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이장[二章], 만마과해[瞞魔過海] 4
콧노래를 부르며 독봉당으로 향하던 당소소는, 후미진 담벼락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 소리들에는, 그녀에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하연의 목소리 같은데?’
얼핏얼핏 섞여오는 하연의 목소리에, 그녀는 발소리를 죽인 채 새어나오는 소리에 가까이 다가갔다. 담벼락을 등지고 있는 하연과, 그런 그녀를 둘러 싼 세 명의 시비가 당소소의 눈에 보였다. 당소소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긴 뒤, 그녀들을 염탐했다.
“야, 너 요즘 많이 컸더라?”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가요?”
“그 미친년 좀 돌본다고 가주님과 소가주님이 널 챙겨주신다며? 이러다가 정분이라도 나시겠어.”
“…도대체 무슨 불만인건데요.”
하연은 자신을 몰아세우는 시비들의 기세에 못 이겨 몸을 움츠렸다. 시비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신을 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자기 혼자 착한척하면서 모든 혜택은 다 받으려고, 목욕할 때 모두를 쫒아냈다며?”
“아니, 그건 아가씨가 낯설어 해서….”
“그리고, 이거. 품에 숨겨 놓은 거.”
시비 중 하나가 하연을 밀치더니 품 안에서 금빛의 노리개를 뺏어들었다. 그 광경을 보던 당소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가야 할까? 하지만, 나가서 어떻게 하연을 감싸줘야 하지…?’
당소소는 여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년인 자신을 전담해 준다면, 서로 좋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을 해야, 하연을 핍박하는 시비들이 납득을 하고 돌아갈 지도 차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당소소가 그녀들의 행동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노리개를 유심히 바라보던 시비가 기가 찬다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 이것 봐라. 진짜 받았잖아?”
“왜, 억울해서 달려들기라도 하게? 경력도, 능력도 없어서 독봉당에 처박힌 년 주제에.”
“대체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전 그저, 하던 일만 해왔을 뿐인데.”
“착한 척 좀 그만해. 네가 그 미친년한테 잘 보여서 한자리 얻어 보려는 거, 너무 티나 거든? 적당히 설치고 다녀야 뭐라고 안할 것 아냐.”
시비는 그 말과 함께 하연의 어깨를 밀었다. 하연은 속절없이 그 손길에 밀려나가 담벼락에 고개를 부딪쳤다. 하연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자, 세 명의 시비는 키득거리며 그 꼴을 비웃었다.
“그래도 집도 가족도 없는데, 출세하려고 발버둥 칠 수 있지. 너희들 너무한다.”
“뭐래니, 얘는. 그런 추잡한 짓은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안 해.”
“자, 이거 돌려줄게.”
툭.
하연의 앞으로 금색의 노리개가 떨어졌다. 하연이 그것을 주우러 몸을 굽히자, 다른 손이 불쑥 그 노리개를 낚아 채 들고 갔다. 하연이 고개를 들자, 고개를 푹 숙인 세 명의 시비들 사이에서 노리개를 쥐고 있는 당소소가 보였다.
“아, 아가씨…. 여긴 어떻게?”
세 명의 시비들 중, 노리개를 빼앗았던 시비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당소소에게 말을 걸었다. 당소소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노리개를 바라보다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뇨, 아가씨. 그, 그런 게 아니라…. 아, 요즘 아가씨에 대한 험담들이 돌아다녀서. 저희가 추궁하고 있었던 거예요.”
“마, 맞아요! 구체적인 험담들이니, 혹시 독봉당의 시비들이 아닌가 해서….”
“그래서 시키지도 않은, 짓들을 하고 다녔다….”
당소소는 세 명의 시비를 돌아봤다. 그리고, 하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물기가 가득한 눈망을로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가씨, 제발….’
하연은 당소소가 화를 내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독봉당은 당소소의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인원교체가 잦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하인들도 신입들이나 어리숙한 자들을 보내왔고, 자연스럽게 독봉당의 하인들을 깔보는 풍조가 만연했다.
그렇기에, 당소소가 여기서 폭발을 한다면 당장이야 통쾌하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녀들은 당청의 관할 아래에 있는 시비들이며, 소위 하인들의 실세들. 당청의 묵과 아래, 사소한 것들로 괴롭힘을 시작할 것이다. 땔감을 주지 않는다던지, 청소도구를 어디론가 빼돌린다던지 그런 사소한 괴롭힘을.
하연 자신은 괜찮았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불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소소는 그런 하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연.”
“네, 아가씨…. 제발….”
“조금만 참아.”
“읏?”
당소소는 그렇게 속삭이며 하연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하연을 골려먹던 시비들은, 고개를 숙이며 자신들의 웃음을 아래로 숨겼다. 당소소는 눈을 치켜뜨며, 턱을 젖히고 하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머리칼을 앞뒤로 흔들며 표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로 날 깔본 거야?”
“아, 아닙니다, 아가씨. 제가 어찌 감히 아가씨를….”
“으, 음…! 다, 닥쳐!”
하연이 잔뜩 억울해하는 표정을 짓자, 당소소는 헛기침을 하며 어색한 손짓으로 하연의 머리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하연은 그녀의 행동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걸 꾹 참고, 눈물을 또르륵 흘리며 그녀의 손길에 맞춰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하연은 울음기가 잔뜩 서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흥,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독봉당으로 따라와. 처음부터 다시 교육시켜줘야겠어.”
“흑흑!”
하연은 눈물을 흘리며 시비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훑어봤다. 그녀들은 평소보다 너무나도 약한 꼬장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연은 당소소의 귓가에 다가가, 재빨리 속삭였다.
“너무 약해요, 아가씨.”
“이, 이 빌어먹을 년이!”
“조금 더 표독스럽게….”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어? 아…, 빠한테 말해서 당장이라도 다른 곳으로…. 음…!”
당소소는 신나게 연기를 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을 주워 담았다. 진심이 아닌 연기였지만, 차마 다른 곳으로 보내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는지 거친 숨만을 씩씩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하연은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자신의 혀를 깨물어 눈물을 만들어 냈다.
“흑흑! 죄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도, 독봉당에서 보면 죽었어!”
하연은 눈물을 뿌리며 그 장소를 빠져나왔고, 당소소는 마음에도 없는 윽박을 지르며 그런 하연을 위협했다.
“…….”
그리고 남겨진 네 사람. 당소소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던 시비들은, 이내 당소소의 무표정한 얼굴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자주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저 얼굴을 했을 때의 당소소는 십중팔구 당가를 한번 뒤집어놓았다. 그렇게 되면 당청의 비호고 뭐고 소용이 없었다. 그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폭풍은, 느릿하게 그녀들을 불렀다.
“야.”
“네, 아가씨.”
“왜 내 것에 손을 대는 거야. 독봉당의 시비를 혼내는 건 내가 할 일이잖아.”
“죄송합니다. 소소아가씨의 험담을 듣곤 저희가 너무 과하게 나무랐나봅니다. 그럼 저희도 이만….”
시비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노의 대상은 그녀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로지, 독봉당의 하연이 그녀의 목표임이 틀림없었다. 뒤로 물러서는 그녀들을, 당소소가 불렀다.
“말 안 끝났는데.”
“네, 네!”
“만약 너희들이 내 시비를 내 허락도 없이 괴롭히다가 걸리면, 아버지께 독봉당에 시비들을 좀 바꿔달라고 건의를 해줄 수 있는데….”
당소소는 말끝을 흐리고 그녀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시비들은 그 웃음에서 묻어나는 냉기를 느끼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 주의하겠습니다.”
“독봉당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언제든 환영이야.”
당소소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뒤, 하연이 도망친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시비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당소소의 험담을 이어갔다.
“와, 진짜 무서워죽겠네.”
“어떻게 두 달을 병상에 누워있어도 저렇게 팔팔하게 지랄을 할 수 있지?”
“하연, 쟤는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당소소의 전담시비가 된 거야?”
하연을 괴롭히던 시비들이, 오히려 그녀에 대한 측은지심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푸흡! 아가씨, 연기가 그게 뭐에요…. 그렇게 엉성하게 머리채를 잡는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하연, 그만 웃어.”
“독봉당에서 보면 죽는다면서요? 정말 죽일 건가요?”
“아니…. 겁 줄 말이 생각이 안 났는데 어떻게 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당소소를 보며, 하연은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고 있었다. 한참을 웃다가, 당소소가 입을 삐죽 내밀자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잘하셨어요, 아가씨. 분명 거기서 절 두둔했다면, 더 힘든 일을 겪었을 거예요. 그녀들은 소가주님의 시비들이었으니까요.”
“자주 그러는 거야?”
“네, 뭐…. 옛날의 아가씨가 한 성깔을 하셨던 바람에 독봉당의 하인들은 신참들만 오는 곳이거든요. 저렇게 불러다가 군기를 잡기도 해요. 헌데, 아가씨는 왜 옛 모습처럼 연기를 하신건가요?”
하연은 당소소의 물음에 답한 뒤, 당소소의 의도를 캐물었다. 그녀가 봐온 병상에서 깨어난 뒤의 당소소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법이 서툴렀다. 슬퍼하면 슬퍼했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솔직한 아가씨. 그렇기에, 시비들에게 으름장을 놓을거라 생각했다.
당소소는 그런 하연의 물음에,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눈치를 줬던 것도 있고…. 당소소는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그렇게 보여야겠다고 생각 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하면, 너 대신 날 욕할 것 아니야?”
“아가씨….”
“그 편이 나아. 아주 틀린 사실은 아니었을 테니까. 실제로도 잘 풀렸잖아?”
하연은 당소소의 대답에 가슴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악당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바뀐 성격 탓인지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에 너무 무감각했다. 이대로 기억을 찾지 못하면, 하나 둘 새겨진 상처가 그녀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연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연은 당소소의 손을 잡았다.
“소소 아가씨.”
“응?”
“예전에 저에게 무엇을 했든, 전 괜찮아요. 그러니, 좀 더 아가씨만을 생각하셔도 괜찮아요.”
당소소는 하연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았다. 잠시 머리를 정돈하던 하연은, 문득 당소소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헌데, 어떻게 거기로 오시게 된 거에요?”
“가주실에서 결혼이야기를 좀 하고, 독봉당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
“…네? 뭘, 이야기하셨다고요?”
“결혼.”
아무렇지 않게 결혼이야기를 하는 당소소를 기가 찬다는 듯 바라보는 하연. 하연은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의 감각이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뜯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겨우 술렁이는 마음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상대는, 화검공자인가요?”
“하연, 나도 보는 눈이 있어. 불쾌한 소리는 좀 하지 말아줘.”
“그럼 누구신데요?”
“…음.”
당소소는 그제야 망설이며 말을 삼켰다. 잔혈객 진명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하연은 당진천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연은 우물쭈물하는 당소소를 보며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었다.
“또 보나마나 터무니없는 상대시겠죠. 그래서 가주실에 불려 가신 것 같은데.”
“아, 아닌데? 완전 다른 일이야.”
“얼굴에 다 써져 계세요.”
당소소가 한 손으로 황급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자, 하연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귀여운 아가씨를 데려갈 사람은, 참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떠오르는 의문.
“그 신랑 되실 분은 언제 만나러 가시는 데요?”
“아마, 내일?”
“…….”
당소소가 그렇게 답하자, 하연은 말없이 당소소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당소소. 하연은 당소소의 펑퍼짐한 옷을 부여잡고 말했다.
“왜, 왜 그래.”
“정말, 이런 걸입고 신랑을 만나실건가요?”
“뭐, 그렇게까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아니니까….”
“아가씨.”
하연의 노기어린 음성에, 당소소는 침을 삼켰다. 하연의 시선은 화장기가 전혀 없는 당소소의 얼굴에 닿아있었다. 수수하고 펑퍼짐하고, 허름한 옷과 장신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의 구석구석. 어쩐지, 아가씨가 아니라 도련님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 취향은 평소라면 뒤바뀐 취향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당소소를 모시는 시비로서 용납해서는 안됐다. 하연은 말을 이어갔다.
“옷, 다른 거 입으실 거죠?”
“으, 응….”
하연의 묘한 압력에, 당소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