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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119화 (119/139)

119화

요정왕이라고?

그럴 리가 있나.

‘걔는 내가 이미 죽였는데.’

라헬의 목을 베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요정왕이 나 같은 빙의자가 아닌 이상, 그녀가 다시 되살아나 나를 찾아올 일 따위는 일어날 수 없다.

나는 힐끔 아멜리아를 돌아보았다.

하나, 그녀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

“그 여자, 죽은 거 아니었어?”

아멜리아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죽었지. 내 손에.”

“그럼 저건 뭐야?”

아멜리아가 힐끔 객실 밖을 쳐다보았다.

“글쎄…….”

되살아난 망령 정도 되려나.

일단 만나봐야 할 필요는 있었다.

그저 광인의 소행이든, 아니면 요정왕을 참칭하는 다른 누군가이든. 결국 직접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들여보내도 되나?”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내 물음에 아멜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당연하지. 네가 선객인데.”

그리고 여기는 네 객실이고.

그 대답에,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허락할게.”

아멜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밖에서 기다린다는 자칭 ‘요정왕’을 불러들였다.

잠시 기다리자, 객실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한 명의 소녀가 실내로 들어왔다.

소녀의 귓전에 달린 요정귀 장식이 등불을 받아 반짝인다.

‘요정족.’

절로 허리춤에 찬 미스틸테인에 손이 갔다.

소녀는 사뿐사뿐 걸어오더니, 탁상의 맨 아랫자리에 정좌했다. 소녀가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리텐슈노프의 신성을 뵙습니다.”

요정족 답지 않은 말투와 행동거지.

의아한 마음도 잠시,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누구지?”

내 질문에 소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엘리스 엘븐하임이라고 합니다.”

“엘븐하임?”

엘븐하임은 요정족 왕족의 성이다.

하나, 요정왕은 자식이 없었을 텐데?

설사 라헬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었더라도, 그 딸이 나에게 깍듯이 대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로 의심을 품고 노려보니, 엘리스가 씁쓸히 말했다.

“경계하는 마음도 이해됩니다만, 저는 전대 요정왕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엘븐하임이라고 하지 않았나?”

“방계……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방계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지.

요정족이라고 해서 죄다 자식을 하나만, 그것도 직계만 낳는 건 아닐 테니까.

하나, 방계 출신이라고 해도 그녀의 행동은 이상했다.

요정족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할 선민의식이나 나를 향한 원망 또는 증오가 그녀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감사함이나 고마움이 느껴졌다.

의문스러운 일.

“왜 여기를 온 거지? 내가 요정족을 그다지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방계 출신이라도 알고 있을 텐데.”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입니다.”

“감사 인사?”

나는 그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요정족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짓을 한 게 없는데?”

오히려 증오와 분노를 받을 짓은 했어도.

하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엘리스가 나를 향해 꾸벅 절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아멜리아가 그 모습에 깜짝 놀라고 있으니, 엘리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연히 감사를 올려야죠. 온당히 저의 것이어야 할 자리를 되찾게 해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네 것이어야 할 자리?”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묻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눈빛은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네. 정당한 요정왕의 좌, 말입니다.”

“…….”

나는 아멜리아를 힐끔 돌아보았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냐는 물음이었다.

하나, 아멜리아 또한 아는 게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나와 아멜리아 간의 교감을 본 엘리스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본래, 요정왕의 좌는 저의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전대 요정왕 전하의 직계 혈통이 저였으니까요.”

“전대 요정왕이라는 게…….”

“라헬, 그 반역도를 말하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 년은, 서출 주제에 신민들을 선동해 감히 노려서는 안 될 자리를 탐하고 찬탈한 반역도에 불과하니까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대답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나는 조용히 턱짓을 했다.

“어디 한 번, 설명해 봐.”

그러자 엘리스가 천천히 입을 열고 옛날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전대 요정왕 전하께는 적녀와 서녀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볼 때, 적녀는 너겠군.”

내 말에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적통이었고, 라헬 엘븐하임은 서출에 불과했지요.”

그녀가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한데, 저보다 먼저 태어난 서녀 라헬은 제 지위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가진 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하긴.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라헬 엘븐하임은 마스터 급 재능의 소유자다.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서출이라는 제 지위에 불만이 가득했으리라. 일단 서출이라면 괄시당하는 게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라헬은 제 출신을 잊고, 능력을 내세워 요정족 급진과격파를 결집시켰습니다. 그 후, 그들을 이끌어 요정왕의 좌를 찬탈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직계 충성파는 완전히 파멸해, 지금까지는 그 명맥만 잇고 있었다고 그녀는 설명했다.

“한데. 내가 라헬 엘븐하임을 참한 덕분에, 네가 요정왕의 좌를 탈환할 기회가 생겼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 어이가 없네.”

그저 날 노리던 그라힐과 요정왕을 치웠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다니. 세상만사가 모두 다 이어져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건가.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내 물었다.

“그래서, 내게 라헬을 치워준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

“그렇습니다. 하나, 그것이 이 면담의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면?”

내 물음에, 엘리스가 다시금 내게 절을 하며 말했다.

“부끄럽지만, 은인께 청탁을 하러 왔습니다.”

“청탁?”

“부디, 요정족을 굽어 살피고 저희 족속들의 목숨과 운명을 연명해주십시오. 드레커 리텐슈노프 님.”

“……?”

이건 또 뭔 소리야?

* * * * *

잠깐의 당황스러움이 지나가고.

엘리스가 다시금 설명을 하자,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요지는, 네가 요정족을 이끌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잖아. 그 와중에 계속 외부에서 요정족의 커뮤니티를 침범하고 배척한다는 거고.”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소환사로서 엘리스의 능력은 고작 4성.

나이를 생각하면(그녀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모자란 건 아니었지만, 라헬 엘븐하임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한 바가 많은 수준이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따지는 거지?”

요정족이 개판이 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잖아?

오히려 내 목숨을 노리던 족속들이 망하는 거라면, 나는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굳이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멸족의 길을 걷고 있으니, 깔깔 웃어주지 못할망정 내가 그들을 구원할 이유는 없다.

“대가를 드린다면 어떻습니까?”

“뭔 놈의 대가. 암살자나 보내던 놈들이.”

“그건 저의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네 족속들의 전대 수장이 저지른 짓이었지.”

내 뾰족한 말투에, 엘리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곧, 그녀가 결심한 듯,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저를 드리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하겠지요?”

“뭔 미친 소리야, 이건 또!”

상상도 못한 대답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옆에서 아멜리아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들 족속이랑 엮이고 싶지 않다. 내가 지금 네 목을 안 자르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해, 너는. 그리고 니들, 외부인과 통혼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냐?”

“그건 아랫것들에게나 적용되는 법칙일 뿐, 저와 같은 고귀한 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규율입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 내가 왜 너를 취해야 하냐고 이 미친년아.

“너 내가 몇 살인 줄은 알고 있냐?”

“열두 살로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그딴 소리를 해?”

시원스런 대답을 들으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조심스레 살피던 엘리스가 이내 주섬주섬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와 손에 쥔 것을 바쳤다. 그것은 요정 귀 장식이었다.

“제 일족들의 시선이 걱정되신다면, 명예 요정족이 되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뭔 미친 소리야 이건 또.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절로 뒷골이 당겨왔다.

내가 돌발성 고혈압에 뒷목을 주무르고 있으니, 곁에 있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족속들과 통혼해서 드레커가 얻을 이득이 있어? 내가 볼 때는 없어. 그런 주제에 뭘 믿고 이딴 짓을 제안하는 거지? 죽고 싶은 거니?”

분노 섞인 목소리.

동시에 그녀의 몸 주위로 마력이 휘몰아친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얘는 또 왜 이렇게 반응해.’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간 뭔가 큰 사단이 날 것 같아, 나는 일단 아멜리아를 진정시켰다.

“네가 참아.”

“너는 이런 소리를 듣고도 참을 수 있니?”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왠지 시선을 피하게 되는 눈빛.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네 몸은 내게 가치가 없다. 뭔 미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둬.”

“…….”

그 말에 엘리스가 시무룩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엘리스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요정왕이라.’

[또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는 게냐.]

데우스가 나를 폄하했지만, 딱히 음흉한 생각을 한 적 없는 나로서는 억울했다. 그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나를 위해서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을 뿐이었다.

‘차기 요정왕이 내 지지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이거, 잘만 하면 오르피스를 먹을 수도 있겠는데?’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내게 원하는 게 요정족의 수호자 역할인가?”

“그렇습니다.”

무언가 내 태도 변화가 생겼다는 걸 감지했는지, 엘리스가 빠르게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게 충성하는 봉신이 될 수 있나?”

“봉신…… 말입니까?”

내 물음에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봉신.”

신하가 되어라.

일반적인 요정족이라면 개거품을 물고 칼을 휘두르며 날뛸 제안이지만, 지금의 그녀의 행태를 볼 때 이런 제안에 분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긍정할 것 같지.’

당장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요정족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군주로서 가릴 게 무엇이 있겠는가?

‘평소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만일 내 도움으로 그녀가 요정족의 수장이 된다면, 나는 내 명령(정확히는 내가 명령한 대로 따르는 요정왕의 명령)이라면 불속에도 뛰어들 광신도 집단을 휘하에 두게 되는 것이다.

‘구미가 안 당길 수가 없지.’

[음흉한 생각 맞구만.]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선택해라. 내 가신이 되어 일족을 구할지, 아니면 이대로 사그라들지. 잘 생각해. 나는 요정족을 멸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제안.

하나,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제안을 따르겠습니다. 요정족의 새로운 수호자 님이시어.”

* * * * *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혈맹의 계약을 맺은 뒤, 나는 엘리스를 돌려보냈다.

일단 내 이름을 어느 정도 팔아도 된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요정족 커뮤니티가 큰 공격을 받는 일은 없으리라.

‘이것으로 요정족은 물론이고, 오르피스까지 내 손에 넣었다.’

그것뿐인가?

요정족은 어둠의 사업에 크게 발을 걸치고 있는 족속.

그들의 사업 영역까지 한 번에 내가 먹어치운 셈이다.

“아주 좋아.”

이것만으로도 내 이름에 요정족이라는 허물이 묻는 건 충분히 갈음할 수 있었다.

절로 기분이 좋아져 웃고 있으니, 등 뒤에서 나를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멜리아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불만 가득한 시선.

곧,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고했다.

“빚이 늘었어.”

“……대체 왜?”

“이자.”

아무래도 저건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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