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화 〉삼장[三章], 암해고도[暗海孤島] 1 (12/130)



〈 12화 〉삼장[三章], 암해고도[暗海孤島] 1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말이 있다.

바다 건너, 외딴 섬이라는 사자성어. 나의 눈앞에서,  뒤에서, 양 쪽에서 칠흑의 물결이 밀려온다.


이곳은 검은 바다의 한 가운데, 나는 외딴 섬.


*


잔혈객 진명은 자신의 앞에 놓인 서신을 놓고 입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서신에 박혀있는 당가의 표식은, 모든 걸 엎어버리고 싶은 진명의 충동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속을 삭이는 진명의 곁으로 대머리를 한 중년 사내가 다가온다.


“왜 그렇게 죽상이쇼? 뭐 나쁜 말이라도 적혀 있습디까?”


“…이거 당가 표식 맞지?”

“형은 그것도 모르오? 당가의 성씨가 한자로 박혀있으면, 일단 피하고 보라는 무림의 격언이 있잖소?”


“씨발아, 내가 진짜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냐?”

진명은 대머리사내의 두피를 찰싹 후려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대머리사내가 머리를 감싸 쥐고 콧방귀를 뀌었다.



“대체 내용이 무엇이기에 형님이 이렇게 끙끙거리시는 거요?”

“네가 직접 보던가.”

“어디보자….”


대머리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서신에 시선을 박았다. 허공을 유영하는 손가락. 그리고, 천천히 읊는 구절.




“…당가의 여식인 당소소가, 귀하에게 반해 성혼을 원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 내일 본인이 직접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대체 왜? 날? 성도 근처엔 발도 들인 적이 없는데…?”

“형님, 설마?”

“설마 뭐?”

대머리사내는 진명을 바라보며 불쾌한 웃음을 건넸다. 진명은 대머리사내의 앞에 놓인 서신을 뺏어들며 그 저의를 물었다. 대머리사내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정천오화[正天五花] 중 하나로 불린다는 독화 당소소를 건드리다니, 과연 사천성 사파의 영웅이시오, 형님.”


“이 미친 새끼가, 어느 정신나간새끼가 독천의 딸에게 손을 대겠냐? 진짜 쳐 맞을 소리만 골라서 하네. 오히려 네가 아미파의 속가제자를 희롱했잖아?”


“아니, 형님까지 그러시깁니까? 그냥 얼굴을 보고 너무 못생겼다고 충격을 받아 우는 것을 제가 어떻게 막습니까? 한동안 그것 때문에 산속에서 살았던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치가 떨리는데….”


“씨발아, 잘 피해 다녔어야 할  아니야? 누가 그런 얼굴로 태어나래?”




진명의 손이 대머리사내의 머리에 휘둘러져 찰싹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대머리사내는 입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런 어조로 물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형님. 헌데, 정말로 독화와 만난 적이 없소?”


“없으니까 이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거지…. 씨발, 이걸 구실 삼아서 죽이러 오는  아니야?”


“형님, 아버지가 그랬잖소. 이 사천성은 성도를 제외하면 무림인들에겐 가치가 없는 땅이라고. 설마 그 가치가 없는 땅을 뺏으려고 쳐들어오는 거겠소?”


“그러니까 의도를 몰라서 미치겠는 거지. 이 쓸모도 없는 땅 때문에 한창 눈치싸움 중인 성도에서 발을  직접 우리를 만나러 온다? 사파의 우두머리인 나에게 청혼을 하며?”



잔혈객 진명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감았다. 그도 나름 오랫동안 칼밥을 먹어온 인물이었다. 무림을 종횡하기 위한 처세술은 몸에 배인지 오래며, 복지부동 중인 사파들을 설득하며 단련해온 처세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적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의 수에도 대부분의 문제는 칼을 뽑으면 해결이 됐었다.

하지만, 사천당가라는 거대한 사천성의 호족에게 칼을 뽑는다? 당가가 자랑하는 암기와 독에 죽는 것 보다 못한 신세가 될 것이 자명했다. 진명이 끙끙 앓고 있자, 대머리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끼리 이렇게 고민해봤자 해결책이 있소?”

“없지.”

“그럼, 장로들을 불러 모아야 하지 않겠소? 이빨 빠진 노인네들이라곤 하지만, 무림의 일은 빠삭   아닙니까?”


“그래. 그게 맞는데….”



진명도 머리론 그래야 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숨죽여서  살고 있었는데 왜 하필 당가란 말인가? 진명은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차라리 함정이라면 자신들을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들로 보는 아미파와 청성파가 파야 맞는 일이었다.

종교에 뿌리를 두고 정의를 부르짖는 그들은, 그림자에 암약하는 사파를 못마땅하게 여길 테니까. 진명은 서신을 접고, 품안에 넣으며 말했다.




“왕오, 장로들을 소집해라.”

*




“…그러니까, 독천의 딸이 자네에게 홀딱 반해서 연서를 보내왔다?”

“그렇죠.”

“그리고 그 당가의 금지옥엽이 이곳까지 오는데 얼마나 남았다고?”


“이제 여섯 시진 남았군요.”


“…내가 자네 많이 좋아했던 거 알지?”

“그럼요. 고생만 시키시던 다른 분들에게 비해 쌍괴파[雙怪派]라는 현판과 건물을 쥐어주신 고마운 분이시지 않습니까?”

진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쥐수염의 백발노인이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탁자 위에 내동댕이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이렇게 엿을 먹여?”

“아니, 저도 눈뜨고 당한 건데 무슨 엿을 먹인 겁니까? 그리고 그 서신 그렇게 막 다루다간, 말년에 고생 좀 하실 겁니다.”

“뭬야?”


“그, 풍문으로 들리던 건데 당가의 표식이 달린 문양을 막 다루다가,  자가 먹는 모든 음식에 구토약을 뿌렸다고도 했던 기억이….”


진명은 은근슬쩍 운을 띄우며 쥐수염의 노인을 바라봤다.


‘흑서파[黑鼠派] 이궁. 강자에게 빌붙어 기회를 노리는 전형적인 아첨꾼.’




이궁은 헛기침을 하며 내동댕이친 서신을 곱게 접어 탁자 위로 조심스럽게 다시 올려놓았다. 진명은 시선을 돌려 원형의 탁자에 앉은 나머지 두 명의 노인을 훑어봤다. 그러자 학사풍의 노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쯔, 얼마나 평소 행실을 곱게 하지 못했으면….”

“저희는 사파입니다, 선생님.”

“…….”


“평소 행실이 곱든 나쁘든 당가한테 찍혔으면 이미 선생님의 탁자 위엔 찻잔이 아니라 고문기구가 올려져있을 거라는 겁니다.”


‘혈사파[血士派] 모량. 관직에 등용되지 못해 독기를 품고 세상을 증오하는 무능한 인간.’



찻잔을 쥔 모량의 손이 움찔거리자, 진명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쓸모가 없을 거라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쓸모가 없을 줄은 몰랐다는 생각과 함께. 진명은 나머지 한 명에게 시선을 돌린다. 비교적 검은 머리가 보이던 그는, 서신을 바라보더니 진명에게 물었다.



“그래서, 잔치 하냐? 배고픈데.”


“후우….”

“아니 흑규  멍청한 자야,  죽게 생겼는데 잔치 소리가 나오나? 잔치국수 대신 지네를 처먹게 생겼는데….”


“아니, 결혼식이면 고기 정돈 만들어야할 것 아닌가?”



진명은 흑규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져 한숨을 쉬었다. 이궁은 그런 흑규를 타박했다.


이것이, 사천성 제일 사파라 불리는 쌍괴문의 현 주소였다. 무능과 기회주의에 점철된 살아있는 시체들. 독천이 나설 필요도 없이 휘하의 부대 한 무리로 해결가능한 놈들이었다. 진명은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 세 명의 장로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탁자 위의 서신위로 손을 올렸다.

‘진짜 나한테 반한건가?’



진명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근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 멋있는 악당을 좋아한다는, 그런 풍문이 있었던 것도 같았다.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턱을 슬쩍 쓰다듬어본다. 자신의 외모가 그리 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도취될 무렵, 왕오는 그의 옆에서 슬쩍 귀엣말을 한다.


“형님, 이러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당가를 맞이할 것 같소.”


“저 이빨 빠진 노인네들 데리고 어떻게 준비를 하냐? 지금 나머지 이빨도 싹 다 뽑아주고 싶은데.”

“이대로 죽을 순 없잖소, 형님.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사파에 들어온 건데….”

왕오의 말에 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뒷배도 없고, 썩 착하게도 살지 않았던 그들에게 정파라는 문턱은 너무나 높았다. 어느 은거 고인이 점지해준 제자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며, 뛰어난 무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곳은 그런 화려한 빛이 아닌 그림자뿐이었다.

하지만, 이 사천성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작았다. 중천에 뜬  개의 태양이 사천성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명은 그 조그마한 그림자를 택했다. 살아야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려야하는 판단은 단 하나였다.


쾅!

진명이 탁자를 내리치자,  노인은 말싸움을 멈추고 헛기침을 하며 진명을 바라본다. 진명은 길게 숨을 뱉고, 흑규를 바라본다.

“합시다, 잔치.”

“뭐? 진짜? 새끼, 맨날 나 무식하다고 구박만 하더니 이제야  깊은 뜻을 이해 해주는구나!”

“진명, 그게 무슨 개소리냐?”

“이궁 선배. 정파, 사파라는 구분을 빼놓고 생각해봅시다. 당장 독천이 우리를 죽인다고 마음을 먹으면, 지금 살아 있겠습니까?”

진명의 말에 이궁은 입가만 씰룩일 뿐,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존재였다. 아미파의 무예와, 청성파의 검기는 눈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천당가는 아니었다. 그들의 암기와 독은 비열한 자들을 솎아내기 위해 더 비열해졌으니까. 진명은 모량이 쥔 찻잔을 슬쩍 훑으며 말했다.

“…지금 그 찻잔에 독을 넣어 우릴 죽일 수도 있다는 소리입니다.”

“엇험, 왜 자꾸 내 찻잔만 가지고 그러시나, 진명. 섭섭하게….”


“그러니까, 이런 게 날아온 시점에서 저희가  일은 그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 밖에 없다 이겁니다.”


진명은 서신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궁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그녀를 인질로 삼으면, 정파의 세 세력 간에 균열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아미파와 청성파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라 일단은 방관할게야.”

“인질로 삼을 힘은 있소?”

“네가 있잖느냐? 네가 우두머리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넌 엔간한 문파에 들어갔어도 일대제자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그녀의 호위로 피라미를 붙인다면, 네 힘으로 그녀를 잡아 거래에 나설  있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 세력이 손을 잡고 사파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 움직일 것 같은데.”



이궁은 진명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기회가 보였다. 중천의 세 태양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좁았지만, 그만큼 짙었다.



“우리가 세 세력과 거래를 나설 수만 있으면, 사천성 구석구석에 숨죽이고 있는 사파들이 주시할게야. 그리고 우리는 거래를 성사시키고, 주시하고 있는 사파들을 끌어들인다. 요지는 선을 지키는 것이지. 그들이 그어놓은 선만 넘지 않으면, 그들도 성도에서 인력을 빼긴 싫을 거니까.”

“…오늘 뭐 잘못 먹었소?”


“무슨 소리냐?”


“평소엔 꼬장이나 부리던 양반이, 갑자기 책략가 행세를 하시니 낯설어서.”

“이놈이!”



이궁은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이궁에게서 시선을 거둔 진명은 눈을 감고 이궁의 책략을 고려했다.



‘이 늙은이들과 함께한다면, 언젠간 망한다. …진짜 한번 질러봐?’

“왕오, 넌 어떻게 생각하냐?”


“뭘 말이오.”


“이 빡대가리 새끼, 넌 대체 뭘 들은 거냐?”

“들을 필요가 없잖소. 난 언제나 형님과 함께 가니까.”

왕오는 자신의 귀를 후비며 진명의 물음을 일축했다. 잠시 멈칫한 진명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오랫동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력은?”


“흑서파의 새끼 쥐들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지. 잔치준비라고 했나?”


“혈사파의 무인들도  쌍괴파의 지근거리에 있네. 이미 다들 무장상태야.”


“그래서, 잔치 하냐고.”


‘씨팔, 진짜 이 노망난 늙은이가….’

진명은 흑규의 말에 잠시 미간을 좁히며 화를 참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잔치를 열어 당문의 비위를 맞춥시다. 호위병력을 보며 판단을 할 겁니다. 여섯 이상이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거고, 혼자 오거나 호위무사만 데려온다던가 한다면….”

“한다면?”


“골방에 앉아 기회만 엿보던 노인네들의 엉덩이를 걷어 차줘야지.”



진명은 잔혹한 웃음을 입에 걸었다. 계획은 신중하게, 일은 잔혹하게. 그것이 잔혈객 진명의 신조였다.

*

“저…. 형님, 어쩔 겁니까?”


“…….”

“저 사람 단혼사 같은데? 근데 또 한명인데….”

“좆됐네.”

진명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우물쭈물하는 왕오. 진명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그렇게 준비를 했나 하는 허탈함에 사로잡혔다. 그런 쌍괴파의 무인들에게, 당소소가 다가선다. 당소소는 절도 있는 품새로 진명에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세요, 잔혈객 진명 대협. 당소소라고 해요.”

“아, 예…. 진명이라고 합니다, 당소소 소저.”




진명은 당소소를 바라보며 몸을 흠칫거렸다. 검은 눈물자국이, 뭉개진 분칠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진명에게 강제로 떠넘겨졌다는 슬픔을 표하는 듯 했다. 하지만 독화라고 불리는 그녀는 그런 추한 몰골이여도 아름다웠다. 진명은 그녀의 옆에 서있는 단혼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당소소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진명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 당소소가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서신은  받으셨는지요?”

“예, 받긴 했습니다만…. 저랑 결혼을…?”

“네. 늠름하고 차가운 진명님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답니다.”


“늠름, 차가운…?”



진명은 당최 당소소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쫒아갈 수가 없었다. 그와 그녀는 만난 적도 없다. 관계될 일도 전혀 없었다.

“그래요, 참 늠름하네요….”



무엇보다 이렇게 강렬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받을 만한  같은 건  적이 없었다. 당소소의 약간 충혈된 눈길은, 진명이 감당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 눈길에 고뇌하는 진명의 곁에서, 독화의 심미안에 불만을 품은 왕오가 당소소에게 말한다.




“우리 형님의 어디가 늠름하다는 것이오? 나처럼 생겼구만.”

“음. 늠름한…, 귓방망이? 장법으로 때려주고 싶은….”

“…….”




서로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당소소는 그들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우는 얼굴을 한 그녀가 그리는 섬뜩한 미소는, 왜 그녀가 독화라고 불리는지 알려주는  했다.
 

1