

냉혹하리만큼 차가운 어조에, 그라힐이 입을 꽉 깨물었다. 곧 그라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 행동에 징벌기사 두 명이 순식간에 그라힐의 양 어깨를 붙잡아 꿇어앉혔다.

“이, 이거 놔라! 나는 리텐슈노프다! 네깟 놈들이 함부로 대할 몸이 아니야!”

“리텐슈노프이시지요.”

징벌기사들은 그라힐을 끌어다가 아자르의 코앞까지 데리고 왔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그라힐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하,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건 주군께서 명하신 일이니까요. 주군께서는 그라힐 도련님께서 드레커 도련님을 암살하려 한 죄를 벌하시려고 하십니다.”

그 말에 그라힐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 노친네가 나를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입조심 하십시오. 가주님이십니다.”

“쉰내 나는 노친네의 개새끼가, 어디서……! 그깟 애비 없는 애새끼 하나 죽이려 한 게 뭐가 그리 큰 대수라…… 컥!”

다음 순간, 아자르의 손찌검에 그라힐의 얼굴이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동시에 그라힐의 입에서 핏물과 함께 박살난 이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쯧.”

아자르는 흰색 손장갑에 묻은 핏물을 노려보다가, 이내 장갑을 벗어던지고는 새 장갑을 손에 끼웠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은 그라힐의 턱을 붙잡고 가볍게 짓눌렀다. 턱이 뜯겨져나가는 듯한 격통에 그라힐이 눈을 부릅떴다.

“아, 아악! 아아악!”

“정신 차리십시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자르는 그라힐의 턱을 꽉 틀어쥔 채, 고개를 숙였다. 거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민 아자르가 조용히 되뇌었다.

“주군께서는 그라힐 도련님의 처분을 드레커 도련님께 맡기셨습니다.”

“므. 므어?”

“아시겠습니까? 그라힐 도련님의 목숨은 이제 드레커 도련님의 손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도련님께서 지금까지 계속 목숨을 노려왔던 사람의 손 말입니다.”

“……!!”

그 말에 그라힐의 얼굴이 더욱 더 새하얗게 물들었다. 얼굴에 튄 핏물이 그 하얀빛에 대비되어 더욱 붉게 보였다.

“저는 모든 사항을 전달해드렸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끝낸 아자르가 그라힐의 턱을 툭 놓았다. 그라힐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단장님, 오십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자르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유곽의 문 한 켠이 드르륵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 있는 건, 멜과 드레커였다.

드레커는 내부를 보고 눈을 움찔 떨었다가, 이내 성큼 성큼 실내 한복판으로 걸어왔다. 마치 수행하듯 멜이 드레커의 뒤를 따랐다.

아자르는 드레커가 다가오자 자리를 비켰다.

-툭

방금 전까지 아자르가 앉아 있던 의자에.

드레커가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 소리에 그라힐이 퍼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사방을 맴돌았다. 곧, 그의 입술이 덜덜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드, 드레커야. 미, 미안하다.”

“…….”

“내가, 내가 잘못했다. 형제간에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구나.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너무 무서웠단 말이다. 나는 네가 무서웠다!”

“…….”

“너, 너라도 이렇게 했을 거다. 할아버지는 나를 싫어하고, 아버지도 나를 괄시하고, 형제들도 나를 혐오한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두각을 드러내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요정왕을 시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라힐이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 광경을 드레커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내 마음을 알지? 알 거야. 너도 그랬을 거라고! 너 같은 재능이 있어도 똑같이 뒤따라오는 놈이 있었다면 이렇게 했을 거란 말이다!”

그라힐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좁히고, 사타구니를 비틀며 어떻게든 불쌍해 보이려 노력했다.

“그, 그러니까. 참작해다오. 제, 제발. 우리는 형제잖느냐. 리텐슈노프잖느냐! 서, 설마 할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마침내 울먹이기 시작한 그라힐.

그런 그라힐을 조용히 바라보던 드레커가 입을 열었다.

“끝입니까?”

“끄, 끝?”

“그럼 제안을 하겠습니다.”

제안이라는 말에 그라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 제안이라. 그래, 좋다. 뭘 원하느냐? 내 파벌? 돈? 여자? 뭐든 좋다. 주겠다. 다 주겠으니 제발 내 목숨만은 살려다오!”

드레커는 그라힐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닥을 나뒹구는 젓가락을 한 개 집어들었다.

“……?”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그라힐이 눈을 꿈뻑이는 순간.

드레커는 그라힐의 팔과 다리, 그리고 눈과 가슴, 마지막으로 목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사지의 근맥, 혹은 두 눈과 마나 하트, 아니면 목숨.”

“뭐, 뭐?”

“이 셋 중에 고르십시오. 제 목을 노린 대가는 그것들로 받겠습니다.”

선고가 떨어졌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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