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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115화 (115/139)

115화

“그,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싸늘하기 그지없는 유곽 안.

그라힐이 나를 노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악을 썼다.

말이 되기는, 패배했으면 뭐든 들어먹어야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면 형님께서 이기셨어야지요.”

내 대답에 할 말을 잃은 그라힐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얼굴에 화색을 띄고 소리쳤다.

“네놈, 이,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라헬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나는 요정왕의 정인이다! 감히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이라.

내 기억으로는 일방적인 요정왕의 짝사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장 요정왕의 정인이라는 양반이 유곽에서 뒹굴고 있는 것부터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요정왕이 두려워 형님을 못 죽일 것 같습니까?”

“요정왕이 아무리 약쟁이라지만, 그래도 7성 소환사다. 그런 여자를 적으로 돌리면 아무리 너라도 위험하지 않겠냐? 그러니 협상하자. 나를 풀어주면…….”

나는 대답 대신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내 손짓에 징벌기사 중 한 명이 요정왕의 머리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조용히 잘린 머리를 그라힐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래도 말입니까?”

나는 수급을 가볍게 흔들었다.

요정왕의 머리를 본 그라힐이 입을 콱 다물었다.

당황해 하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곧 그의 동공이 초점을 잃고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일이긴요. 요정왕은 죽었습니다. 제 손에 말이지요.”

“무, 뭐?”

그 말에 멍하니 있던 그라힐이 나를 마주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그럼 뭐, 이 머리는 다른 사람 것입니까?”

나는 그라힐의 무릎 앞에 머리를 던졌다.

데구르르 굴러오는 머리통이 무릎에 닿자, 그라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곧, 그라힐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 이럴 수는 없어!”

“이미 결착이 났습니다. 그러니 얼른 선택하시지요.”

내가 단호히 선을 긋자, 그라힐이 마구 고함을 질렀다.

“안 돼! 안 된다고!”

완전히 눈이 풀려 있는 것이,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네, 네놈. 누구냐. 누가 도와준 거냐! 노친네냐? 아니면 아자르, 저 개새끼가 도와준 거냐? 어떻게, 어떻게 너 따위가 요정왕을 죽일 수 있어!”

그 물음이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가 도와주었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결국 요정왕은 죽었고, 당신이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는 게 중요하지.

현실을 아무리 부정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

나는 발악하는 그라힐의 멱살을 꽉 틀어쥐었다.

그리고는 멱살을 쭉 잡아당기며 나직이 말했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죽일 겁니다.”

“어, 으으…….”

내 선언에 그라힐이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선가 지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아니, 형님. 이건 좀.”

내가 툭 멱살을 놓고 뒤로 빠지자, 그라힐이 허겁지겁 숨을 헐떡였다. 공포에 질린 그의 몸 밑에 누런 물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허, 허억, 허억.”

나는 가만히 그를 놔둔 채 지켜보았다.

여전히 현실 감각이 없는지, 그라힐은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어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딱딱!

나는 가볍게 손을 튕기며 그를 재촉했다.

“빨리 고르십시오. 시간 없습니다.”

그제야, 작은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

“뭐라고요? 안 들립니다.”

“……그, 근맥으로 하겠다.”

“……거, 참으로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근맥은 상하더라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물론 무기는 영원히 쥘 수 없겠지만, 그래도 눈과 심장이 병신이 되거나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다.

아마 그라힐도 그걸 감안해서 선택했으리라.

하지만, 이 선택은 그라힐이 앞으로 평생토록, 영원토록 리텐슈노프라는 성을 쓸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진정한 리텐슈노프의 혈통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차라리 눈과 심장이나, 죽음을 골랐어야만 했다.

리텐슈노프 또한 무가武家.

무가의 혈족이라는 인간이 죽음, 또는 폐인이 되는 게 두려워 무기를 놓아버린다?

그건 더 이상 상대가 혈족으로 대우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영락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그라힐은 이 순간부터 그런 존재가 되었다.

‘목숨이 아까워 병신 같은 선택을 자초했군.’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그의 앞에 푹 내리꽂았다. 그라힐이 그 단검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나는 징벌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징벌기사들이 붙잡고 있던 그라힐의 앙팔과 어깨를 놓았다. 갑작스럽게 구속이 풀리자, 그라힐이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맥 정도는 스스로 자르십시오. 설마 그거까지 제가 해 드려야 합니까?”

“…….”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뒤돌아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내 걸음걸이를 따라 시립해 있던 징벌기사들이 스스스 자리를 비켜 길을 내어 주었다.

곧이어, 뒤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 *

“……하는 식으로 처분을 내렸습니다.”

나는 부동자세를 취한 채 보고를 끝마쳤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책상 너머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미간을 가볍게 주무르던 마그너스 리텐슈노프가 씁쓸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되었구나.”

“가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내 대답에 마그너스가 입을 다물었다.

곧, 그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래, 잘했다.”

“…….”

“어차피 그라힐, 고 녀석은 그 상황에서 그런 머저리 같은 선택을 고르는 겁쟁이에 불과하다. 하긴, 저의 힘을 키울 생각 따윈 하지 않는 녀석이니, 차라리 병신으로 만들고 요양이나 시키는 게 낫겠지…….”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물론, 나로서는 그냥 콱 죽여버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라힐의 아버지인 볼칸 리텐슈노프의 눈치도 봐야 하고, 마그너스 또한 그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아직은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는 거다.

하여튼.

이것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방해하던 그라힐을 치워버렸다. 이제 앞으로 내가 신경 써야 할 사촌 형제가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로드리게, 에르반, 그리고 아덴 리텐슈노프.’

볼칸의 장남, 로드리게.

제랄드의 장남과 차남인 에르반과 아덴.

이제 나를 방해할 만한 사촌 형제는 그들 뿐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나보다 밑이다.’

현 시점, 에르반 리텐슈노프가 7성.

로드리게가 6성, 아덴이 5성에서 6성.

모두 다 현재 나보다 성취가 높다.

하나, 성장 속도는 월등히 차이가 난다.

내가 열두 살에 5성인 반면, 나와 수준이 비슷한 아덴이 현재 열아홉 살이다. 에르반은 스물일곱 살. 로드리게 리텐슈노프가 서른한 살.

‘지금 속도대로라면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7성을 찍을 수 있다.’

7성.

그 너머는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하나, 나는 내가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몸의 재능은, 그리고 나의 노력은 그만한 성과를 낼 만큼의 능력이 있었다.

“그래, 앞으로는 어찌 할 테냐.”

마그너스의 물음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공손하게 물었다.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앞으로의 행보 말이다. 그라힐이 쥐고 있던 것들의 처분도 겸해서. 네 계획을 듣고 싶구나.”

“가주님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딱히 없습니다. 그저 가문을 위해…….”

“제대로 대답하거라. 나는 네 진심을 듣고 싶다.”

마그너스의 붉은 눈이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뗐다가 다물었다.

그래.

더 돌려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제 결심하지 않았던가?

드레커 리텐슈노프로 살아가기로 말이다.

그리고 내 목적은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다.

“……리텐슈노프 가문의 가주 자리를 물려받고 싶습니다. 앞으로 계속 그 목표를 위해 달릴 겁니다.”

“……그러냐?”

마그너스는 내 대답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쓰윽 끌어올렸다.

“좋다.”

“네?”

뭐가 좋다는 거지?

설마 마그너스가 나를 차기 가주로 낙점하고 있는 건가?

내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마그너스가 킬킬 웃으며 마치 나를 놀리듯 말했다.

“자격이 있다면, 누군들 가주를 못하겠느냐?”

“아, 그렇죠.”

“열심히 노력해보거라. 하나, 쉽지는 않을 거다.”

“큰아버지들 때문인가요?”

마그너스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휘었다.

“네 큰아버지들도 지금까지 논 건 아니니까.”

맞다.

적어도 수십 년 전부터 차기 가주가 되기 위해 달려왔던 자들이 바로 마그너스의 아들들이다.

그런 만큼 그들과 나의 격차는 컸다.

하나.

“좁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호! 자신감은 좋구나.”

마그너스가 히죽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자신감만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가 이루어 낸 성과가 그리 작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뤄낼 성과도 그러하겠지요.”

“그렇겠지.”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제가 가주 직위를 물려받는 걸 뒷받침해 줄 겁니다. 제 손으로 가주님께서 저를 차기 가주로 낙점하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마그너스는 그런 나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노인의 애정 섞인 목소리가 내 귓전을 간질였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쳐,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아자르 랭커스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자르는 나를 보자마자 두꺼운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이건?”

아자르는 피곤한 눈으로 내게 말했다.

“그라힐이 소유권을 지니고 있던 것들의 목록이다.”

“소유권입니까?”

그 오묘한 표현을 눈치 챈 내가 아자르를 올려다보았다. 아자르는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 주군께서 그라힐에게 하사하였지만, 이번 일로 다시 거두어 가신 것들이란다.”

나는 목록을 받아 펼쳐보았다.

길게 이어진 글자들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한번 해보다

대충 서류를 살핀 내가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이 별것 아닌 귀금속과 돈이네요. 영지는 하나뿐이고.”

아자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라힐이 딱히 주군께 밉보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군께서 그라힐을 딱히 좋아했던 것도 아니니까.”

하긴.

마그너스를 끝까지 노친네라고 불러대던 인간이다.

그런 녀석한테 좋은 걸 줄 리가 있나.

“어찌 할래? 받을 거냐? 아니라면 다시 주군께 반납하면 되고.”

아자르가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군자금은 되겠지.’

없는 것 보단 나으리라.

“받겠습니다.”

아자르는 내 대답을 듣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한 가지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하나 이야기 해 주마.”

“경청하겠습니다.”

“충고하자면, 이번 일은 소문이 꽤 빨리 퍼질 거다. 아무리 그래도 직계 혈통이 경쟁에서 완전히 탈락한 일이니까 말이다. 가문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관심을 보일 거다.”

“외부까지 말입니까?”

“호사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명가 내부의 분란이니까.”

아자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내 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떠난 그의 빈자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웃었다.

“소문이라…….”

퍼지라고 하지.

애초에 이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인 시점에서 소문이 안 퍼질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이번 일로 모두에게 선전포고를 한 거다.

나 또한, 가문의 후계자라고 말이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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