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유적 벽화에 그려진 장소는 총 세 곳이었습니다.”
“…….”
“하나는 지금 저희가 공략하고 있는 이곳이고, 다른 두 개는 좀 헷갈리게 그려져 있는데…….”
“…….”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판단할 때는 두 장소가 다른 곳이 분명했습니다.”
델리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삼중 유적이라니.’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삼중 유적은 그저 평범한 유적이 아니다.
이중 유적만 해도 원래 있던 유적의 위에 새로운 유적을 건설한 걸 말하는데, 삼중 유적은 개별적인 유적이 세 개나 겹쳐 있다는 뜻이다.
당연하지만 밑에 있는 유적일수록 오래되고 뛰어난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을 확률이 크다.
예를 들면 고대의 잊혀진 성물이나, 대영웅의 무기, 전설에 나올 법한 아티팩트 따위 말이다.
‘……지금까지 삼중 유적이 몇 개 발견되었더라?’
분명 내 기억이 맞다면, 한 손에 꼽을 수 있었다.
제국 전역에 삼중 유적에서 출토된 아티팩트는 고작 다섯 개가 못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각각의 아티팩트는 그야말로 신기神器에 준하는 위력을 자랑했다.
‘핌불베트르 셉터, 레바테인, 바즈라…….’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닌 무구들.
그리고 지금.
그런 아티팩트를 얻을 기회가 내 손에 쥐어졌다.
‘침착하자, 침착해.’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 내 모습에 델리우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유적에 관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델리우스인 만큼, 그 또한 흥분에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그 정도로 삼중 유적이 가진 무게감은 컸다.
“이, 이, 이, 일단 진정하시죠. 주군.”
델리우스가 더듬거리며 내게 고했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게,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다.
“……하, 진정은 둘 다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 말을 들은 델리우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일그러진 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겠다.
“그, 그건 그렇네요.”
일단 둘 다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제자리에서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동시에 마나 하트로 전신에 마나를 돌렸다.
델리우스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엉성한 자세로 나를 따라 가부좌를 틀었다.
“후우.”
한참 동안 명상을 하자,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뜨고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다.’
삼중 유적이든, 전설의 신기神器든 간에.
일단 살아남아야 얻을 수 있는 보상이다.
‘빌헬름 슈미트, 놈을 잡는 게 먼저다.’
그 8성 배신자 놈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유적의 보물이고 자시고 없다.
‘기적이나 다름 없는 기회를 얻었다.’
절대 이딴 웃기지도 않는 일로 놓칠 수는 없다.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저 멀리서 허허 웃고 있는 빌헬름 슈미트를 노려보았다.
‘배신자, 네놈을 꼭 치우고 이곳의 보물을 얻는다.’
* * * * *
유적 토벌 이틀 차.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 4계층 토벌은 점심이 조금 지났을 무렵에 끝났다.
여전히 눈앞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제국 개미 뿐.
아무래도 이곳은 제국 개미의 둥지가 된 모양이다.
“형님.”
“왜?”
“슬슬 개미가 징그럽기 시작했소.”
“……오늘 하루 동안 거의 천 마리 가까이 처죽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진짜로 자그마한 동산 크기로 쌓인 제국 개미의 시체를 바라보며 다르킨이 질린 듯 중얼거렸다.
“사실 이 아우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소. 개미는 근육이 없소. 사실 따지고 보면 저 놈들, 갑각 덩어리 아니오? 전혀 멋지지 않다오.”
“그걸 이제 깨달았냐.”
나는 한심한 눈으로 다르킨을 살폈다.
여전히 상의를 탈의한 채, 근육을 드러내고 있는 다르킨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큰 부상은 입지 않았으나, 저렇게 계속 데미지가 쌓이다 보면 중요한 순간에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옷 좀 입어라. 상처투성이잖아.”
“이 아우는 이 상태가 가장 편하오.”
“내가 불편해. 아멜리아도 불편해하고.”
“형수님이 말이오?”
“……말을 말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다르킨이 쥐고 있던 철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쯧, 이것도 완전히 이가 나갔군. 역시 전용 무구가 아니면 이 근육의 힘을 버티지 못하는 건가.”
다르킨이 망가진 철검을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처음 결투를 했을 때, 내가 녀석의 창을 부서버린 탓에 다르킨은 무기를 잃어버렸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리텐슈노프에서 예비용으로 가져온 철검 몇 자루를 줬는데, 아무래도 예비용 무기인 만큼 내구도가 좀 많이 떨어졌다.
“좀 살살 다뤄라. 대체 검을 벌써 몇 개를 해먹은 거야?”
“세 개 째라오.”
“……우리가 예비용으로 네 자루 주지 않았었냐?”
“이제 한 자루 남았소이다. 형님.”
“아오, 진짜 미치겠네.”
이렇게 마구잡이로 무기를 다루면, 나중에 정말 중요한 순간(예를 들면 10번단 단주가 배신을 한다거나)에 다르킨은 무기 없이 싸우게 될지도 몰랐다.
“나중에 검 다 날려먹으면 무기 없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어차피 이 아우가 볼 때, 이번 토벌은 마지막 검이 망가지기 전에 끝날 것 같소. 그리고 설사 무기가 망가지면 또 어떻소? 아우는 이미 무기가 있다오.”
그렇게 대답하며 다르킨은 자신의 이두박근을 자랑했다. 근육 위로 핏줄이 꿈틀거리며 맥동한다. 다르킨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근육이야말로 진정한 무기! 개미 따위는 꿀밤만 좀 때려줘도 알아서 죽게 되어 있소이다.”
‘너네 단주랑 싸울때도 가서 꿀밤 먹여라. 이 빌어먹을 근육 돼지 녀석아!’
솟구치는 열불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으니, 저 멀리서 암즈 측 기사가 한 명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 모습에 다르킨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그, 단주님께서 전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층이 마지막 층인 것 같으니, 휴식 없이 곧바로 돌파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단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다르킨이 눈을 크게 떴다.
하나, 곧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군. 하나, 틀린 말은 아니지. 어차피 나올 만한 강한 놈이라고 해봐야 병정 개미와 여왕 뿐이니까. 크게 어려울 건 없겠구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사의 물음에 다르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곧바로 그럼 다음 층으로 내려간다.”
“알겠습니다! 그럼 리텐슈노프 측에도 곧바로 다음 층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고 전달하겠습니다!”
기사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는 내게 슬쩍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미약한 존경심이 담긴 눈빛.
아무래도 다르킨과의 결투 때부터 이 유적 토벌까지 내가 보여준 능력에 감탄한 것 같았다.
“…….”
하지만 나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휴식을 취할 틈 따위, 안 주겠다는 건가.’
쫒기는 상황도 아니고, 이미 토벌을 끝마친 시점에서 휴식도 취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계층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다.
빌헬름은 토벌단원들이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쯧.”
나는 혀를 찼다.
이렇게 나오면 토벌단원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제국 개미가 별 볼 일 없는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숫자의 폭력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이미 어제부터 꽤 강행군을 했고, 방금도 천여 마리나 되는 개미 군단과 싸웠다.
그런 상황에서 휴식 없이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치렀는데, 갑자기 8성 기사가 배신을 한다?
‘몇 명 못 살리겠군.’
절로 입맛이 썼다.
차라리 적당한 증거가 있었다면, 전력을 온존한 상태로 빌헬름을 쳤을 텐데, 놈이 배신자라는 증거가 내게는 없었다. 애초에 왜 배신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놈은 우리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낼 게 뻔했다. 완전히 방심한 상태에서 등 뒤에 칼을 꽂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칠 준비를 한다.
나는 조용히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멜리아.”
내 부름에, 제국 개미의 사체를 권태로운 눈으로 살펴보던 아멜리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이야기인데, 일단 놀라지 말고 들어.”
“응?”
내가 조용히 목소리를 깔자, 아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나는 최대한 진중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빌헬름 슈미트, 암즈의 10번단 단주가 다르킨 암즈를 노리고 있다. 암살이야. 아마 목격자를 치우기 위해 우리도 죽이려 할 거고.”
내 말에 그녀의 암청색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정말…… 갑작스러운 이야기네. 증거는?”
“증거는 없어. 정확히 설명하기도 힘들고. 그러나 믿어야 해. 분명 5계층의 토벌이 끝나면 배신할 거야.”
“…….”
“놈은 지금 계속 우리를 평가하겠다는 명분으로 토벌단 최후미에서 대기하고 있다. 저 위치에서 놈이 전력으로 우릴 몰아붙이면……”
“……토벌단이 몰살 당하겠지.”
아멜리아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부탁할 게 있어.”
“…….”
“빌헬름을 지켜보다가, 무언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곧바로 마법으로 공격해 줄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훑는다.
곧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드레커 리텐슈노프. 지금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나한테 부탁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알고 있어.”
만약 일이 잘못되거나, 빌헬름이 곧바로 발뺌한다면 오히려 아멜리아가 독박을 쓰게 된다.
아이스본의 후계자가 암즈의 단주를 이유 없이 습격하는 초유의 사건이 되는 거다.
그렇게 되었을 대,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 지는 나도 가늠할 수 없었다. 여차하면 이 자리에서 아멜리아가 오히려 암살자로 붙잡힐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지만 조금이나마 빌헬름을 상대로 우위를 가지고 시작할 수 있다.
양심 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나, 이 역할은 마법사가 아니라면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이 토벌단의 유일한 마법사였다.
“…….”
아멜리아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녀를 재촉하는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아멜리아가 거절해도 내가 할 말은 없다.’
진짜로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아멜리아는 말 없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다르킨 암즈, 빌헬름 슈미트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아멜리아의 눈동자를 일부러 응시했다.
그리고, 그 깊은 심해와 같은 눈동자 너머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마치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저항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속내와 생각을 읽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도와주겠다고 결정한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니까.
하나.
“……?”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일순 멈추었다.
뭐지? 실패한 건가?
아니다. 이건 그게 아니라…….
“……왜 내 생각을 읽다가 멈췄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아멜리아가 피식 웃었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곱게 접힌다.
“안 그래도 돼.”
아멜리아가 휙 몸을 돌렸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아멜리아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내게 미소지었다.
“굳이 읽지 않아도. 드레커, 널 믿을 수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쿡쿡 웃으며 떠났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빌어먹을 인생.]
데우스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나, 곧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아멜리아가 승낙했다.’
이제 남은 건.
싸움을 준비하는 것 뿐.
나는 미스틸테인을 꽉 쥐었다.
위대한 명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