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일장[一章], 당하소소[唐下素笑] 2
김수환.
그는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남자였다. 방과 후엔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다, 마중 나온 아버지의 차에 타서 꾸벅꾸벅 졸던 유년기를 살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평범해지지 않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을 평범하게 만들던 아버지의 직장은 더 이상 김수환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김수환의 어머니 또한 평범하지 않은 가정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은 더 이상 김수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가정은 갈라졌고, 이젠 김수환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에게 무너진 일상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는 골방에 앉아 세상을 버렸다. 하지만 김수환은 아직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학교의 친구들이 서로 인사를 할 때, 그는 매대에 앉아 무관심한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학교의 친구들이 공을 차며 땀을 흘릴 때, 그는 벽돌을 나르며 땀을 흘렸다. 그렇게 해서 살아본 세상은, 썩 시시껄렁했다.
그런 김수환이 유일하게 관심이 있던 것이라곤, 사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산 낡은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던 소설 하나 뿐이었다. 쌍검무쌍이라는 제목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평범하지 않았다. 무척 강했고, 천재였다. 운은 항상 그의 편에 서있었으며, 그는 수많은 여성을 사귀고 수많은 악당들을 때려눕혔다.
평범하지 않다면, 이런 것을 원했었다.
요령 없이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방구석에서 메말라갈 적에 했던 생각이었다. 이젠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초점을 잃어가는 눈에는, 몇 번이고 돌려본 쌍검무쌍의 한 장면이 걸려있었다. 주인공은 소면 한 그릇, 죽엽청 한 잔을 시키며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고프다.’
그 생각을 끝으로, 김수환은 눈을 감았다.
*
당소소가 눈을 떴다.
동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고혹적이었다. 흙먼지에 갈려나간 거친 피부는 붉은 생기가 감도는 흰 살결이 되어있었다. 제대로 자르지 않은 수염 가득한 입가는 도톰한 입술이 있었다. 당소소는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려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에선 비애가 묻어나왔다.
“난 굶어죽었구나. 하하. 하하….”
당소소는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져버린 자신의 전생이 우스워 웃었다. 그리고, 우스워 울었다. 그녀의 울음은 시비 하나가 울음소리에 달려와 어쩔 줄 몰라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신지요….”
당소소는 붉은 눈으로 시비를 바라봤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에 시비는 몸을 움찔거렸다. 당소소는 꽤나 감정적인 고용주였다. 보통 이럴 때면 다음날 한 명의 시비가 당가를 떠났다. 시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체념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죄송….”
“…식사를 할 수 있나요?”
“예?”
시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여러 가지 기억이 혼잡하게 뒤엉켜 다소 불안한 상태라는 것은 가주의 엄포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지 않은가? 시비는 그제야 당소소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
그녀는 땀에 젖은 내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채 가시지 않은 울음기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명가의 여식답지 않게 미묘하게 벌린 다리. 그렇게나 예민하던 당가의 아가씨는, 병상에서 일어나더니 지나칠 정도로 털털하게 변해있었다. 거기에 더해 반말은 예사에 종종 턱짓과 손가락질로만 지시하던 거만하던 그 태도는 묘한 존댓말로 바뀌어 있었다.
몇 달을 일하며 겪어보지 못한 일에, 시비는 당소소의 질문을 잊고 있었다. 당소소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비에 대해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을 내린 뒤, 그녀를 불렀다.
“저기….”
“아, 앗! 죄송합니다! 아가씨. 식사 말이지요? 어떤 것으로 내올까요? 평소에 자주 드시던 오향장육이라던지, 아니면 생선튀김요리를 준비해올까요? 아니면 연와[燕窩]요리를….”
“소면 한 그릇이랑 죽엽청 한 잔 주세요.”
“예?”
시비는 당소소의 말이 믿기지 않아 되묻곤,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녀의 오라버니인 당청이 당소소에 관해서 언급하는 것을 싫어하듯이, 당소소 또한 요구한 바를 재차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진짜 죽었다….’
“네. 소면.”
시비의 걱정과는 다르게, 당소소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시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방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 시비의 뒷덜미를, 당소소의 나른한 목소리가 잡아챘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하, 하연…. 하연이라고 합니다, 아가씨.”
“그래요.”
당소소의 목소리가 거둬진다. 하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잰걸음으로 독봉당을 나섰다. 당소소는 그녀가 떠난걸 확인하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설 섞인 한숨을 뱉었다.
“하, 씨발.”
그녀는 쌍검무쌍의 내용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소설의 안에서 당소소는 꽤나 비중 있는 악역이었다.
‘칠혼독을 먹었다는 것을 보면 아직 쌍검무쌍의 초반부야.’
주인공은 무당산에 올라 양의쌍절음양혜검[兩意雙絶陰陽慧劍]이라는 절대무적의 무공을 얻고, 기연을 겪으며 초절정고수가 된다. 그리고 무당산을 떠나 강호를 떠돌며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을 구해주는 것이 쌍검무쌍의 초반부였다.
주인공이 무공을 수련할 때, 거만하고 예민했던 당소소는 소가주인 당청에 의해 잔혈객 진명과 독두낭인 왕오에게 팔려갔다. 거래의 내용은, 둘 중 살아남은 한 사람만이 당가의 독화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막역한 사이인 둘은 당청이 내민 손을 거부했다.
하지만, 당청은 그런 사소한 감정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소문이 그들을 흉적으로 만들었다. 이름도 드높은 사천성의 구파일방들인 아미파와 청성파는 당가의 간곡한 요청에 응해 지역 곳곳에 뻗은 자신들의 힘으로 잔혈객과 독두낭인의 목을 졸라갔다. 질식하기 전의 둘 앞에 당청이 나타나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당명이라 불러야겠군, 처남.
소설 속 당소소의 회상속에선 당청은 그리 말하며 웃었다. 잔혈객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막역지우를 죽인 죄책감과 당청에 대한 분노는, 당소소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쌍검무쌍 초반부의 당소소는 당명의 폭거 아래에서 신음하며 악역으로 조형되었다.
주인공이 그녀를 구할 당시, 당명은 당소소의 뺨에 장법을 후려갈기고 있었고, 당소소는 귀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신혼 이 년차의 일이었다. 주인공이 황급히 당명을 물리치고 당소소의 외투를 들추자, 지독한 상흔과 피멍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소소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을 끊어냈다.
김수환의 삶에서 고통은 익숙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 소면 한 그릇을 먹고 행복해하며, 친구를 만나 시시콜콜한 일상을 떠드는 삶.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기왕 사는 거, 주인공의 삶을 살고 싶었는데.’
“씨발.”
당소소의 입에선 자연스레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에겐 역시 남자의 삶이 익숙했고 그것을 원했다. 평범하지 않다면 가장 행복한 특별함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김수환의 삶처럼 그런 형편 좋은 것들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곧 사파의 고수에게 데릴사위를 들인다는 명목으로 팔려나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여인의 몸으로 이 년간 모진 풍파를 겪을 예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평생을.
당소소는 눈을 뜨며 다시금 동경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당가의 문제아, 독화 당소소. 주인공의 위세에 빌붙어 남을 업신여기던 나찰독녀[羅刹毒女] 당소소. 주인공에게마저 버려져 마교에 몸을 위탁해 결국 주인공의 칼 아래 쓰러지는 독각음녀[毒角淫女] 당소소. 모두 다 자신이었다. 당소소는 동경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김수환. 그리고 당소소.’
김수환은 실패했다. 당소소는 곧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김수환과 당소소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소소는 웃었다. 김수환은 쌍검무쌍의 문장 하나하나까지 꿰고 있는 독자였다. 당소소는 아직 당가의 문제아, 독화 당소소였다. 독천은 아직 그녀를 애지중지 여기고 있었고, 당청은 아직 독두낭인과 잔혈객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양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입술의 끝을 들어올렸다. 그녀에겐 미소가 어울렸다. 어쩌면, 그에게도 어울렸을 것이다.
“아가씨, 소면과 죽엽청 한 병을 가져왔습니다.”
당소소의 등 뒤로, 발소리와 함께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소소는 그대로 뒤돌아 하연을 맞았다. 영문을 모를 그녀의 행동에, 하연은 잠시 당황한다.
“저, 이쁩니까?”
당소소는 하연를 돌아보며 입가에 대었던 검지를 떼고 처연하게 웃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으며 비치는 그녀의 초췌한 기색은 달을 이지러뜨린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성적인 어조와 행동은 그 아름다움에 비장함이라는 비녀를 꽂았다. 하연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고마워요.”
당소소는 넋을 잃은 하연의 손에서 쟁반을 뺏어들어 탁자 앞에 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깊이 숙이며 소면 한 젓갈을 들었다. 몇 줄기의 소면이 도톰한 입술 안으로 사라지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연은 허둥지둥 당소소의 곁에 다가와 잔을 채웠다. 당소소는 잔을 들어 죽엽청을 마셨다.
당소소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자, 하연은 쭈뼛거리며 당소소의 눈치를 살폈다.
“입에는 맞으신가요, 아가씨.”
“배부르다.”
“예?”
당소소가 나지막이 뱉은 말에 하연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에 더 당황하며 입가를 막았다. 지금이야 기억의 혼탁이 있다지만, 당소소는 언제 폭거를 부릴지 모르는 난폭한 아가씨였다. 하연은 멍청한 행동을 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눈을 감았다. 당소소는 베시시 웃으며 하연에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맛있어.”
“평소 즐기시던 것과 달라서 염려되었는데, 아가씨의 입맛에 맞다니 다행입니다….”
“하연…, 은 저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당소소는 하연이 안도할 새를 주지 않고 물음을 던졌다. 하연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마 가장 오래 아가씨의 시비를 하고 있는 사람일겁니다.”
“평소의 저는 어땠죠?”
“그것이….”
하연이 주저하며 당소소를 바라보자, 당소소는 턱을 괴고 다리를 벌린 편한 자세를 취하며 어서 말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하연은 숨을 들이키더니,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안하무인이셨습니다. 저희 같은 하인들에겐 그런 존댓말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아가씨를 애지중지여기는 가주님을 가볍게 보시고, 소가주님과는 앙숙이셨습니다. 항상 저녁 늦게까지 가문의 위광을 이용해 반반한 남자들을 쫒아 다니셨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당가를 심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
자신의 발언에 헛숨을 들이키며 당소소의 눈치를 살피는 하연. 하지만 당소소는 화난 기색 없이 더 말해보라는 듯,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연은 이왕 엎질러진 물 일진데, 남은 한 방울마저 남김없이 흘리자는 마음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채신머리없이 다리 사이를 벌리는 파렴치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앗, 아하하….”
당소소는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다리를 오므렸다. 그리고 그 웃음에 만족감을 담았다.
‘그래, 당소소는 당소소였구나.’
당소소의 그런 행동에, 하연은 울음 섞인 질문을 던졌다.
“저는 내일 당가를 떠나나요?”
“아니, 그 반대입니다. 저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요.”
당소소는 빈 잔을 하연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 옆에서 내가 당소소로 있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연.”
하연은 당소소의 말에, 울음을 그치고 당소소를 바라봤다. 시선은 마주한다. 평소의 그 표독스러운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오열에 가까운 절실함이 담긴 눈빛이 그 곳에 있었다. 하연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 앞으로 내밀어진 빈 잔을 채울 뿐.
당소소는 그 잔을 행복하다는 듯 바라보곤, 붉은 입술에 가져다 댔다. 다시 비워진 잔을 내려놓는 당소소의 얼굴은 취기가 오른 듯, 붉은 빛이 역력했다. 하연은 그런 당소소에게 넌지시 물었다.
“술상을 물릴까요, 아가씨?”
“아니….”
“그, 안색을 보아하니 조금 취하신 듯싶습니다만. 칠혼독을 복용하시기 전에도 음주가무같은 것은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 취했어어….”
당소소는 토해내듯 변명을 뱉었다. 감출 수 없는 취기가 어간 사이사이에 깊게 배어 있다. 하연은 술병을 거두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라도 술을 먹고 소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가주님도, 특히 소가주님도 좋게 보시진 않을 듯합니다.”
“당청?”
당소소는 꼬인 혀로 하연에게 반문했다. 하연은 당소소가 내려놓은 잔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쉬시지요.”
“당청! 좆같은 새끼, 넌 진짜 뒤졌어. 씨발놈이, 좆도 아닌 게…! 누굴 팔아먹으려들어?”
“에?”
당소소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충격으로 굳어있는 하연을 바라보며 꺄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