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자, 잠시만. 잠시만요!”
뜬금없이 결투의 판이 깔리자, 뒤에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황급히 내 곁으로 다가온 레이드가 속삭였다.
“결투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 아니. 갑자기 결투를 왜 하시는 겁니까? 유적 토벌 관련해서 암즈와 협상을 하셔야죠!”
레이드가 당황하며 팔을 휘적였다. 아무래도 그는 다르킨 암즈가 협상을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힐끔 뒤쪽에 서 있는 다르킨을 바라보았다. 다르킨은 근육의 압력에 터져서 찢어진 셔츠를 어느새 벗어던지고는 상반신의 근육을 마구 뽐내고 있었다.
‘저딴 인간이 협상을 하러 왔을 리가 없잖아.’
[아무래도 이 자는 눈치가 좀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방해할 기회를 놓친 것이던가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협상하는 중이잖아?”
“네?”
“다르킨 암즈가 결투에서 이기면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유적을 함께 토벌하자는 제안을 할 거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레이드는 내 대답에 입을 쩍 벌렸다.
미친 사람을 본 듯한 표정.
곧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저쪽이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이건 유적 토벌입니다, 유적 토벌! 수많은 아티팩트를 얻을 기회라는 말입니다! 결투 같은 시답잖은 짓 때문에 암즈에서 그런 기회를 포기할 리가…….”
“이보게.”
그 순간, 레이드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다르킨 암즈의 거대한 덩치에 태양이 가려진 것이었다. 다르킨 암즈는 레이드를 무섭게 내려다 보았다.
그 시선에 레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동시에 다르킨의 오른손이 레이드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윽!”
묵직한 압력이 느껴지는 손길에, 레이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다르킨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답잖은 짓이라니. 무인의 신성한 결투를 비하하지 말게. 또 다시 그런 소리를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네.”
그 말에 레이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르킨은 반대쪽 손도 레이드의 어깨 위에 올렸다. 적웅 기사단의 제복 어깨가 마구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암즈의 이름을 걸고 결투를 한다네. 설마 리텐슈노프는 암즈를 모욕할 셈인가?”
“큭! 아, 아니. 그건…….”
레이드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르킨에게 사과했다.
“모욕적으로 들렸다면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드도 그럴 생각은 없었을 겁니다. 최근 심신이 어지럽고 정신이 온전치 않아 헛소리를 자주 하더군요. 제가 따로 주의를 주겠습니다.”
“음, 그런 건가. 온전치 않다면 어쩔 수 없지.”
다르킨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는 레이드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쾌차하기를 바라네.”
순식간에 심신미약자로 등극해버린 레이드가 기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진영 한 가운데로 시선을 돌렸다.
“다 되었군요.”
“음, 조금 좁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느새 마련된 빈 공터를 바라보며 다르킨이 근육을 꿀렁꿀렁 들썩였다. 당장이고 무기를 휘두르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는 표정.
그야말로 투귀鬪鬼라는 별명에 걸맞는 모습이다.
‘앞으로 귀찮게 굴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미스틸테인을 쥐었다.
“그럼 시작하시죠.”
* * * * *
“선배님!”
카빈 랭커스터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드의 곁에 붙었다. 후배의 목소리에 레이드가 정신을 차렸다.
“뭐, 뭐냐.”
“괜찮으십니까? 방금 그…….”
카빈의 걱정에 레이드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괜찮겠냐?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모를 당했는데.”
개무시를 당했다. 부단장의 권위를 무시한 것으로도 모자라, 면전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것도 암즈의 정통 후계자 앞에서 말이다.
아무리 레이드가 무사안일주의를 표방한다지만, 이렇게 모욕을 당하면 불쾌감이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젠장, 혈통만 믿고 까불다니. 거지 같은 꼬맹이.”
레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드레커를 비웃었다.
어차피 드레커 리텐슈노프가 끈 떨어진 연이라는 건 리텐슈노프 가문의 사람들이라면 다들 아는 일이었다.
가진 바 실력이 뛰어나면 뭐하나?
그래봤자 가주가 바뀌면 곧장 방계로 떨어질 놈인데. 차기 가주 직위를 두고 경쟁해야 할 아비가 없는 만큼, 드레커의 몰락은 결정되어 있는 셈이었다.
‘끽해봐야 사냥개가 될 놈 주제에…….’
뭐 그리 잘났다고 사람을 개무시한다는 말인가?
레이드는 이를 악물며 대련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자신의 선배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빈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에르반 님이 명령하신 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겠구만, 뭘.”
레이드는 대련장에서 몸을 푸는 드레커를 힐끔 바라보고는, 이내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제까짓 게 암즈의 정통 후계자를 이길 수 있겠냐? 같은 5성인 나도 저 근육 덩어리는 못 이기는데.”
“그, 그렇습니까?”
“그래. 다르킨, 저놈은 괴물 중에 괴물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인지가 의심스러운 녀석이라고. 그런 자를 고작 4성 밖에 안 된 꼬맹이가 어떻게 이겨?”
그 말에 카빈이 드레커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나이 상으로는 열두 살이 맞긴 한데…….’
저 몸을 보고 누가 열두 살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미 성인 수준으로 성장한 드레커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드레커의 나이가 열여덟 살에서 스무 살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오히려 잘 됐어.”
레이드가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제깟 놈이 알아서 일을 벌였으니, 그 책임도 제가 지는 게 당연하잖아. 여기서 만일 암즈에게 유적을 빼앗기면 모두 다 저 녀석 탓이라는 거다.”
“아! 그렇군요!”
카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는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런데 선배님.”
“응? 뭔데.”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드레커 도련님이 저…… 암즈 쪽 수장을 이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레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곧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그게 되겠냐?”
레이드가 카빈의 등짝을 팍팍 치며 웃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어떻게 4성이 5성을 이기겠어? 카빈, 너. 은근히 보기보다 걱정이 많구나.”
“하, 하하.”
카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련장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레이드의 말대로 4성이 5성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드레커는 절대로 이 대련에서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겠지.”
여전히 웃고 있는 레이드를 뒤로한 채, 카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드레커가 자신의 목에 검을 겨누던 그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빈은 묘하게 마음에 쌓이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그럴 리 없어.’
자신의 선배인 레이드 랭커스터는 무려 5성의 실력자. 그런 사내의 안목이 틀렸을 리 없었다.
* * * * *
다르킨 암즈는 뛰어난 전사였다.
그는 축복받은 육체를 지니고 태어났다.
원래 덩치가 크기로 유명한 암즈의 혈통 중에서도 다르킨 암즈는 월등하게 덩치가 컸다. 자신의 형제들보다 두 배는 더 큰 우량아로 태어났을 정도다.
축복받은 강인한 육체는 전투에 특화되어 있었다.
덩치가 큰 만큼 근력도 강했고, 반응속도, 순발력, 지구력 등등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르킨은 마나를 다루는 데에도 능력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몸집이 큰 만큼 심장도 컸기에 더욱 더 강인한 마나 하트를 만들 수 있었다.
두껍고 질긴 혈맥은 덤이었다.
그렇기에 다르킨은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리텐슈노프의 신성이라고 하지만, 그래봤자 평범한 육체. 절대로 나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태생부터 강한 힘을 지닌 자.
그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나.
임시 공터에 서서, 드레커를 마주한 순간.
다르킨은 깨달았다.
“……오호.”
강하다!
드레커 리텐슈노프는 다르킨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르킨조차도 진심을 다해야 할 정도로 강했다.
‘열두 살이라고 했었지.’
일단, 드레커는 절대로 제 나잇대의 아이들과는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저 키만 큰 게 아니었다.
대체 뭘 먹었기에 저렇게 자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레커는 성인에 준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드레커가 근육 덩어리인 것은 아니다.
체격을 볼 때, 드레커는 다르킨이 지닌 것 같은 아름다운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은 절대로 빈약하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과인 건가?’
드레커가 들었다면 굉장히 어이없어 할 오해를 하며 다르킨은 손에 쥔 단창을 꽉 틀어쥐었다.
‘쉽지 않겠군.’
다르킨은 드레커를 노려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자세가 나보다 좋다. 절대로 어쭙잖은 실력자가 아냐.’
드레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절대 소문과 같지 않았다.
‘이런 상대가 4성일 리가 있나!’
정보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최소 5성.
혹은 그 이상.
다르킨의 입꼬리가 쭉 찢어졌다.
“네 말이 맞았군.”
“음?”
“오히려 내가 배울 게 더 많겠어.”
그 말과 동시에, 다르킨이 선수를 쳤다.
허벅지와 종아리의 혈맥에 마나를 쑤셔박는다.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쾌속의 도약.
순식간에 드레커의 코앞까지 쇄도한 다르킨이 창을 휘둘렀다. 힘조절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오만한 생각을 가졌다간 순식간에 작살이 날 테니까.
“흡!”
전력을 담은 큼지막한 횡배기.
오크만큼 두터운 양팔의 근력을 가득 담은 만큼, 창날 끝에 담긴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삐걱이며 휘어지는 창이 탄성을 가득 담고 드레커의 어깨를 노린다.
동시에.
-텅!
순간적으로 양팔에 느껴지는 반발력에 다르킨은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창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튕겨냈군!”
다르킨이 호탕하게 웃었다.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드레커는 다르킨의 전력이 담은 일격을 받아쳐 낸 것이었다.
동시에 드레커가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검날에 피어오르는 오러.
그 검붉은 빛을 본 다르킨이 눈을 희번뜩 떴다.
“좋구나!”
다르킨 또한 즉시 창날에 오러를 담았다.
암즈 제 3번식.
창대를 휘감는 마나가 곧 바람의 기운으로 화한다.
동시에 다르킨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일반적으로는 다들 겉모습만 보고 오해하지만, 다르킨은 절대로 힘으로 찍어누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속도로 승부하는 타입이었다.
암즈 제 3번식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도 그러했다.
사용자의 움직임을 가속하는 오러.
그 오러의 힘을 받은 쾌속의 창술이 드레커에게 마구 쏟아졌다. 다르킨이 즐겨 쓰는, 상대의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연격의 술.
하나.
-카가가각!
드레커는 그 모든 연격을 막아냈다.
그것도 최대한 간결한 동작으로!
그러면서도 점점 다가온다.
그 모습에 다르킨이 마른침을 삼켰다.
‘놀랍군!’
다르킨 암즈의 눈이 희열로 물들었다.
이것이 어떻게 열두 살이라는 말인가!
이것이 어떻게 4성이라는 말인가!
“으아아아아!”
다르킨이 기합을 내지르며 폭풍이 담긴 창을 뒤로 쭉 당긴다. 전신의 마나를 전부 쥐어짜, 오러에 담는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지른다!
전신의 근력을 가득 담은 찌르기. 6급 몬스터의 몸뚱이에 바람 구멍을 내어준 적 있는 공격이었다.
‘막을 수 있는가?’
다르킨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드레커를 보았다.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전력을 담은 이 일격을?
-콰과과과!
휘날리는 폭풍에 땅이 터지고 모래먼지가 흩날린다.
다르킨은 그대로 드레커의 가슴팍에 창을 쑤셨다.
그리고.
-콰광!
순식간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다르킨이 뒤로 날아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다르킨이 눈을 깜빡이다가, 슬쩍 자신의 애병을 바라보았다. 강철로 담금질한 창대가 완전히 터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하, 하하하! 으하하하!”
다르킨이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먼지를 뚫고 드레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이마가 찢어진 걸 제외하면, 멀쩡한 모습.
그 모습에, 다르킨이 폭소를 터트리고는 말했다.
“좋아, 당신이 이겼네.”
“그래. 그럼 약속대로…….”
“그러니, 이제부터 드레커, 그대를 형님이라고 부르겠다.”
“……?”
“앞으로 지도 편달 잘 부탁드리오, 드레커 형님.”
“…….”
곧, 드레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미친 인사가 뭐라는 거야.”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