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뭐?”
유적의 ‘임시’ 토벌단장 레이드 랭커스터는 허겁지겁 천막 안으로 들어온 카빈의 보고에 눈을 꿈뻑였다.
“검을 뽑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눈을 깜빡이니 이미 제 목에 검이 겨누어져 있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레이드가 뚱한 얼굴로 카빈을 응시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드레커 리텐슈노프가 어린 나이에 높은 성취를 거두었다고 해도 그렇지, 카빈은 4성 기사였다.
4성 기사가 고작 열두 살 짜리 아이한테 선수를 빼앗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지금 장난하는 거냐?”
허풍쟁이를 보는 듯한 레이드의 시선에 카빈이 억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진짜입니다, 선배님. 제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레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빈은 이미 레이드와 함께 에르반 리텐슈노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다. 이번 유적 선점 임무도 에르반의 명령으로 드레커를 방해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 한통속인 만큼, 굳이 정보를 숨기거나 속일 이유가 없었다.
“그럼 뭐, 그 도련님이 너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이냐?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그게 말이 돼?”
“하지만 진짜입니다. 정말 순식간에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으음…….”
레이드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 진짜로 그 소문이 사실인가?’
언제부터인가 가문에 도는 소문이 있었다.
드레커 리텐슈노프가 열두 살의 나이에 5성의 성취를 얻은 게 아니냐는 소리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문을 헛소리 취급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성은 너무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레이드는 카빈의 목을 슬쩍 살폈다.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있는 목의 상처를 보니,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밖에서 겪은 것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진짜로 5성이면 어떻게 하지?’
열두 살의 나이에 5성의 성취.
그렇다면, 대체 드레커는 스무 살이 되면, 서른 살이 되면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단 소리인가?
‘그런 미래의 초신성을, 엿먹이라고?’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 선배의 속내도 모른 채, 카빈이 조급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합니까, 선배님?”
“어쩌기는…….”
레이드는 그 물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절로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젠장, 하필 이런 일에 엮이다니.’
레이드는 카빈 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손해뿐이었다.
레이드 랭커스터는는 에르반 리텐슈노프의 지령을 받고 이번 유적 선점 임무에 자원했다.
자신이 아끼는 후배들을 잔뜩 이끌고 말이다.
임무 자체는 크게 어려울 것 없었다.
가문에서 내려온 명령서에 따르면, 이 던전은 그다지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현재 이곳에 모인 토벌단의 수준이라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했다.
문제는 에르반이 레이드에게 따로 내린 지령이었다.
‘드레커 리텐슈노프가 이번 임무의 수장이 될 거다.’
‘네?’
‘녀석을 방해하라. 어떻게 해서든 그 임무를 망쳐.’
에르반이 내린 지령은, 드레커 리텐슈노프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못하게 최대한 방해하라는 것.
속된 말로 트롤링을 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찌되었든 레이드 또한 리텐슈노프 가문의 기사다. 자신에게 배정된 임무가 실패하면 그의 평가가 깎인다. 심지어 자원한 것이라면 더욱 더!
레이드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내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하더라도…… 에르반 도련님이 나를 중히 써줄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은데.’
에르반이 자신이 입은 손해를 매꿔줄 리는 없다.
에르반 리텐슈노프에게 레이드는 그저 넘쳐나는 체스말 중 하나일 뿐이므로.
하지만 내려준 지령을 실패했다가는 에르반의 분노가 떨어질 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에르반은 이번 일을 망치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젠장. 어쩌다가 이런 싸움에…….’
레이드가 머리털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딱히 가문의 파벌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안온한 삶을 살기 위해, 가장 괜찮은 파벌에 줄을 댄 것 뿐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니, 후계 경쟁의 최전선에 설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 재수없게 레이드는 후계자 싸움에 얽히고 말았다. 아예 발을 들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몸을 담군 시점부터는 뒤가 없다고 봐야 했다.
결국 레이드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뭐, 어쩌겠냐. 우리 같은 사냥개는 주인이 물라고 하면 물어야지.”
“저희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드레커의 실력 탓에 묘하게 겁을 집어먹은 카빈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레이드가 허탈한 얼굴로 웃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신 같은 새끼. 이 판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 우린 이미 목숨을 건 셈이야.”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번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그들 두 사람 뿐이 아니라는 것일까.
레이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성공하는 수밖에.’
성공하는 것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지령을 실패하는 상황은 상상조차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 * * * *
“어서 오십시오, 드레커 단장님. 레이드 랭커스터라고 합니다. 이곳의 임시 지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순박한 얼굴의 덩치 큰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나는 마차 창문 너머로 그를 흘겨보다가, 이내 그의 뒤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카빈을 살폈다.
두 사람의 옷깃에 달린 휘장은 붉은색 곰 문양. 아무래도 서로 같은 기사단 소속인 것 같았다.
‘적웅 휘장이라.’
적웅 기사단은 제랄드 리텐슈노프의 수련동 동기가 단장으로 자리하고 있는 기사단.
당연하지만 적웅은 제랄드의 영향력이 짙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그의 자식들도 충분히 그 기사단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이드에게 물었다.
“토벌단 단원의 정보를 듣고 싶은데.”
내가 마차 안에 앉아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보고를 요구하자, 레이드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하나, 그래도 딴에 단장 역할을 맡을 정도의 능력은 있었는지, 레이드는 표정 관리를 하며 대답했다.
“정보라면 어떤 것을……?”
“이번 임무에 차출된 사람들의 소속, 숫자. 그리고 등급까지.”
내 물음에 레이드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렀다.
하나, 곧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적웅 기사단 소속 평기사 열 명. 쇠매 기사단 소속 두 명, 청와靑蛙 기사단 다섯 명. 그리고 상급반 수련생 네 명입니다.”
“……그래?”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충 알 수 있었다.
‘이거, 완전 지뢰밭이네.’
에르반의 사주를 받았을 게 뻔한 적웅 기사단이 전체 토벌단 인원수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쇠매야 사실상 의미 없는 들러리지만…….’
청와 기사단.
푸른 개구리 휘장을 상징으로 내세우는 그 기사단은 에르반의 수족이나 다름 없는 집단이다. 에르반 리텐슈노프의 수련동 동기들이 꽉꽉 들어찬 곳이니까 말이다.
‘작정하고 깽판을 칠 생각이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따위라면 리텐슈노프 쪽 토벌단은 사실상 전력 외이군. 이놈들을 이끌고는 유적 공략 자체가 불가능하다.’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들은 유적 안에서 이를 악물고 내 앞길을 방해할 게 뻔했다. 유적 안에서 내게 칼침을 놓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다.
‘차라리 암즈 쪽 녀석들이 더 믿음직하겠어.’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닌 다른 가문의 수하들을 더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라니. 심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나는 미간을 주무르며 물었다.
“암즈 쪽은 어떤가.”
“이 주변에 진영을 세운 채, 대기중인 걸로 압니다. 딱히 이쪽으로 교류를 청한 적은 없습니다.”
그야 당연히 교류를 청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입장에서는 리텐슈노프의 토벌단은 어떻게 보면 자기들 영지에 생긴 유적을 털어먹으려는 강도 때니까. 강도와 협상하는 명가는 없다.
하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힐끔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델리우스를 살피고는, 레이드에게 물었다.
“……암즈 측 수장은 우리가 조사한 바가 맞나?”
내 물음에 레이드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모양.
“네, 명령서에 쓰여 있는 그 자가 맞습니다만……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부단장.”
“아,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일단은 알겠어. 피곤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내 말에 레이드가 힐끔 마차 안을 살폈다. 사내의 시선이 아멜리아의 얼굴을 훑었다. 곧, 레이드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저쪽의 아이스본 측 분은…….”
“내 ‘일행’이다.”
아멜리아를 감히 신경쓰지 말라고 단호히 내가 선을 긋자, 레이드는 찔끔 놀라며 물러났다.
“우리 세 사람이 쉴 수 있도록, 적당한 천막을 하나 새로 세우고 보고해.”
“알겠습니다.”
쓸데 없이 천막을 새로 세우라는 내 명령에도 레이드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나는 멀어지는 레이드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일단 겉으로는 멀쩡한 척을 하겠다, 이거군.’
당장 시비를 걸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아무래도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일은 탐색전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지.’
어쨌든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에르반 리텐슈노프의 사람. 내 편은 절대로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적진 한복판에 있다는 걸 언제나 상기해야 했다.
레이드가 떠난 후, 잠시 시간이 지나자 처음 보는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천막 설치가 끝났다고 알렸다.
우리는 곧바로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내 명령대로 아예 새 천막을 설치한 것인지, 내부의 상태는 깔끔했다.
천막 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아멜리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 아멜리아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곧바로 마나의 파동이 천막 안을 감쌌다.
“소음 차단은 끝났어. 이제 밖에서는 우리 목소리를 못 들을 거야.”
아멜리아의 말이 끝나자, 델리우스가 푸우 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긴장되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다들 뭘 그리 힐끔힐끔 살피는지. 쯧!”
델리우스는 휘적휘적 천막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를 끌고 왔다. 그는 의자를 삼각형 형태로 툭툭 놓고는, 한쪽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휴! 이제 좀 살겠네요. 주군.”
나는 델리우스의 왼쪽 의자 위에 손수건을 꺼내 펼쳐 주었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 그때 일, 안 잊었네?”
“어차피 해 달라고 졸랐을 거잖아.”
“툴툴거리기는.”
아멜리아가 사뿐히 의자에 자리하자, 나도 남은 한 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델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델리우스는 손부채를 휘적휘적 젓다가, 내 시선에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흠흠, 일단은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최악이지. 명령서에 왜 어느 기사단이 차출되었는지 안 적혀있나 했더니, 그냥 사방이 적이더군.”
토벌단 전체 인원수의 70% 정도가 내 편이 아니다.
사실상 임무 자체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는 상황.
하나, 그런 최악의 소식을 듣고도 델리우스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큼,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계획에 중요한 요소는 아니니까요.”
“그래, 그래서 정확히 풀어봐. 계획이라는 게 뭐지?”
나는 딱히 이곳에 올 때까지 델리우스에게 어떻게 암즈와 협동이 성공하도록 할 것인지 묻지 않았다.
천재 책사, 델리우스를 믿기 때문이었다.
“일단, 주군. 저를 신뢰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다.”
이 인간이 전생에 했던 수많은 공작을 떠올리면, 어떤 개소리를 해도 안 믿는 게 병신 짓이다.
물론 델리우스는 그런 내 심정을 모르는 만큼, 어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크흠, 거 참 쑥스럽게…….”
“하지만 이제 성소에 도착했으니, 슬슬 설명을 해 주었으면 하는군.”
내 진지한 말에 델리우스가 표정을 바꾸었다.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껄렁껄렁한 태도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전생에 익히 보았던 천재 책사로서의 카리스마가 온전히 드러났다.
“일단 제 계획은 이러합니다.”
델리우스는 진지한 눈으로 나와 아멜리아를 번갈아 살피더니, 이내 느릿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저쪽의 수장. 다르킨 암즈가 분명 곧 주군께 결투를 신청할 겁니다. 결투의 대가로 협력을 요청하시지요. 그 미치광이 싸움꾼이라면 분명 수락할 겁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